CINESSAY
영화로 만나는 세상과 사람
‘국보’
몸을 태워 남기는 소멸의 예술
감독 이상일 음악 이상일, 마리히코 하라
출연 요시자와 료, 요코하마 류세이, 타카하타 마츠키, 테라지마 시노부
[OST] ony Music
록밴드 킹 누의 보컬과 키보드를 맡고 있는 이구치 사토루가 피처링한 주제곡 ‘루미넌스’(Luminance)가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흐르면 관객들은 자리를 뜰 수가 없다. 음률이 서서히 쌓이다가 후반부에 폭발하는 형태로, 예술에 대한 집착과 상실감을 음악으로 다시 요약해서 보여주는 것 같다. 가부키 세계와 예술, 인생을 그리는 영화와 어우러지도록 전체적으로 일본풍의 현대적이고 미니멀한 음악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이상일 감독이 직접 음악감독으로 참여해 영화와 음악이 섬세하게 어우러진다
SET-LIST
01 Catastrophe 02 Kokuho Main Theme 03 The New World 04 Mangiku I 05 Chalk 06 Bloom 07 Dawn 08 Midnight Sun 09 Fons 10 Deal I 11 Legacy 12 A Night Before 13 Curtain 14 Deal II 15 Desire 16 Mirage 17 Mangiku II 18 Two of the Finest 19 The Darkest Hour I 20 The Darkest Hour II 21 A Faint Light 22 Vida 23 Sagi Musume 24 Kokuho 25 That State of Mind 26 Luminance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예술을 창조하는 사람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미 완성된 형식을 이어받아 오늘의 무대에서 되살리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불러야 할까? 전통예술의 계승자는 단지 보존자인가, 아니면 과거의 언어를 현재의 육체로 다시 쓰는 창작자인가? 우리는 전통예술과 그것을 계승하는 예술가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국보’는 이 오래된 질문을 깊이 파고든다.
예술가는 타고나는가, 만들어지는가
눈앞에서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본 소년 키쿠오(쿠로카와 소야 분)는 가부키 명문가의 예술가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켄 분)에게 맡겨진다. 소년 시절을 거쳐 어른이 된 키쿠오(요시자와 료 분)는 대대로 가부키 전통을 이어온 명문가의 아들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 분)와 계속해서 경쟁하면서 성장한다. 오직 한 사람만이 물려받을 수 있는 호칭인 국보가 되기 위해 서로를 뛰어넘어야 한다.
‘국보’는 인간 본질과 사회적 딜레마를 꿰뚫는 시선으로 인정받은 이상일(1974~) 감독이 관심을 가졌던 예술과 사람, 인간 존재에 대한 통찰을 집대성한 작품이다. 일본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요시다 슈이치(1968~)의 원작 소설 ‘악인’ ‘분노’에 이어 세 번째 영화화한 작품으로 소설의 섬세한 묘사와 영화의 시각적 상상력이 폭발하는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국보’에서 가장 공을 들인 구성은 슌스케와 키쿠오라는 인물로, 관객들로 하여금 ‘예술가는 만들어지는가, 태어나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가부키의 세계에서 가장 순결한 혈통의 후계자 슌스케와 피 대신 재능으로 그 세계의 경계를 흔드는 키쿠오는 서로를 비추며 성장하지만, 서로를 파멸시키기도 한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비추다
감독은 일본에서 가장 일본적인 예술을 다루면서도 이방인의 시선을 숨기지 않는다. 일본 사회가 오랜 세월 숭배해 온 국보라는 칭호를 경외하지만, 동시에 냉정하게 바라본다. 전통의 계승이란 혈통의 반복인지 타자의 시선을 통해 새로이 생산되는 변주인지, 묻는다. 재일교포라는 감독의 정체성은 키쿠오의 내면에 투영되어, 내부도 외부도 아닌 경계선에 예술가를 세운다.
경계인의 시선으로 일본 문화의 심장을 들여다보는 시선 때문인지 ‘국보’는 일본의 전통문화를 다루고 있지만, 흔히 쉽게 빠지기 쉬운 민족적 자긍심의 정서에서 매끄럽게 벗어나 있다. 역사나 정치적 맥락을 최대한 배제하고 인물을 중심으로 가부키의 흥망성쇠를 바라보는 장대한 스펙터클 속에 공감할 수 있는 다양한 캐릭터를 녹여 넣었기 때문이다.
‘국보’에서 보여주는 가부키 세계는 장엄하면서도 잔혹하다. 여성을 연기하는 남성 배우들은 가장 섬세한 여성성을 구현해야 하지만, 그 무대 뒤에는 견고한 가부장제가 숨어있다. 가장 남성적인 제도 안에서만 여성적 표현이 가능하다는 아이러니 속에서, 전통은 균열과 욕망의 무늬를 드러낸다. 예술은 그렇게 모순된 심장에서 자란다.
예술 후견인과 권력의 관계는 호수 아래 백조의 발처럼 세상에서 휘적댄다. 전통예술의 폐쇄성을 다루지만, 그 속에 자신을 망쳐서라도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어내려는 예술 수련의 과정을 놓치지 않는다. 그 치열함을 가부키 배우의 시선과 입장에서 들여다보며, 전통예술의 폐쇄성보다는 그 속에서 예술로 생존하는 예술가의 삶에 마침표를 찍는다.
전통은 계승인가, 창작인가
계승 장르의 전통예술에서 계승 받은 예술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되지만, 죽음과 함께 계승된 예술은 사라진다. 전통이라는 예술은 작품으로 관객들과 만나지만 결국 오직 사람으로만 명맥을 이을 수 있기 때문에 예술가 자신이 작품이고, 작품이 예술가가 되는 기묘한 순간과 만난다.
그래서 ‘예술 작품과 예술가는 하나의 교집합인가, 서로에게서 해방된 독립적인 대상인가’라는 질문이 마구 뒤섞인다. 전통을 계승해서 최고의 무대를 만들려는 두 남자의 우정과 질투, 경쟁을 통해 전통예술의 계승자를 국보라 부르는 압도적인 존재를 새롭게 정의하려 한다.
키쿠오와 슌스케는 함께 하지만 결국 서로를 뛰어넘어야 하는 숙명 속에서 단순한 질투를 넘어서 예술과 인간 본질을 사유한다. 감독은 예술이 어떻게 사람의 삶에 관여하는지, 예술가가 어떻게 사람들 사이에 녹아드는지를 보여주고, 질문하며, 사유하게 한다. 3시간 동안 의자에 꼼짝없이 묶인 채 예술에 자신의 인생을 모두 바친 한 사람의 인생을 불편하더라도 진지하게 들여다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극장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압도적인 무대 장면은 인상적이다. 가부키 세계를 재현한 무대미술과 의상·분장, 배우들의 몸짓과 미세한 호흡의 변화, 눈빛의 변화까지 무대 예술을 단순한 공연의 재현을 넘어 독창적인 영화적 체험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극장과 공연, 공간이 가진 힘을 활용해 예술의 현장성을 살리며 예술의 본질에 관해 묻고 답한다.
결과가 아닌 ‘과정’의 예술
과거 한때 ‘인간문화재’라 불리는 전통예술의 장인들은 전통의 보존자인가, 각자의 해석과 표현을 통해 전통에 생명을 불어넣는 창작자인가? 인간과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이 축적되고 응축된 양식 안에서, 개별 예술가는 각자의 몸과 시간, 해석을 통해 전통을 체화하고 반복하면서 동시에 변형하고, 그 반복과 변형의 긴장 속에서 고유한 형태의 예술 작품을 실시간으로 창작하는 사람들이다.
‘국보’를 통해 우리는 계승자가 아니라, 자기 신체를 변형시키고 단련시켜 온 장인으로서의 예술가를 만난다. 반복은 복제가 아니라 새로운 변형이며, 계승은 복종이 아니라 전통적인 형태의 창작이다. 예술은 단순히 작업의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 곧 시간이자 고통스럽게 쌓은 수련의 다른 이름이다. 몸을 태워 재처럼 남은, 그 소멸의 잔여물 역시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국보’는 역설하고 있다.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제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영화에세이집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