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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 시어터 ‘워 호스’ 5.16~7.30
전쟁을 바라보는 가장 낯선 시선
소년과 말의 우정으로 들여다본 전쟁과 폭력, 상실의 이야기

©Brinkhoff Moegenburg
공연예술의 역사를 바꾼 말 한 마리. 2007년 내셔널 시어터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워 호스’의 말은 믿기지 않을 만큼 생생했다. 숨을 쉬고, 달리고, 두려움에 떨며 살아 있는 존재처럼 무대를 누볐다. 관객들은 그것이 인형임을 알면서도 실제 동물을 바라보듯 울고 웃었고, 그 순간은 현대 공연예술의 새로운 이정표가 됐다.
‘워 호스’는 이후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를 거쳐 전 세계 100여 개 도시에서 공연되며 9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만났다. 내셔널 시어터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작품 중 하나로 자리 잡으며, 연극도 세계적인 흥행작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워 호스’의 10주년 기념 투어로 2020년 한국 공연도 예정돼 있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무산됐다. 당시 극장들은 문을 닫아야 했고, 오랜 시간 준비해 온 작품들은 관객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사라졌다. 공연 실황 중계 등 다양한 디지털 실험이 이어졌지만, 극장이 이전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공연예술의 미래를 둘러싼 불안도 커졌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관객은 다시 극장으로 돌아왔다. 배우와 관객이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며 만들어내는 현장성은 다른 무엇으로도 완전히 대체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물의 눈으로 바라본 전쟁의 참혹함
‘워 호스’는 150여 권의 아동·청소년 도서를 집필한 영국 작가 마이클 모퍼고(1943~)가 1982년 발표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국내에도 동명의 제목으로 2011년 번역·출간되었다). 소설은 출간 당시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전환점은 25년 뒤 찾아왔다. 당시 내셔널 시어터 부감독이었던 톰 모리스가 이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고 싶다며 작가에게 연락한 것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핸드스프링 퍼펫 컴퍼니가 참여하면서 작품은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매리언 엘리엇과 톰 모리스가 공동 연출한 2007년 내셔널 시어터 초연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를 거쳐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갔다. 연극의 성공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한 영화로까지 이어졌다.
마이클 모퍼고는 프로그램북에서 작품의 출발점이 된 자신의 경험을 직접 들려주었다. 잉글랜드 남서부 데번의 작은 농촌 마을에 정착한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윌프 엘리스에게 죽음의 공포 속에서 유일한 친구였던 말 이야기를 듣게 됐다. 저녁이면 말의 목에 머리를 기대고 이야기를 나눴지만, 전쟁이 끝난 뒤 살아 돌아온 것은 자신뿐이었다. 노인의 이야기는 모퍼고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전쟁에서 말들이 병사들과 함께 죽어갔고, 소모품처럼 사용됐으며 살아남은 말들조차 대부분 버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간이 아닌 존재의 시선으로 전쟁을 바라본다면 어떨까.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워 호스’다.

©Brinkhoff Moegenburg

©Brinkhoff Moegenburg
퍼펫이 만들어낸 생생한 무대
이야기의 주인공은 데번의 농장에서 자란 말 ‘조이’와 소년 ‘앨버트’다. 둘은 깊은 유대를 나누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조이는 군에 팔려 프랑스로 보내진다. 아직 입대할 나이가 되지 않았던 앨버트는 조이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전쟁터로 향한다. 한편, 조이는 영국군과 독일군 사이를 오가며 인간들이 만들어낸 비극을 목격한다. 기병대의 돌격은 실패로 끝나고, 병사들과 말들은 전쟁의 소모품처럼 쓰러져간다. 주인이 여러 번 바뀐 조이는 철조망에 걸린 채 죽음 직전까지 내몰린다. 앨버트 역시 친구를 잃고, 가스 공격으로 시력을 잃을 위기에 처하는 등 전쟁의 참혹함을 온몸으로 겪는다.
이야기는 마치 스케치북 종이를 찢어놓은 듯한 대형 스크린 앞, 넓은 무대 위에 펼쳐진다. 익살스러운 움직임으로 웃음을 주는 거위 인형과 객석 위를 날아다니는 새 인형들이 수채화 같은 농장 풍경을 만들어낸다. 악기보다 목소리에 더 무게를 둔 노래는 인물들의 감정을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무대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따뜻했던 풍경은 회색빛으로 바뀌고, 까마귀들은 죽음이 일상이 된 전쟁터 위를 맴돈다.
무엇보다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조이다. 실제 크기로 제작된 말 퍼펫은 세 명의 퍼펫티어가 함께 조종한다. 귀를 움직이고 꼬리를 흔들며 숨을 고르는 모습은 살아 있는 말을 보는 듯하다. 망아지였던 조이가 늠름한 말이 되어 무대를 가로질러 질주하는 순간 객석은 감동으로 가득 찬다. 기술에 감탄하던 시선은 어느새 조이의 운명을 걱정하는 시선으로 바뀐다. 같은 퍼펫임에도, 전쟁을 겪은 조이는 눈에 띄게 야위고 생기를 잃은 것처럼 보인다.

©Brinkhoff Moegenburg
기술을 넘어, 마음을 움직이는 극장의 힘
오늘날의 관객에게 ‘워 호스’는 더 이상 충격적인 새로움으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인형극은 놀라울 만큼 발전했고, 더 정교한 기술을 선보이는 작품들도 등장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이 전달하는 감정에 있다. 2007년 초연이 인형극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면, 2026년의 무대는 그 기술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백여 년 전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지만, 전쟁과 폭력, 상실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다.
작품은 거대한 역사나 이념 대신 한 소년과 한 마리 말의 우정을 통해 전쟁이 남기는 상처를 들여다본다. 무대 위 조이는 말을 하지 않지만, 전쟁의 공포와 상실을 누구보다 선명하게 전달한다. 인간이 만든 전쟁을 인간이 아닌 존재의 눈으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관객들은 그 낯선 시선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게 된다.
지난 20년 동안 무대 기술은 발전했고 관객의 기대 역시 달라졌지만, 누군가의 이야기에 함께 마음을 기울이는 극장의 힘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도 ‘워 호스’가 살아 있는 이유다.
글 정재은(영국 통신원) 사진 내셔널 시어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