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아시아 여성 최초로 우승을 차지한 소프라노 홍혜란. 메트 오페라에서 날아와 빈 슈트라우스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으로 신년 인사를 건넨다
인터뷰를 위해 뉴욕에 거주 중인 홍혜란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 상냥한 목소리로 전해오는 홍혜란은 유하면서도 강하고, 무척 겸손하면서도 내면에 포부가 가득 찬 사람이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홍혜란이 1위를 차지했을 때 그녀는 전혀 생각도 못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결선 무대를 보면 마치 우승을 예견한 듯 참으로 당당하게 노래했는데도 말이다. 그 두 얼굴 그대로, 홍혜란은 부드럽고도 강한 소프라노다.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난 홍혜란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용하고 나서지 않는 성격을 가진, ‘착한 아이’ 홍혜란의 어린 시절은 무척 고요했던 모양이다.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때 ‘고요한 밤’을 부르곤 하며 성악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이상하게도 노래 부르는 게 참 좋았다고 회상했다. 그때 ‘이걸 하면서 살아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부모님은 성악 공부하는 것을 반대하면서도 이상하게 레슨만은 계속 시켜주셨다고 한다. 그렇게 대전으로 이사가 소년소녀합창단을 하며 성악을 이어나갔고, 결국 대전예고에 진학한 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성악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입학한 학교에서 첫사랑을 만나 결혼을 했다. 졸업 후 그녀는 테너인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줄리아드 음악학교에 입학했다. 그녀의 간단한 인생 경력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참으로 유하게 주변 환경과 조화시켜왔음을 보여준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또한 남편의 권유로 지원하게 된 것이라고. 홍혜란은 콩쿠르에 나가기 한 해 전 메트 오페라 가수 오디션에 합격해 메트 출입증을 가진 당당한 ‘메트의 일원’이 되었는데, 이듬해 콩쿠르에서도 입상하게 되었으니 서른 즈음 그녀의 잠재력이 만개한 것이다. 아직 ‘메트 막내’인 홍혜란은 작은 배역들을 차근차근 소화하며 일종의 대기조인 커버로서 여러 역할들을 맡고 있다. 제임스 러바인이 지휘하는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중 ‘지크프리트’에서 숲 속의 새 역, 베르디 ‘맥베스’ 중 왕관 쓴 아이 역을 맡아 연기했다. 인터뷰 당시 요나스 카우프만 주역의 마스네 ‘베르테르’에서 소피 역 커버를 맡아 연습 중이던 홍혜란은 기라성 같은 오페라 스타들 속에서 느끼는 바를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여기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우리가 ‘춘향전’을 접하듯 오페라를 문화 속에서 즐기던 이들이에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접하지 못한 사람들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하는 시간이었죠. 이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선 열 배의 시간을 투자해도 부족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커버로 함께 연습하며 만난 요나스 카우프만을 보고 느끼는 바가 많았어요. 카우프만은 젊은 대가잖아요. 굉장히 도도할 줄 알았는데, 옆에 있는 사람을 늘 북돋아주고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범접할 수 없는 성격을 가진 걸 자랑으로 여기던 시대는 분명 지나갔다는 걸 느꼈어요. 그걸 보면서 저 또한 겸손해졌습니다.”
일과 가정, 두 마리 토끼를 노리는 소프라노
이제 커리어를 차근차근 쌓아가는 홍혜란은 자신이 어떤 가수가 될지에 대한 포부를 드러내기보다 자신이 존경하는 예술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홍혜란은 자신이 닮고 싶은 소프라노로 디아나 담라우를 꼽았다. 아이 둘을 가진 담라우는 연습실에 아이들을 데리고 온단다. 와서 젖도 먹이고, 아이들을 돌보러 잠시 쉬기도 한다고. ‘굳이 가정을 포기하면서까지 일을 해야 하나’ 하는 기로에 놓인 홍혜란은 그만큼 일과 가정을 조화시킬 수 있게 만든 담라우의 커리어가 못내 부러운 모양이다. “힘은 들겠지만 감수하면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거창함이 쏙 빠진 문장에는 일과 가정을 동시에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 익숙하지 않은 그녀이지만, 자신이 나아갈 길에 대해선 분명하게 밝히며 “가능하다면 ‘리골레토’의 질다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루치아 역을 하고 싶다”라 말했다. 2014년에는 시애틀 오페라극장에서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중 체르비네타 역을 맡으며, 앞으로는 유럽으로도 활동 범위를 넓힐 예정이라 한다. “푸치니나 벨리니 같은 벨칸토 오페라가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바그너가 아니고서는 내 목소리에 맞게 건강하게 갈 수 있는 배역은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자신의 캐릭터를 설명했다. 2010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 직후 홍혜란과 인터뷰를 가진 본지 파리 통신원은 그녀를 두고 “나이답지 않게 소녀 같은 감성”을 지녔다고 소감을 전해왔다. 어느새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우리는 그 모습 그대로의 홍혜란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자기 홍보가 미덕이 되어가는 시대, 예술마저 과시가 일상이 된 시대에 우리는 ‘노래’를 좋아하던 소녀 홍혜란의 소리 그대로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1월에 가장 바쁜 단체, 빈 슈트라우스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와 폴카 사이사이 홍혜란은 네 곡을 부를 예정이다. 카를 첼러의 오페라 ‘새장수’ 중 ‘나는야 우편배달부 크리스텔’, 프란츠 레하르 ‘유쾌한 미망인’ 중 ‘빌랴의 노래’,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봄의 소리’ 왈츠. 홍혜란은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하는 의미에서 즐겁고 신선한 이미지의 곡을 골랐다”라고 짧게 선곡 이유를 밝혔다.
빈 슈트라우스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지휘 빌리 뷔힐러) 1월 1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글 김여항 기자(yeohang@) 사진 빈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