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모테트합창단은 많게는 한 해에 대여섯 번 ‘합창 교향곡’ 무대에 선다. 제 손을 떠난 합창단을 보며 박치용은 무슨 생각을 할까
대규모 화합의 장에서 ‘합창 교향곡’은 화려한 피날레를 맞이하지만, 그 안에 뜻하지 않은 카오스가 존재한 걸 사실 우리는 꽤 많이 목격했다. 4악장에 이르러 200명가량의 인원이 합쳐지는 순간, 어느 누군가는 갑자기 개입된 성악에 탓을 돌리며 정교하지 못한 앙상블에 고개를 저을지도 모른다. 베이스의 첫 소절부터 감동했던 사람도, 성악의 개입을 이질적으로 느꼈던 이도 결국에는 압도당하겠지만 말이다. 교향곡이 끝나면 청중의 마음속엔 자연스레 성악의 효과에 대한 나름의 의견이 자리 잡게 마련이다.
서울모테트합창단은 많게는 한 해에 대여섯 번 ‘합창 교향곡’ 무대에 선다. 여러 교향악단의 ‘송년 축제’에 참여하지만 합창단은 마치 그들의 파티에 초대된 손님 같다. 따라서 합창단은 여러 단체들을 만나게 된다. 자연스레 ‘우리 단체의 합창 교향곡’이 아닌 국내외 오케스트라들이 합창을 연주하는 법, 그리고 과거의 지휘자들이 합창을 다루는 법 등 관찰자의 시선을 갖게 된다. 총리허설에 들어간 순간부터 합창단은 합창지휘자의 손을 떠난다. ‘합창 교향곡’을 듣고 있어야 하는 합창지휘자는 그 작품에서 무엇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합창 교향곡’의 합창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서울모테트합창단의 박치용 지휘자를 만났다.
4악장에 나오는 성악은 ‘합창 교향곡’ 전체 부분에서 어떠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가?
베토벤 당대에는 성악과 기악이 분리되어 취급되었다. 성악은 교회 양식으로 생각되었고, 인본주의적 사고 속에 인간의 이성과 능력이 강조됐다. 따라서 교향곡에 합창을 쓰겠다는 생각을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합창 교향곡’은 교향곡에 합창을 넣어야겠다는 음악적 의도보다는 실러의 시에 대한 베토벤의 집착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시에 대한 감흥을 인생 말기에 자신의 작품 속에서 통찰력으로 써 내려간 것이다. 시에 있는 운율이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느끼지 않았을까. 베토벤이 살면서 느꼈던 고뇌, 그리고 그 고뇌가 승화되어 나오는 환희. 베토벤 소나타의 디미니시 코드와 마이너 코드들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삶의 무게가 그 어떤 교향곡에서도 볼 수 없던 삶에 대한 열정으로 표출된 것이다.
성악 사용 방식에 대해 견해가 갈린다. 가사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입장과 성악을 기악적 음향으로 해석하는 입장으로 양분된다. 전자의 경우는 이상을 담은 메시지가 중요하기에 3악장까지는 합창 피날레를 준비하는 과정이라 보고, 후자의 경우에는 가사를 음향체로서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결국 작곡가는 1악장부터 4악장까지의 기승전결을 생각하게 되어 있다(가사를 포함한 주제로도, 음악적으로도). 기악을 끊으며 베이스가 ‘오, 벗이여, 이와 같은 음은 아니다!(O Freunde, nicht diese Tone!)’라고 나지막하게 나온다. 이 베이스의 첫 소절에서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은 ‘기쁨(freude)’이다. 개인적인 기쁨이 아닌 보편적인 기쁨 말이다. 베토벤은 두 음절에 나오는 독일어 악센트 관계를 음악에 정확하게 표현했다. 그래서 박자도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다. 이어 테너가 나올 때는 조금 더 이성적인 관점에서 기뻐하자며 리듬이 바뀐다. 그 다음엔 너무도 높은 음의 푸가가 나온다. 이걸 갖고 너무 기악적으로 쓴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지만, 성악가가 부를 수 있으면 된 것 아닌가?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벗어난 음은 아니니 말이다. 성악이 나오는 4악장 중간부터는 시의 운율과 뉘앙스 등 모든 것을 철저히 성악적으로 썼다고 봐야 한다. 난이도가 높을 뿐이다. 클라이맥스인데 음을 낮게 쓸 수는 없지 않은가.
초연 후 신문기사들은 나름의 의미를 지닌 시적 단어들을 반복되는 리듬에 맞춰 처리함에 따라 자연스럽지 못한 악센트가 생겨났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러한가?
악센트가 불일치하는 것은 있다. 예를 들어 ‘aus’ 같은 전치사에 악센트가 붙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 정도는 어느 작곡가도 피할 수 없다. 베토벤은 시의 운율을 음악적 리듬에 거의 완벽하게 썼다. 성악을 공부했기에 수많은 가곡들을 직접 불러봤지만, 이보다 더 규칙 안에 잘 들어가도록 쓸 순 없다.
리허설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보통 여러 개의 합창단이 모이기 때문에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피아노와 함께 리허설을 진행하는 게 원칙이다. 연습이 충분히 되었을 거라 판단하거나 시간이 없어서 못할 때도 있다. 지휘자에 따라 합창단을 맞춘 다음 성악진들을 불러 성악 파트만을 또 한 번 맞추기도 한다. 국내에서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합창지휘자를 따로 세우는 게 중요하다. 여러 합창단이 모이니만큼 음악적 색깔과 해석을 공유하는 게 중요한데, 그러려면 합창지휘자가 리허설을 충분히 진행해야 한다. 지금은 세 개의 합창단이 무대에 서면 합창단 지휘자가 알아서 연습을 시킨 후 모여 제각기 노래 부른다. 각기 다른 단체의 톤 컬러·발음·리듬 등이 같을 수가 없다.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진행하는 짧은 시간의 리허설로는 다소 부족하다. 연습한 양도 다르고 소리를 만들어내는 스타일도 다른데, 디테일하게 맞추지 못하고 무대에 오르는 거다.
최종 리허설에서 합창단의 지휘자는 어떤 역할을 하나?
총리허설을 할 때는 이제 합창지휘자의 손에서 떠난 거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손에 위임이 된 것이다. 하지만 합창단과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될 경우 합창지휘자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어떤 문제로 인해 자신이 요구하는 것을 합창단이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들 말이다. 합창단 수가 부족해서일 때도 있고, 리허설 장소가 너무 울리지 않아서 합창단원들이 목에 피가 나도록 열심히 하는데도 왜 소리가 작은지 묻는 경우도 있다. 지휘자가 특별한 것을 요구하면 합창단이 익숙지 않아서 따라가지 못하기도 한다. 드물지만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보컬 테크닉에 무지해서 불가능한 걸 요구할 때도 있다.
합창단에게 무리한 요구로는 어떤 것들이 있나?
편성 문제를 예로 들 수 있다. ‘합창 교향곡’은 대개 오케스트라 단원을 백 명 정도로 편성한다. 그런데 여기에 합창단도 백 명을 쓰면서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오는 소리를 지속적으로 내라고 요구하면, 그건 불가능하다. 오케스트라가 1백 명이면 합창단이 2백 명은 되어야 그렇게 할 수 있다. 최소한 오케스트라 숫자의 1.5배는 되어야 소리의 밸런스를 맞출 수 있다. 보통 교향악단들이 ‘합창 교향곡’을 연주할 때 편성을 늘린다. 지휘자들이 ‘합창 교향곡’에서 단원들의 숫자가 많기를 바라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예산 문제 때문에 이런 걸 다 맞추기가 쉽지는 않다. 아르농쿠르·노링턴·가드너와 같이 시대연주를 하는 지휘자들은 오케스트라 편성이 작으니 합창단원 수도 작게 쓴다.
편성을 작게 한 시대악기 연주 스타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들은 비브라토 없이 연주하는 것을 비롯해 연주 기법을 다르게 하니 소리가 작아진다. 그런데 편성까지 줄이면 더 작아진다. 그 사람들의 음악에 대한 접근 방법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들의 연주 방식만이 최선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전 세계 교향악단이 모두 고악기를 사용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대연주자들은 1960~1970년대 이전의 연주는 “막돼먹은 연주다”라고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연주의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가들의 정신을 간과하면 안 된다. 현대사회는 모든 분야가 세분화되어 발달하지만,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인간이 알 수 있는 지식을 총체적으로 이해했다. 그랬기에 괴테가 슈베르트에게 “왜 곡을 그렇게 쓰느냐”고 야단도 칠 수 있었던 것이다. 통찰력으로 세계를 이해했던 시대의 마지막이 20세기 초라고 생각한다. 20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대가들의 연주는 지금 시대연주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해석이 엉망이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음악에 대한 직관을 갖고 있었다.
음악을 총체적으로 직관하는 지휘자로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
푸르트벵글러·토스카니니·에리히 클라이버·클렘페러·발터·앙세르메·뵘·카라얀·번스타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연주에는 굉장한 힘이 있다. 그 뒤로 반트·마주어·아르농쿠르·노링턴·가드너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 어떨 땐 좀 건조하다. 셀·라인스도르프·뮌슈·발터 등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으로 망명하여 미국 클래식 음악의 전성기를 누렸던 지휘자들의 음악을 들으면 참 좋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경험을 했고, 고향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터전에서 새로 역사를 쓴 사람이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나 마주어 같은 사람들의 음악도 참 좋다. 마주어의 경우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합창단과 함께 한 녹음이 좋다. 극장에 있는 합창단들보다 방송합창단과 함께 하는 ‘합창 교향곡’ 연주를 더 높이 평가한다.
좋은 합창단이 더 좋은 ‘합창 교향곡’을 완성하는가?
‘더 잘하는’ 합창단이라는 뜻이다. 대가들의 연주에서도 아마추어 수준의 합창단들이 합창을 맡는 경우가 꽤 있다. 대학생 합창단을 쓰는 경우도 있고. 카라얀이 빈 징페라인과 많이 연주했지만 사실 전문 합창단이 아니다. 카라얀은 베를린 방송합창단과 같이한 버전이 가장 좋다. 합창단이 아마추어일 경우 음악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우선 강약 표현이 안 되고, 훈련되지 않은 목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 합창단 수준에 따라서 4악장의 다이내믹이 완전히 달라진다. 리듬감·탄력·앙상블, 모든 것이 차이난다.
글 김여항 객원기자 사진 박진호(studio B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