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가 아닌 과거의 악기를 위해 만들어진 작품들에 대한 해석 문제는 언제나 ‘고증’과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언드라시 시프의 자세는 지극히 원론적이다. 그는 자필 악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무엇보다 페달을 포함한 악기의 기능적인 문제에서도 작곡가의 아이디어보다 현대 해석자들의 그것이 현명하게 진화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전과 낭만 사조의 전환점에 절묘하게 놓여 있는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에서도 그의 견해에는 타협이나 절충을 보이지 않는다. “해석의 문제에 우리가 왈가왈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악기 선택 역시 신중해야 합니다. 베토벤은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포함한 현재의 피아노를 분명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그에게 이 피아노는 2천 명이 넘는 대형 공연장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해도 말이죠. ‘뭐라고? 내 작품들은 큰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으라고 만든 작품이 아니야!’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피아노로 바흐의 모든 작품을 한 번 이상 녹음하고, 다소 뾰족한 느낌의 음색으로 조정된 스타인웨이로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녹음한 사람의 의견으로는 이색적이다. 다만 이따금 파격적인 페달링을 통해 전혀 색다른 조형의 베토벤을 만들어내거나 기존의 규범적 템포를 무시한 듯한 (시프의 평소 이미지와는 많이 다른) 빠르기 선택에서 작곡가의 의도를 집요하게 캐내려는 연주자 자신의 ‘오리지널리티’를 보여주곤 했다는 기억은 남아있다. 과거의 행보를 참고하지 않더라도 두 대의 범상치 않은 피아노와 함께 한 ‘디아벨리’는 꽤 신선한 동시에 권위도 함께 지니고 있다.
두 장의 음반 중 첫 번째는 1921년 산 벡스타인 피아노로 녹음되었다. 우선 작품의 거대한 규모와 스케일을 부담스럽지 않게 만드는 가벼운 음상과 밝은 톤 컬러가 눈에 띈다. 저음의 현은 다소 풀려 있지 않나 의심이 들 정도로 푸근한 음색이며, 고음역에서도 가늘게 뽑혀 나오는 음상을 여유 있는 배음이 포근하게 감싸는 느낌이다. 시프의 해석은 완만한 다이내믹을 다소 나열적으로 풀어내는 모습이며, 변주들 중 특정한 정점을 마련해 그 방향으로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굴곡을 편안하게 맞닥뜨려 갈등을 원만하게 해소시켜나가는 방법을 취한다. 두 번째 음반은 시프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1820년 산 프란츠 브로트만 피아노포르테를 사용했다. 눈에 띄는 해석의 차이는 없으며, 단지 프레이징 사이와 변주 사이에 놓인 파우제와 페달링의 간격 등을 악기의 기능적 특성에 따라 좀더 이완된 느낌으로 배치했다. “고음은 깨끗하고, 중음은 자연스런 울림을 지니며, 저음은 끈기 있는 음색이 훌륭하다”는 시프의 말대로 악기의 상태와 작품의 시대성이 건강하게 어우러진다. 특히 느린 변주들에서 필수적으로 표출돼야 할 즉흥성과 환상성이 현대악기에서는 맛볼 수 없는 묘한 감각으로 다가온다. 동시대의 작품 두 곡을 연결고리로 삼은 선곡은 연주자의 위트이다. 벡스타인으로 연주된 소나타 Op.111은 절제된 루바토 사이로 느껴지는 뉘앙스가 매력적이며, 피아노포르테로 해석한 바가텔 Op.126 여섯 곡은 베토벤이 상상했고 이상으로 삼던 특유의 낭만적 정서가 강하게 풍겨 나온다.
글 김주영(피아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