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메 예르비의 말러 ‘대지의 노래’, R. 슈트라우스 ‘죽음과 변용’

그들의 전성기는 영원히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12월 1일 12:00 오전

루체른과 취리히가 스위스의 독일어권을 대표하는 도시라면 프랑스와 인접한 제네바는 로잔과 함께 ‘로망드 지역’을 이루는 중심 도시다. 루체른 페스티벌이 열리는 문화 콩그레스 센터 KKL이 포진한 루체른, 취리히 오페라와 톤할레 오케스트라가 안착하고 있는 취리히와 달리 제네바는 적어도 음악적인 면에서는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이다. 하지만 제네바에는 제네바 대극장이라는 세계 수준의 오페라하우스는 물론, 1894년 개관한 빅토리아홀이 있다. 1998년에 문을 연 KKL보다 무려 100년 가까이 앞선, 스위스 콘서트 전용홀의 자존심과도 같은 공연장이다. 제네바의 건축가 존 카몰레티가 디자인한 빅토리아홀은 당시 빅토리아 여왕에게 헌정되기도 했다. 대극장과 제네바 음악원과 가까운 빅토리아홀은 클래식과 르네상스 건축 양식에서 영감을 받은 프랑스 보자르 스타일의 파사드가 먼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양쪽 벽면에는 헨델부터 라프에 이르는 16명 작곡가의 이름이 음각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로코코 양식의 파이프 오르간이 버티고 있는 무대 전면과 1,850석의 객석이 그야말로 휘황찬란하다. 우리가 영상물을 통해, 혹은 직접 방문한 유럽과 미국의 몇몇 공연장만이 최고가 아니다. 빅토리아홀의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모습은 그 자체로 신비롭다. 그리고 여기에는 1918년에 창단한 ‘앙세르메의 악단’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SRO)가 둥지를 틀고 있으니 가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스위스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스위스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뿜어내는 음악은 어떨까. 그러나 제네바 대극장에서 제작한 오페라 몇 편 외에 빅토리아홀의 연주를 담은 SRO의 모습은 도무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그 갈증을 풀어주며 신비의 베일은 벗은 최상의 영상물이 드디어 우리 곁에 왔다. SRO의 9대 음악감독으로 임명된 에스토니아의 거장 네메 예르비. 지난해 9월 14일 역사적인 취임 연주회 실황이 생생한 고화질·고음질 블루레이로 발매되었다. 1937년생으로 올해 76세의 나이에도 두 아들 파보와 크리스티안과 함께 지휘자 가족을 이끄는 노익장이 실로 대단하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죽음과 변용’ 연주를 위해 등장하는 새 지휘자에게 향하는 제네바 시민들의 박수는 따뜻하기 그지없다.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어서였을까. 파란색 행커치프로 멋을 낸 예르비의 지휘는 무대를 가득 메운 단원을 포용하면서 유장한 음률로 독특한 리듬의 죽음의 동기로 시작한다. 폴 그로브스와 토머스 햄프슨, 두 미국인 성악가를 기용한 말러의 ‘대지의 노래’는 메인 레퍼토리로 손색이 없다. 메트 오페라에서 자주 만난 그로브스가 들려주는 1악장 ‘대지의 슬픔에 붙이는 술의 노래’는 낭랑한 음성이 동양적인 배경을 도드라지게 한다. 약음기 낀 바이올린을 타고 오보에가 가슴 저미는 동기를 소리 내는 장면은 절묘한 카메라워크와 함께 쓸쓸함을 배가시킨다. 햄프슨은 이태백이 서양에서 환생한 듯 시를 읊는다. 6악장 ‘고별’은 SRO의 저력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영원히, 영원히…’를 노래하는 햄프슨과 함께 사그라져가는 ‘대지의 노래’는 황혼기에 도달한 예르비의 인생고백에 다름 아니다. 우렁찬 팡파르보다는 진득한 음악을 선곡한 예르비의 취임 연주회. 무엇보다 빅토리아홀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콘서트이기에 더욱 소장 가치가 높다.

글 유혁준(음악 칼럼니스트)


▲ 폴 그로브스(테너)/토머스 햄프슨(바리톤)/네메 예르비(지휘)/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
VAI DVD 4559 (16:9/PCM Stereo, DTS 5.1/92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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