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 ‘처용’
2013년 6월 8ㆍ9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작곡 이영조ㆍ지휘 정치용ㆍ연출 양정웅
극본 김의경ㆍ가사 고연옥
신동원(처용)ㆍ임세경(가실)ㆍ우주호(역신)ㆍ전준한(옥황상제)
프라임필하모닉오케스트라ㆍ그란데오페라합창단
국립오페라단 ‘처용’
양정웅, 2013년 서울로 처용을 소환하다
1987년 초연된 창작 오페라 ‘처용’이 26년이 지난 현재에 공연될 때 회자되는 부분은 창작 오페라의 생명력과 작품의 재해석에 관한 영역일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논의가 가능한 것은 작품 자체가 갖고 있는 본연의 이야기, 나아가 불변의 진리가 담보되었기 때문일 터다.
극작가 김의경은 ‘처용’ 초연 당시 “로마의 멸망을 우리가 역사에서 보듯이 신라의 멸망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이것은 필연적으로 인류의 이기심·탐욕·사치 등 온갖 비도덕적 탐닉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질이 물질을 부리고, 물질이 물질을 탐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또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모습이다. 현실에 대한 인식, 그 안에서 구원을 이야기하는 프로메테우스적인 면모, 그리고 사치와 오만과 탐욕이 이끄는 인간의 파멸과 멸망에 대한 경고는 어제의 처용을 오늘도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이자 힘이다.
처용이 바라본 2013년 서울
1987년 초연되어 1991년 재연되고 두 번의 갈라 공연을 갖기까지 ‘처용’은 모두 신라시대의 복식으로 대변되는 고전적인 모습이었다. 이번 무대의 연출을 맡은 양정웅은 신라시대의 ‘처용’을 2013년으로 소환하여, 시대의 오늘을 무대 위에 펼쳐놓았다.
“49대 헌강왕 시절 신라가 굉장히 안정적이고 유복했다고 쓰여 있지만, 소수가 풍족한 만큼 고통받는 민중은 존재하기 마련이에요. 설화를 볼수록 현대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예를 들어 오늘날 정부가 경제 성장 1퍼센트를 이뤘다고 말할 때 우리 주변에서 그걸 몸소 절절하게 느낀다고 말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어요. 황금감옥을 무대에 올리고 배금주의적 타락과 퇴폐의 모습을 보여준 것은 모두 설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죠.” 양정웅은 설화의 요소를 직접적이고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주제와 내용을 통해 드러냈음을 언급했다. 신라시대 지나친 탐욕으로 얼룩진 향락과 인간 타락에 대한 담론은 클럽을 연상시키는 현대적 공간에 마약과 섹스만이 성행하는 잔치판으로 무대 위에 그려졌다.
양정웅은 현 시대를 향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적극적인 수단으로 영상 기법을 활용했다. 장면에 따라 각 캐릭터의 모습은 실시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무대 위에 투사됐다. 노래의 대부분을 막후에서 소화한 합창단의 모습도 영상을 통해 무대 위에 보여졌다. 기존의 다른 작품에서도 영상을 자주 활용했던 양정웅은 오늘의 시대와 맞닿아 있는 일반적이고 대표적인 매체 통로가 영상임을 강조했다. “굳이 제가 말하지 않더라도 영상 미디어는 우리와 정말 밀접한 소재예요. 1인 미디어 시대가 된 지도 오래죠. 처음 작품을 구상할 땐 역신의 아리아를 영상으로 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은밀한 기자회견이나 셀프 카메라의 느낌처럼 어둠의 욕망을 전달하는 거죠. 왕이 퇴폐 파티를 벌이는 장면도 실시간으로 노출시켜서 적나라한 고발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했고요.” 하지만 주역·합창단·배경 모두가 끊임없이 영상을 통해 비춰지고 암시되는 일련의 반복 속에서, 영상이 무대를 채우고도 흘러넘친다는 인상을 쉽게 거둘 수 없었다.
무대가 신라시대에서 20세기를 지나 21세기 스타일에 다다랐듯, 무대 위 배역들의 캐릭터나 방향성도 조금씩 달라졌다. 연출가 양정웅과 극작가 고연옥의 손을 거쳐 새롭게 태어난 처용은 구원자로서의 사명과 인간적인 욕망 사이에서 혼돈을 겪는 현대 지식인의 모습으로, 그저 지고지순하고 신분조차 희미했던 가실은 거리의 여인이자 팜므파탈로 선명해졌고, 절대 악의 상징이던 역신은 인간성을 상실한 채 욕망만을 추구하는 존재로 탈바꿈했다. 개작을 맡은 고연옥은 “지금의 시대에도 충분히 담론화될 수 있는 인간 구원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원작의 전체 틀을 유지하면서 무대와 캐릭터에서 동시대성이 드러나도록, 각각 내면의 목소리에 깊이를 더하는 쪽으로 논의하면서 개작의 방향을 맞췄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두 사람은 현대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 원작 가사의 한자어나 오늘날 잘 쓰이지 않는 단어들을 중심으로 개사 작업을 했다. 하지만 정작 객석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는 입장으로선 구어체적인 측면에서 가사의 부자연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다시 작품을 곱씹는 동안에는 현대화라는 미명 아래 원작 가사에 내재된 의미와 격이 간과된 것은 아닌지 의문을 계속 가질 수밖에 없었다.
콜라주의 새로운 축, 여성
새롭게 추가된 ‘여성의 소리들’은 기존의 남성 중심적 흐름에 대비되면서, 형식적으로는 대칭적인 조화와 균형을 꾀하는 요소로 의도된 듯보였다. 특히 ‘거리의 여자들 합창’은 음악적으로나 연출적으로 강렬한 부분인 ‘승려들의 합창’과 대조를 이루며 여성성과 남성성, 타락과 개탄이라는 대조를 시각과 청각으로, 동시에 의미적으로도 보여주었다.
‘거리의 여자들 합창’과 ‘세 귀신의 여성 중창’은 양정웅이 초반 구성 단계에서부터 염두에 둔 부분이었다. 원작이 남성 중심의 서사이기에 음악적으로 다양한 소리가 추가됐으면 하는 것과 여성의 등장으로 보다 다양한 드라마가 생길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원작에서 붉은 귀신·검은 귀신은 모두 남성이었으나, 이번 무대에서는 흰 귀신이 추가되면서 모두 여성으로 바뀌었다. 마치 ‘맥베스’ 속 세 마녀처럼 등장한 이들은 처용에게 신라의 멸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한다. 귀신들과의 대화 속에서 처용은 신라를 구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왔지만 구원은커녕 가실만을 얻었던, 그리고 그마저도 신라의 멸망을 늦추기 위해 내놓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돌이켜보며 영웅에서 패배자이자 몽상가로 전락하고 만다.
“삼국유사를 보면 백제가 망할 무렵, 머리카락 긴 귀신이 우물에서 나와 밤새도록 곡을 했다고 적혀 있어요. 세 여자 귀신의 모티프는 여기에서 비롯됐죠.”(양정웅)
“처용의 캐릭터에서 구원자의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내면의 목표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면모를 좀더 부각했어요. 세 귀신의 말들은 외부의 소리처럼 들리지만, 욕망 가운데 초자연적으로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죠. 처용의 어지러운 심리상태를 좀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치라고 할까요.”(고연옥)
원작에서 북악산 검은 귀신으로 변장한 역신은 처용에게 50년 남은 신라 멸망을 늦추기 위한 방법으로 가실이의 방 열쇠를 내놓으라 말하고, 처용에게서 열쇠를 빼앗아간다. 곧이어 가실이 자신의 방에 들어온 존재가 처용이 아닌 역신임을 알고서도 동침한 것은 넘겨진 열쇠 – 처용이 ‘인간의 사랑’보다 ‘신라의 구원’이라는 대의를 택했다 – 때문이다. 하지만 개작에서는 세 귀신이 등장하고, 열쇠라는 장치가 사라지면서 드라마적으로 원작보다 더 많은 함축과 생략이 발생했다. 게다가 이번 무대에서 신라 구원을 위해 가실이를 내놓으라고 말하는 것은 세 (여)귀신이었다.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북악산 검은 귀신으로 변신한 역신의 욕망과는 결코 다르기에, 신라 구원을 위해 처용이 가실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는 것에 대한 비장미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더불어 가실이 “자신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외치며 자결하는 것이 근거 불충분으로 느껴질 뿐 아니라 그 죽음을 두고 안타까움보다 의아함이 드는 것은 본래의 텍스트를 현대화하는 과정에서 지나친 생략이 빚어낸 문제로 여겨진다.
이 부분을 두고 양정웅은 원작이 갖고 있는 시적인 상징성을 담보하기 위한 것에서 비롯된 부분이라 말했다. “‘처용’은 다른 작품에 비해 드라마에 간극이 많죠. 마치 콜라주처럼요. 저는 그게 시적으로 느껴졌어요. 많은 사람들은 소설적 대본을 원하지만, 저는 이런 시적인 대본에서 관객이 그 간극을 채워나가길 원해요. 친절하게 이어지지 않더라도 말이죠. 작품 자체가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가는 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에, 작품이 본래 지닌 시적인 느낌을 살리고자 했어요. 작품 자체가 갖고 있는 의도를 드러내면서요. 개연성이 더 생기려면 작품의 원형 자체가 망가지게 되는 거죠.”
‘처용’, 경계에 선 오페라가 되다
3막의 끝, 옥황상제의 부름 앞에 처용은 여전히 타락한 신라의 환상을 본다. 옥황상제는 “인간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너희들의 의지 비록 선일지라도 내가 정한 운명을 거역할 수 없느니라”라는 말과 함께 최후의 심판을 내린다. 부질없는 쾌락을 읊어대는 길거리 여인들의 합창과 개탄하는 승려들의 합창, 술을 마시며 탐욕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합창이 오버랩 되면서 어제도 타락했고, 오늘도 타락한 인간 세상의 모습은 처용 앞에 환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앞에 처용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영웅일 뿐이다.
이것은 원작에서 처용이 스스로 영웅이 아닌 부족한 자임을 깨닫고, 역신과 신라인들은 처용을 위선자로 오해하고 죽이려 했던 것을 회개하며 사과하는 것과 사뭇 다른 결말이다. ‘처용’ 원작이 향락과 방탕이 만연한 신라에게 멸망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 그리고 ‘인간은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가?’를 선명하게 내세웠다면, 이번 무대에서 극의 마지막까지 객석에 밀려들어 온 것은 오직 ‘인간은 타락했다’라는 명제뿐이었다. 타락한 인간들의 현주소를 있는 그대로 보여줬지만,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과 ‘그러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어조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이러한 이야기에 양정웅은 “우리의 모습을 다시 돌이켜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의 문제를 떠올리지만, 다른 이는 인간 본성의 문제를 떠올릴 겁니다. 관객이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거니와, 또 누구나 ‘구원’이라는 것을 생각하지는 않으니까요. 보고 듣는 사람이 각자의 입장과 위치에서 다양하게 받아들 수 있겠죠. 예술의 역할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고, 많은 작품들이 답보다는 질문을 찾아가고, 그 몫을 관객에게 돌리고 있죠. 앞서 이 작품을 두고 시적이라고 표현한 것 또한 이러한 맥락이 포함되어 있는 의미에서입니다.”
2013년의 ‘처용’은 경계에 선 오페라가 되었다. 서양 오페라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에 더 나아가 주제의식에 결부되지도 않고, 간절히 주장하거나 외치지도 않는, 그 경계에 선 오페라 말이다.
오늘, 우리 오페라에 필요한 것
창작 오페라 ‘처용’이 회자되고, 상기될 수 있는 힘에 관해 생각해본다. 우리의 손에서 만들어진 창작 오페라가 그 스스로 정체성을 갖고 생명력을 갖기 위한 조건이 단순히 배우가 한복을 입고 스님이 무대 위에 등장하는 것만으로 충족된다고 볼 수 없다. 세기를 넘어서 ‘처용’이 여전히 유효할 수 있는 까닭은 한국인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고유 장단과 선율, 설화 속 영웅에 대한 1차 텍스트의 재해석 때문일 것이다.
결국 긴 생명력을 지닌 창작 오페라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내재된 민족성과 정서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이야기, 전통적인 모티프를 현대적으로 해석해낼 수 있는 안목이 전제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요소가 사람에서 시작해 사람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사람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걸린다. 아니,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작품만을 두고 본다면 장기적 안목의 인큐베이팅 시스템이 요구된다. 이미 뮤지컬 쪽에서 시도되고 있는 쇼케이스나 워크숍을 통해 각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고, 리딩과 여러 차례의 무대화를 통해 제련하고 완성해나가는 것은 장르를 불문하고 우리 창작 작품에 공통적으로 필요한 과정이다.
사람은 예술을 만들고, 예술은 사람으로 감동을 전달한다. 아무리 좋은 음악과 극이 있어도 그것을 실행할 사람이 없다면, 예술이 주는 감동은 무의미해진다. 무대 예술은 공동창작에서 비롯되기에 특출한 한 명만으로는 결코 완성될 수 없다. 예술이 예술다워지려면 구심점이 될 사람들이 필요하다. 능력과 자질이 뛰어난 개인이 있다 한들, 그때 그때 곶감 빼먹듯 써먹는 아이디어로 오래 살아남을 생명체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매번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지 질문을 던져본다. 단원 없는 단체는 자신의 색을 갖기 힘들고,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도 없다. 좋은 공연을 만들어 무대에 올리는 것은, 단순히 상품을 파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문제다.
글 김선영 기자(sykim@)
천상과 천하, 타락과 구원의
단순명료
사진 국립오페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