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에 부활한 ‘객석예술평론상’이 지난 3월 3일 당선작을 발표했다. 2010 객석예술평론상 당선작은 방혜진 씨(1970년생)의 평론으로, 진은숙의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다룬 ,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의 첫 내한 독주회를 다룬 두 편이다. 올해 객석예술평론상은 응모자에게 자유 주제 평론과 지정 공연평, 각 두 편의 평론을 받아 심사했다.
수상자 방혜진 씨는 1970년 서울생으로 연세대학교 불문학과?서울대학교 미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현재 영화와 시각문화 전반에 관한 강의와 글쓰기를 하고 있으나, 어려서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며 10대 시절 전반을 음악과 함께 보냈다. 집안의 반대로 음악대학이 아닌 인문대에 진학하고 이후 영상 관련 공부를 해가면서, 그는 “음악으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서서히 버려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객석예술평론상 부활 소식을 접하고 처음으로 음악 관련 집필에 도전했고, 2010 객석예술평론상 당선작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올해 객석예술평론상 심사위원장을 맡은 이순열 씨는 “방혜진 씨가 비평가로서 갖추어야 할 뚜렷한 시각을 지니고 있어 반갑다.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이야기하면서 ‘연주하고 감상하는 과정’을 ‘하나의 길 찾기’로 규정하고, 그 길을 찾아나서는 것으로 (‘앨리스’에 설정된) 미로의 방황에 투신한다는 발상이 참신하다. 그는 진은숙의 오페라가 루이스 캐럴의 원작에 충실한 듯하면서도 그 시작과 끝을 뒤틀어, 원작의 변모를 시도하고 있음을 꿰뚫어보았다”라는 심사평을 내놓았다.
월간 ‘객석’ 창간해인 1984년 응모를 시작, 1985년 제1회 수상작을 발표한 객석예술평론상은 1995년까지 이어졌다. 1995년까지 총 11회의 객석예술평론상이 배출한 예술평론가는 32명으로, 이중 상당수가 현재 국내 공연예술계의 오피니언 리더들로 활동 중이다.
-윤중강(음악평론가)?이장직(前 중앙일보 기자)?전정임(‘안익태’ 저자)?용호성(국무총리실 문화체육과장)?진회숙(서울시향 ‘SPO’ 편집위원)?김미도(연극평론가)?문애령(무용평론가) 등-
객석예술평론상의 주최사인 월간 ‘객석’ 윤석화 발행인은 “올해는 음악 평론 부문만을 진행했지만, 향후 연극?무용?국악 등 공연예술 전방위로 평론 부문을 확대해나갈 예정이다. 이에 공연예술계를 뛰어 넘어, ‘예술의 힘, 펜의 힘’이 지닌 중요성에 대한 사회 각계각층의 인식 공유가 필요하다”며 객석예술평론상의 향후 행보에 대한 관심과 응원을 부탁했다. 실제로 ‘객석예술평론상 15년 만의 부활’에는 대원문화재단(이사장 김일곤)의 상금 전액 쾌척이 크게 일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0 객석예술평론상 시상식은 오는 3월 25일 오후 8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열린다. 이날 수상자 방혜진 씨에게는 상패와 함께 대원문화재단이 후원하는 1천만 원의 상금이 수여된다.
2010 객석예술평론상 심사위원
심사위원장 이순열(음악평론가) 윤석화(월간 ‘객석’ 발행인)
강해근(한양대학교 음악대학 학장)
윤중강(음악평론가?제1회 객석예술평론상 수상자)
이장직(前 중앙일보 기자?제2회 객석예술평론상 수상자)
용호성(국무총리실 문화체육과장?제9회 객석예술평론상 수상자)
박용완(월간 ‘객석’ 편집장)
심사 일정
2010년 1월 25일 마감
2010년 1월 31일 편집부 심사 – 예심 통과작 10편 대상
2010년 2월 8일 심사위원 심사 – 편집부 심사 통과작 3편 대상
최종 심사 대상작
– 방혜진 (당선작)
진은숙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미로의 안과 밖(자유 주제 평론) 엘렌 그리모 피아노 독주회(지정 공연평)
– 박의홍
빈 모데른에 남겨진 세 발자국(자유 주제 평론) 엘렌 그리모 피아노 독주회(지정 공연평)
– 이설련
진은숙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한국적’이 아닌 ‘보편적’ 감성으로 전 세계에 다가가다(자유 주제 평론) 함부르크 슈타츠오퍼의 바그너 ‘지그프리트’(해외 거주자, 지정 공연평 대체)
-> 지난 2010 객석예술평론상 요강 다시 보기
2010 객석예술평론상 수상자 인터뷰
당선작 수상자 방혜진
1970년 서울생. 연세대학교 불문학과·서울대학교 미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현재 영화와 시각문화 전반에 관한 강의와 글쓰기를 하고 있다. '칼 드레이어' '로베르토 로셀리니' '한국의 디자인 02 : 시각문화의 내밀한 연대기' '영상의 이해' 등의 책에 공동 필자로 참여했으며, 번역서로는 '장 르느와르'(공역), '영화 장르'(근간)가 있다. 2009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가장 먼저, 어떻게 객석예술평론상에 응모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
내 전공은 영화에 가깝다. 글쓰기·강의 활동 역시 영화와 미술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음악평론은 나의 주 전공이라 볼 수 없으나 무척 특별한 의미가 있다. 어려서는 음악에 거의 인생을 걸다시피 했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아홉 살, 열 살 때부터 작곡을 했고 온 10대 시절을 작곡을 하면서 보냈다. 돌이켜보면 어처구니없게 느껴지는데, 당시엔 계속 악상이 떠오르고 그걸 악보에 옮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서 고3 때도 수업 시간에 교실 맨 뒷자리에서 악보를 그리곤 했다. 부모님께서 완고히 반대하셔서 음악대학에 진학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음악을 직접 해야겠다는 생각이 사라져갔다. 그 생각을 점점 버려가다가, 거의 완전히 버려진 시기에 객석예술평론상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응모하여 이렇게 상을 탔다(그전까지 방혜진의 음악에 대한 집필 활동은 거의 없었다). 다시금 음악과 맺어졌다는 기분에 개인적으로는 어떤 떨림이 있다. 작은 일에도 상징과 징후를 발견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 객석예술평론상이 시행되지 않았던 시기와 내가 음악으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버려가던 시기가 비슷하여 그 특별함이 더하다.
진은숙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다룬 자유 주제 평론에서 이 오페라의 초연 연출(2007, 아힘 프라이어)에 대한 언급이 거의 전무하다.
이 점이 최종심사 당시 하나의 화두로 떠올랐다. 연출에 대한 평을 일부러 배제한 듯한데.
온전히, 진은숙이 쓴 이 오페라가 어떠한 구조로 이뤄져 있는지, 그걸 밝히는 데 집중했다. 영화·연극을 좋아하니 무대 연출에 대해서도 당연히 쓰고 싶었다. 그러나 실제 공연이 아닌 DVD를 보고 쓰는 글에서 연출에 대해 평하는 건 무리가 있었고, 그래서 정신분열적 측면만을 언급했다. 그 DVD를 본 분들은 알겠지만, (DVD 연출자의) 자의적인 프레임 변화가 너무 많다. 그 점까지 고려해 글을 쓴다면 산만해질 것 같아서 처음부터 무대 연출에 대한 평을 배제했다.
왜 '앨리스'였나?
오페라를 좋아한다. 몬테베르디부터 현대 오페라까지, 특히 현대오페라를 많이 좋아한다. 노노 '중단된 노래', 알반 베르크 '보체크', 야나체크 '예누파' 등 쓰고 싶은 현대 오페라는 많지만, 아무래도 공모작이다 보니 국내에서 필요로 하는 시기 적절한 주제를 선택했다. 또한 진은숙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탄생한 이후 작품에 대한 국내 리뷰가 많지 않았던 점도 이유다.
하나의 작품이 수직·수평적으로 어디에 놓여져 있는가를 바라봄에 있어, 이번 글은 '앨리스'의 수직적(역사적) 위치를 더욱 부각시켰다. 이유가 궁금하다.
소위 오페라 애호가들도 현대 오페라를 즐겨 듣지 않는데, 현대 오페라가 낯설고 이질적인 새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현대 오페라의 새로움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그 안에는 이미 오래전의 작품들에서부터 연속적으로 존재해왔던 '끈'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현대 음악이 갑자기 나타난, 낯선, 우리가 즐기지 못할 음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엘렌 그리모 독주회를 다룬 지정 공연평에 대해 얘기해보자. 프로그램 구성에 대한 분석이 주를 이뤘고, 연주 자체에 대한 언급은 적었다.
그 음악회에서 제일 흥미로웠던 점은 그리모의 야심과 기획력이었다. 내 생각은 이러이러하니 나는 이렇게 연주해도 괜찮다라는 주장과 확신. 원고를 낸 후 다시 글을 읽으면서, 연주에 대해 충분히 얘기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나 역시 느꼈다. 그리모의 이날 공연이 '해석적 사건으로서의 연주'라면, 프로그램 상에 나타난 의도가 연주를 통해 어떻게 보여졌는지 말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모의 연주에는 동의할 수 없는 측면이 많았다. 칭찬에 비해 비판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더 많은 지면이 필요한데, 어느 정도를 써야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긴 호흡의 글이 아니라면 비판이 힘들다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다. 지면의 크기를 떠나서 비판할 부분은 당연히 비판해야 한다. 비평가로서 이름을 걸고 글을 쓸 때는 더더욱. 다만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가 해야 할 일은, 연주·작품 속에 숨어있는 여러 층위의 함의 중 가장 부각되는 측면 외에 그 이면까지 보여주는 것, 즉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했던 숨은 장점도 드러내는 것이다.
평론은 무엇인가. 평론가로서 자신의 글이 새로운 담론을 창조할 수 있으며, 그 담론이 사회적으로 기능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평론가의 사회적 기능은 부인할 수 없다. 글을 쓸 때는 이 글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 읽히고 영향을 줄지 생각하고 써야 한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에도, '평론'은 기본적으로 작품에 대한 얘기가 우선시되어야 한다. 평론가의 첫째 소양은 말 그대로 작품을 평가하고 가늠해서 논하는 것이다. 작품에 대해서만 얘기한다고 해서 글이 사회와 동떨어지고 유리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작품' 그 자체가 사회를 충분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글이 이 점을 어떻게 부각시키느냐에 따라 평론의 사회적 기능은 달라진다.
'음악평론가'로서 등단했다. 이제 무엇을 하고 싶나? 게으르고 나태하며 잘 나서지 않는 성격이다. 그러나 상을 받았으니 그 책임감에 더욱 열심히 글을 써야 할 것이다. 앞으로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나 자신의 인생을 위해 공부를 더 해야겠다. 이번에 받은 상금이 그 공부를 위해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2010 객석예술평론상 심사총평
_2010 객석예술평론상 심사위원장·음악평론가 이순열
우선 객석예술평론상 수상자 방혜진 씨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린다. 그러나 그의 글이 당선작으로 결정되기까지 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최종 심사 1차 투표에서 심사위원들의 표 과반수를 얻었음에도, 투표 후의 토론에서 당선작이 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는 의견 또한 거셌기 때문이다.
'무난하지만 누구라도 쓸 수 있는 글'이라거나 '길들여진 글'이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심사위원이 있었는가 하면 '한 방이 없다'는 것을 아쉬워하는 심사위원도 있었다. 갖가지 의견이 개진된 가운데, 방혜진 씨의 글을 선뜻 당선작으로 결정하지 못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휴면 상태에서 깨어나 15년 만에 다시 기지개를 켜는 객석예술평론상의 수상작으로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한 글을 뽑고 싶다는 것, 그리고 첫 단추를 잘 끼워 그 기준을 높이고자 하는 심사위원들의 욕심이 그 망설임의 저류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랭보가 읊었듯이, 어느 넋이라서, 어느 성(城)이라서 흠이 없으랴. 어떤 글, 누구의 글에도 아쉬움이나 흠은 있기 마련이며, 이만한 글이 나오기도 쉽지 않다는 뜻에서 마침내 당선작으로 선정하기에 이르렀다. 글이란 음식과도 같아서,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고약한 글도 있고, 별 생각 없이 먹고 난 다음 뒷맛이 영 개운치 않은 글도 있는가 하면, 읽고 나서 무엇을 읽었는지 기억에서 깡그리 지워져버린 글도 있다. 방혜진 씨의 글은 읽고 나서도 여운이 남았고 뒷맛도 개운한 편이어서 그것만으로 칭찬할 만했다. F. 베이컨의 말을 믿는다면, 꿀꺽 삼켜버려도 될 글이 있고 맛만 보고 지나쳐도 될 글이 있는데, 꼭꼭 씹어 소화해야 할 글은 그리 많지 않다. 방혜진 씨의 글은 제법 음미할 만한 맛을 지니고 있는 글임에 틀림없다. 진은숙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평에서는 연출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지적됐다. 그러나 연출이란 이미 널리 알려진 작품을 다시 공연할 때 그 비중이 높아지는 것이므로, 초연되는 작품의 연출에 대해 언급이 없다 해서 크게 흠 될 것은 없다는 견해도 있었다. 그렇기는 해도 오페라를 동화(動畵)가 아닌 정물화처럼 접근했다는 것을 칭찬하기에는 어려울 듯하다. 당선자가 비평가로서 갖추어야 할 뚜렷한 시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앨리스'를 이야기하면서 '연주하고 감상하는 과정'을 '하나의 길 찾기'로 규정하고, 그 길을 찾아나서는 것으로 ('앨리스'에 설정된) 미로의 방황에 투신한다는 발상이 참신했다. 게다가 그는 관객이 그냥 스쳐 지나가기 쉬운 곳을 밝혀주는 등대지기의 역할도 놓치지 않는다. 진은숙의 오페라는 루이스 캐럴의 원작에 충실한 듯하면서도 시작과 끝을 뒤틀어, 원작의 변모를 시도하고 있음을 그는 꿰뚫어보고 있다. 그 조명을 통해 예술이란 하나의 메타모르포제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엘렌 그리모의 연주회평에서도 방혜진 씨의 남다른 시각이 빛난다. 어떻게 연주하느냐 못지않게 무엇과 무엇을 연주하느냐는 것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연주자는 그 '무엇'을 통해 자신의 가슴을 열어 보여주어야 하므로. 그런데도 연주회평에서는 프로그램 구성에 대해 언급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리모의 '곡목 선정과 배열'에 대해 당선자는 바흐의 원곡을 중심축으로, 부조니, 리스트 및 라흐마니노프에 의한 편곡을 확장축으로 그리고 베토벤을 그 연결 선상에서 설계했다고 파악한다. 그런데 알바트로스처럼 솟아올랐을 때만 내려다보이는 그 조감의 빛을 난데없이 튀어나온 신약성서·구약성서 운운의 상투 문구가 흐리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참신한 시각은 곳곳에서 '형형히 빛난다.' 최종심사에 오른 나머지 두 분도 제각기 공을 쌓아온 분들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박의홍 씨의 경우, 우리말 구사가 너무 서툴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공통적인 견해였다. 서머셋 모옴의 영어가 서툴다고 흠잡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던 그가 영국에서 처음 작가로 데뷔했을 때는 영어가 엉망이어서 다른 사람이 꼼꼼히 손을 봐주어야 했다. 그 장애를 극복하지 못했더라면 모옴이라는 작가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설련 씨의 경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대한 평에서 그 시각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버렸다는 아쉬움이 크다. '한국적이 아닌 보편적 감수성으로 전 세계에 다가서다'라는 주제는 특정 오페라에 대한 평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창작 오페라가 가야 할 길을 논하는 글에서나 택했음 직한 주제가 아닐까 싶다. 누구든 한 사람의 평론가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을 평하기 전에 끊임없는 자기비판을 거쳐 끊임없는 전신과 비상(飛翔)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평가란 어떤 의미에서 등대지기와도 같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는 아쉽게도 그 등대지기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없었다. 이제는 '객석'에서 찾고 있다. 모여라, 등대지기여, 어서 모여라. 해를 거듭하면서 눈부신 등대가 무수히 밝혀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하여 먼 훗날 우리 모두 이런 감회에 젖어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 '객석'에서 등대지기를 찾아내려고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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