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세상에는 솜사탕 같은 로맨틱 코미디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실화를 배경으로 한 ‘황태자 루돌프’는 씁쓸한 역사적 사건과 역사 속 영웅의 인간적인 측면을 재조명했다. 다소 전형적인 줄거리임에도 작품에 빠져들게 되는 것은 양념 역할을 톡톡히 해낸 음악과 춤, 무대 효과 덕분이다. 2012년 11월 10일~2013년 1월 27일, 충무아트홀 대극장.
글 원종원(뮤지컬 평론가·순천향대 교수) 사진 EMK뮤지컬컴퍼니
요즘 유럽 뮤지컬들이 인기다. 과거 ‘뮤지컬’ 하면 브로드웨이 뮤지컬들만 떠올렸던 것과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별난’ 현상이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무대를 좋아하는 일부 뮤지컬 애호가들에겐 ‘서양 사극’이나 ‘유럽 악극’ 같다는 조소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천편일률적이거나 유행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던 이제까지의 뮤지컬 공연가를 떠올려보면 색다른 시도에 호응하는 관객들의 모습이 싫지만은 않다.
새롭게 막을 올린 뮤지컬 ‘황태자 루돌프’는 그런 면에서 흥미롭다. 일단 극 소재가 오스트리아의 비운의 황태자다. 뮤지컬 ‘엘리자벳’의 리뷰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과거 서구사회를 좌지우지했던 양대 왕가 중 하나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실화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무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태자였던 루돌프가 어떻게 계급 간의 갈등을 고민하고 변화하는 세태에 괴로워했으며, 아버지와의 갈등 끝에 자살이라는 비극적 종말을 선택하게 됐는가를 감성적 접근을 통해 보여준다. 신파조의 노랫말과 극 전개, 전근대적인 영웅담이 지니고 있는 우연과 의외성, 여기에 여성들의 왕자님을 향한 전형적인 핑크빛 판타지까지 버무려놓은 줄거리는 지극히 대중적이다 못해 다소 지루하고 솔직히 식상한 감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뮤지컬이라는 형식이 지니고 있는 장점, 즉 음악이 이야기를 끌어내고 감정을 표현하며 안무가 극적 전개를 도와 시간의 경과나 장소의 변화 등을 한결 함축적으로 구현해낸다는 특성을 십분 활용해 보는 재미를 잉태해낸다. ‘장희빈’이나 ‘한명회’ ‘인수대비’ 등 몇 년에 한 번씩 반복적으로 제작되는 텔레비전 사극과 유사한 느낌이지만 음악과 춤, 무대 효과의 결합이 새로운 양념 역할을 해 감칠맛을 더하게 된 사례라 할 만하다. 식상하고 신물 나지만 그래도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는 묘한 매력이 있다.
같은 제작사의 작품들이 늘 그랬듯, 이 뮤지컬 역시 배우들의 조합을 잘 살펴야 한다. 입맛 따라 골라 보라는 한국식 스타 마케팅이 예외 없이 적용됐다. 그래서 배우에 따라 티켓 판매량도 조금씩 달라지는 듯한 인상이다. 팬들 입장에서는 ‘오빠’가 등장하는 무대를 볼 수 있으니 좋을지 모르지만, 늘 그렇듯 예리한 창작자의 안목이 담기고 적재적소 완벽한 연출의도가 반영된 최적의 주인공을 만나기는 그래서 이번에도 어렵다. 개개인에 따른 호불호가 다르니 누가 등장하는 조합의 공연을 보라 말하긴 힘들지만, 가장 표를 구하기 어려운 날의 배우가 그래도 제일 볼 만한 무대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어렵사리 추측해본다.
흥미로운 점이 또 있다. 원래 뮤지컬 제목에는 황태자라는 단어가 없다. ‘루돌프’ 하면 빨간 코 사슴을 먼저 떠올리고, 그래서 아동용 뮤지컬로 오해받을 소지가 짙어 덧붙인 마케팅적 배려로 보인다. 물론 이 작품은 정반대 대척점에 있는 성인용 뮤지컬이다. 굳이 아이들에게 유럽사를 가르쳐줄 의도가 없다면, 가족 관객이 보기엔 무거운 내용이다. 결말에 등장하는 충격적인 자살 장면도 그렇다. 죽음의 미학을 즐기는 일본 관객들에게는 여운이 짙은 이미지로 큰 인기를 누렸지만, 우리 관객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지킬 앤 하이드’의 작곡가인 프랭크 와일드혼의 음악은 여전히 감미롭지만, ‘지금 이 순간’처럼 강렬한 느낌을 주는 곡은 드물다. 그래도 무게감 있는 유럽 궁정의 이미지나 효과적으로 사용되는 슬라이딩 무대 세트의 화려한 볼거리는 대형 뮤지컬의 맛을 한결 살려준다. 유럽 뮤지컬의 흥미로운 도전이 연이은 국내 흥행으로 계속 이어질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