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가 10인이 말하는 ‘나의 영감’
정리 김선영·정우정 기자
극작가 박근형
영감은 벼랑 끝의 몽롱함이다
영감은 찾아오는 게 아니라 내가 만나러 가야 할 분이지요.
그분을 만나는 일에 시간과 공간이 어디 따로 있나요.
초행길 낯선 길을 걷다가 불현듯 마주하기도 하고
시장과 거리에서 마주친 다양한 사람들의 걸고 진한 삶의 터전에서
때론 밤늦게 얼큰하게 술에 젖어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의 어느 자리에서
혹은 화장실에서 일을 보려고 앉아 있을 때에 문뜩 그분이 내 앞에 오시지요.
하지만 대게 그 영감님 마주할 때 심정을 말씀드리자면
깜깜하고 무거운 현실이 나를 누르고 있거나
제어할 수 없는 어떤 울분이 내 몸과 생각을 휘감고 있을 때입니다.
나를 누르는 그런 절벽 같은 상태에서 나는 가끔 그분을 만납니다.
혹은 그분이 떠난 그림자를 보고 힘을 내곤 합니다.
지금부터 십오 년 전쯤인가,
혜화동 일번지에서 연극 ‘쥐’를 준비하고 있던 때입니다.
재앙이 덮친 땅에서 인간이 인간을 먹고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야기죠.
오늘을 사는 우리 삶이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공연 제작비는 턱없이 부족했고
대본도 한 장 나오지 않았고 배우 캐스팅은 물론이고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죠.
나는 대학로의 작은 건물 옥상에서 혼자 머무르며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무실 한 편에는 전 주인이 남기고 간, 작은 갈탄 난로 하나뿐
나는 매일 시간을 죽이며 어떻게 작품을 풀어갈까 고민하고 있었지만
모든 것은 막막했습니다.
매일 옥상의 난로 앞에 쭈그리고 앉아 점점 다가오는 공연 일만
저승사자처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뜩 난로 앞에 초라한 내 모습을 무대 위에 그대로 보이면 어떨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객이 가득 찬 극장 안에서 실제로 지금처럼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갈탄 난로를 피우고 관객과 배우가 난로의 뜨거운 기운을 서로 나누는
그런 공연은 어떨까.
그 생각을 가진 다음부터 작품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무대는 어떻게 설치할지가 머릿속에 또렷하게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연극을 구성하는 모든 것은 멀리 있지 않더군요.
바로 내 옆에 내가 듣는 음악이 무대에 울려 퍼지고
내 주변에 폐허처럼 방치된 저 물건들이 바로 무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쥐’는, 연극은 허구지만 허구가 아닌 우리 삶의 한 단면이란 생각을
내게 던져준 내 연극의 출발점이 된 그런 작품입니다.
나의 영감은 벼랑 끝의 몽롱함입니다.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땐 아사 직전의 폭음을 하기도 하고
혹여 꿈에서 어떤 계시가 나타날까
잠에 취해보기도 하고 전화기 끊어놓고 잠수함 타고
저 깊은 심해 속으로 도망쳐보기도 하지만 다 부질없더군요.
위기 때는 시간이 더욱 빠르게 흘러가지요.
결국 나는 벼랑 끝에 몰린 한심한 나를 봅니다.
나는 내가 부끄러워 몸서리치지만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벼랑에 몸 던질 자신조차 없어 결국 무릎 끓고 백기 투항합니다.
무대에는 타성에 젖은 상투적인 인물들이 서로 쓸데없는 말들만 던지고
앞 뒤 맞지 않는 상황 전개는 공연을 무미건조 지루하게 만들고
결국 연극은 그렇게 지리멸렬 힘없이 끝납니다.
나는 분노한 관객들 얼굴을 보기 두려워 어느 골목길 술집에서 혼자 술 마시며
다음 기회를 벼르고 있지만 세상에 다음을 기다려주는 관객이 어디 있습니까.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싶지만
내게 위기의 끝은 언제나 파국입니다
현실은 대체로 비극적으로 끝이 나더군요.
극단 골목길 대표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출과 교수
‘청춘예찬’ 1999
‘대대손손’ 2000
‘선착장에서’ 2005
‘경숙이 경숙아버지’ 2006
‘너무 놀라지 마라’ 2009 외 극작·연출
극작가 성기웅
오직, 나만의 이야기
영감을 받는 건 그때그때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때로 소설이나 영화를 보다가, 혹은 다른 연극 작품을 보다가 오해나 착각을 통해 내 작품의 착상을 얻을 때가 있습니다. 나는 남의 창작물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하고 엉뚱하게 제멋대로 해석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나만의 오해나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내가 잘못 넘겨짚은 그 아이디어는 그대로 내 작품으로 가져와도 되는 나만의 것이 되죠.
대학 시절 이강백의 희곡 ‘파수꾼’을 소박한 공연으로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연극에서 소년파수꾼 역을 맡았던 친구가 군대를 갔는데, 거기에서 노인파수꾼 역을 맡은 적 있었던 연극배우 출신의 고참을 만났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건 나 역시 군대에 있을 때였습니다. 이강백의 ‘파수꾼’은 나타나지 않는 이리 떼를 감시하는 황야의 파수꾼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소년파수꾼과 노인파수꾼이 처한 상황은 적이 나타나지 않는 후방의 군부대에서 보초를 서는 우리의 상황과 너무 똑같았습니다. 저의 희곡 ‘삼등병’은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군대에서 쓰기 시작한 작품입니다. 이강백의 ‘파수꾼’이 극중극으로 직접 삽입되어 있기도 합니다.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 별 수가 있겠습니까? 참고 자료를 뒤지고 전에 해두었던 노트를 뒤지고 내 머릿속을 뒤지고 합니다. 아이디어가 부족하더라도 일단 시놉시스를 써보려고 노력하죠. 아무래도 마감이 닥치면 대개 어떻게든 글이 쓰이고 스스로도 기특하게 여길 만한 좋은 생각들도 속속 떠오릅니다. 하지만 연극의 대본이란 무대화에 대한 상상을 해가며 퇴고를 많이 해야 하는 장르인 것 같습니다. 또 제 작품의 경우 풍속이나 언어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가 많은데, 이런 것들을 초고에서 풍부하게 써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시간에 쫓겨 마무리한 대본의 경우는 완성도가 만족스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후에 다시 보완을 하게 됩니다.
‘영감’이란 말과 어울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책을 통해서 착상과 디테일을 얻습니다. 제 작품의 특성상 연구자들의 딱딱한 연구를 픽션의 이야기를 바꾸어내는 것도 제가 하는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극단 제12언어스튜디오 대표
‘삼등병’ 2004
‘조선형사 홍윤식’ 2007
‘소설가 구보씨와 경성사람들’ 2007
‘깃븐우리절믄날’ 2008
‘다정도 병인 양하여’ 2012 외 극작·연출
안무가 신창호
어쩌면 우리는 기록자들일지
모릅니다
저에게는 매 순간 보이는 이미지나 글귀 또는 소리 등 시각이나 감각에 자극을 주는 대부분의 것들을 기록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2001년 독일 안무가의 초청으로 뮌헨에 잠시 체류한 적이 있습니다. 독일에 머무는 동안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TV프로그램은 ‘유럽 뉴스(Euro News)’ 중 ‘노 코멘트(No Comment)’라는 코너였습니다. 그 코너는 논평이 없이 현장의 영상과 소음만을 보여줍니다. 저는 독일어를 잘 모르기 때문에 보기가 편했습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됐던 주제는 ‘이라크 전쟁’이었는데, 화면에는 건물 돌 더미 앞에서 한 남자가 자신의 얼굴과 가슴을 두드리며 울부짖는 모습이 비쳤습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후 미군들의 총격 장면에 사건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그것은 일인칭의 시점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노 코멘트’라는 용어와 형식에 매료됐습니다.
귀국 후, 자극과 반복적인 행동의 특징을 주요 모티브로 사용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작업으로 당시 무용계에서 주류를 이루던 연극적 요소와 무용의 조화를 역행해 단편적 움직임을 통해 누구나 주관적 해석이 가능한 작품을 추구하려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렇게 태어나 작품의 제목은 바로, ‘노 코멘트’였죠.
가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할 때 저는 새로운 장소를 찾아갑니다. 낯선 장소에서 머릿 속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게 되면, 사고의 패턴이 달라지면서 다양한 시각을 생성할 수 있게 됩니다. 반복적인 생활 패턴을 바꾸는 것은 영감에 좋은 활력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작품들은 수정과 반복을 통해 완벽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실상 무용가에게 마감은 무대에 최종적으로 작품을 올라가는 순간입니다. 저는 그 순간까지 무용수가 부담을 갖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변화를 시도합니다. 그래서 작품의 시작은 영감이나 마지막은 완성도를 향한 의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 역시 영감의 일종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면, 매 순간 기록하기를 원하는 저에게 있어 영감은 ‘메모’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LDP무용단 대표
‘노 코멘트(No Comment)’ 2002
‘패럴렐 라이프(Parallel Life)’ 2004
‘푸시 앤 풀(Push & Pull)’ 2006
‘잇츠 마이 라이프(It’s my Life)’ 2008
‘플랫폼(Platform)’ 2009 외
안무가 안성수
음악이 형상화되는 그 순간
저는 영감을 무용수에게 받기도 하고 영화로부터 받기도 합니다만, 주로 음악에서 받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춤에 대한 창작은 움직임 자체를 표현해내는 것이기 때문에 음악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때문에 저에게 있어 영감은 곧 ‘음악’입니다.
미국 줄리아드 무용원 시절,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듣고 강한 영감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 ‘봄의 제전’을 듣는 순간 마치 영화를 보듯 음악이 형상화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당시는 공부를 하고 있었던 시기라 창작에 대한 엄두를 내지 못했고, 18년이 흐른 2007년, 그때의 음악에 대한 영감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2009년에 초연한 ‘장미(봄의 제전)’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그래도 천천히 움직임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작품이 만들어져갈 무렵 저의 취향에 맞고 스스로 틀린 부분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면 작품에 마침표를 찍습니다.
‘마감이 영감이다’라는 말에 동의하느냐고 물으셨나요? 보통 작품 위촉이 시작되면 미리 시작해서 기간 내에 끝내는 편입니다. 그러고도 미련이 남는다면 남은 미련은 다음 작품으로 보내버립니다.
안무가로서 무용은 함께 하는 작업입니다. 저는 무용수들의 진지한 태도에서 늘 도전을 받습니다.
그러니 나의 영감은 ‘음악과 무용수들’이 되겠네요.
안성수픽업그룹 예술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 교수
‘볼레로(Bolero)’ 1997
‘시점’ 2001
‘고요한 견제’ 2006
‘그곳에 가다’ 2007
‘장미(봄의 제전)’ 2009
‘몸의 협주곡’ 2010 외
작곡가 이건용
영감 후에 오는 것들
나의 경우 창작 후의 만족은 영감의 토로에서 오지 않습니다. 고통스러운 노동이 끝났다는 편안함에서 옵니다. 노동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조급하게 끝내면 그 작품에서는 결코 만족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고통스럽지만 마음먹은 만큼 작업을 했다고 스스로가 느낄 때 비로소 성취감과 함께 만족감도 동반합니다.
때문에 나의 영감은 대단한 섬광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작품에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아이디어는 수시로 떠오릅니다. 음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말이나 어떠한 개념으로 등장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메모를 해둡니다.
어렸을 적 음악의 유산을 물려주신 분은 나의 아버님입니다. 아버님은 목사님이셨는데, 내가 스무 살을 갓 넘겼을 무렵 병환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에게 받은 것이 많았으므로, 무언가 드리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그때부터 마음에 ‘수난곡’을 착상했나 봅니다. 구상 노트를 만들었지요. 그러다 25년 후, 출석하는 교회로부터 ‘교회성가대를 위한 곡’을 위촉받았습니다. 그 순간 지금이 ‘수난곡’을 쓸 기회라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이것은 먼 곳에서 영감을 구하지 않은 사례입니다. 주변에 있는 것을 다듬어 곡을 만들면, 마치 오랫동안 이 곡을 쓰기 위해 준비한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이것은 무려 25년을 품어온 이야기가 되겠지요.
나는 원래 영감을 기다려 작업을 하는 편이 아닙니다. 때문에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절체절명의 위기를 얻는 일도 없습니다. 다만 큰 작품을 작곡할 경우 반드시 그 작품과 관련한 토지에 답사를 갑니다. 예를 들면 1994년 동학 백주년 기념 칸타타 위촉을 받았을 때는 동학의 주 무대를 여러 번 답사했습니다. 김제 만경의 너른 벌판 한가운데에 있는 백산에 오르고 나면 100년 전의 그림이 가깝게 느껴집니다. 경험 후에는 반드시 얻는 것이 있으므로 답사는 꼭 필요합니다.
음악에 이르는 좋은 작품은 영감에 따른 창작이 일 순위이겠지만, 무엇보다 좋은 초연이 매우 중요합니다. 연주자가 창작된 작곡가의 작품을 깊이 이해하고 좋아하는 마음으로 연주를 하는 것이 그 작품의 사활입니다. 작곡의 마감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초연자에게 그 작품과 대화할 수 있는 많은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세종문화회관 서양음악단 예술총감독 및 서울시오페라단 단장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작곡과 교수
관현악곡 ‘분향’ 1974
관현악곡 ‘태주로부터 전주곡’ 1980
관현악곡 ‘만수산 드렁칡’ 1987
오페라 ‘솔로몬과 술람미’ 1988
오페라 ‘봄봄봄’ 2001 외
극작가 이윤택
정신없이 넘쳐나는 직관을
단단한 언어로 찍어간다
영감.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문득 내 뒤통수를 치거나, 내 이마 위에 번쩍 무언가를 띄워 올리는 존재입니다.
‘문제적 인간 연산’은 공연 15일 전까지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떠오르지 않았던 작품입니다. 연산이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게 할 것인가….
마침, 작곡가 최우정의 음악이 도착했고, 작품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음악을 들었을 때, 저는 그만 “물!” 하고 외쳤어요. 그리고 천천히 음악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피아노 음악의 선율이 튕겨 오를 때, 슬쩍 물 한 방울을 튕겼어요. 그 후 음악 속에서 자유롭게 물장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물장구는 급기야 엄청난 물보라를 만들었고, 저는 그 음악 속에서 천천히 가라앉았습니다. 눈을 뜨고 세상을 빤히 바라보면서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죠. 그 어떤 논리도 개입할 수 없는, 절대영감이 음악을 타고 구체적인 장면으로 제게 다가온 겁니다.
극작을 해야 하는데도 도저히 아무런 영감도 떠오르지 않을 때는 전혀 다른 짓거리를 합니다. 밤새 영화 비디오를 뒤적이거나, 어떤 특정 인물을 떠올리면서 음란한 짓거리를 상상하죠. 그러면서 나를 죄의식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새벽까지 스스로를 시궁창 속으로 처박다가 문득,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벌떡 일어나 정신없이 써 갈깁니다.
그러다 마감 시간과 싸우기 시작합니다. 마감 시간과의 싸움은 상상력에 가속이 붙게 만들죠. 그러나 결코 서두르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재깍거리며 지나갈수록 시간을 하나둘 밟고 지나가야 합니다. 정신없이 써 갈기면서도 넘쳐나는 직관을 단단한 언어로 찍어나가야 하니까요.
나의 영감은 문득 내 뇌수를 가로질러 가는 죽음입니다.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
영산대학교 연기뮤지컬학과 교수
‘시민 K’ 1988
‘오구-죽음의 형식’ 1989
‘불의가면-권력의 형식’ 1992
‘바보각시-죽음의 형식’ 1993
‘문제적 인간 연산’ 1995
‘도솔가-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000
‘시골선비 조남명’ 2001
‘아름다운 남자’ 2005 외 극작·연출
작곡가 장영규
영감 = 순간+
나의 영감은 순간입니다. 지난 10년을 돌이켜보면 공연을 위해 먼 길을 떠났을 때, 여행이나 공연을 길게 다녀올 때, (순수한 여행보다는 공연이나 작업에 덧붙여진 여행이 많은 편입니다만)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과 순간들에서 생각이 정리되고 새롭게 떠오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계획되는 많은 것들을 정리해두었다가 실행에 옮기곤 합니다.
어릴 적에는 주변의 다른 것들을 보면서 자극을 많이 받았어요. 작업을 시작하게 되면서부터는 다른 것을 보면서 짜릿하다거나 자극을 받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굳이 생각을 해보자면, 언제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피나 바우슈 페스티벌에 가서 그녀의 작품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공연을 보면서 짜릿함을 느꼈어요. 무대의 작은 요소부터 무용수들까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한참이고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서 받은 느낌들이 다른 작업을 하는 데에 많은 영향을 주었지요.
요즘에는 영감을 찾아갑니다. 예를 들어 국악앙상블 비빙을 위해 만드는 음악들은, 불교음악·궁중음악 등 평소에 쉽게 접할 수 없는 음악을 찾아다니면서 작은 단서를 발견합니다. 자료를 조사하고 이야기를 듣고 소리를 듣는 순간, 하나씩 반짝이는 것들이 있어요. 그것들을 계속 생각하고 정리해 하나의 작업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작곡을 해야 하는데 그 무엇도 도저히 할 수 없을 때는, 잠을 잡니다. 자고 일어나는 순간에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되더군요. 이 방법은 주로 예전에 많이 썼던 방법입니다. 요즘에는 공연을 많이 다니게 되면서 예전처럼 잠을 자는 것으로 해결하는 경우는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어디론가 다녀오는 것 자체는 늘 새로움을 불어넣는 계기가 됩니다.
국악앙상블 비빙 대표
안은미 댄스컴퍼니 음악감독
음반 ‘손익분기점’ 1997
음반 ‘21세기 뉴 헤어’ 2000
영화 ‘반칙왕’ 2000
영화 ‘복수는 나의 것’ 2002
영화 ‘좋은놈·나쁜놈·이상한놈’ 2008의 음악
가면극 음악프로젝트 ‘이면공작(裏面工作)’ 2009 외
작곡가 최우정
영감은 생활 속에 있지만
알 수 없는 것
보통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저만의 방법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죠.
1. 요리를 하거나 음식을 먹습니다.
2. 다른 작품들을 감상합니다.
3. 피아노를 마구 칩니다. 과장해서 ‘마구마구’ 칩니다.
4.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이것저것을 구경하며 돌아다닙니다.
5. 연필을 깎은 후, 악보에 쓰기 시작합니다. 물론 음표가 아닌 그 어떤 것이든 모두 씁니다.
6. 그래도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새 오선지나 새 스케치 노트를 삽니다.
7. 그래도 안 되면 그냥 잡니다.
저는 보통 수업을 할 때 영감을 받습니다. 학생들은 가르쳐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전을 주는 역할로 서게 될 때가 많습니다.
영감에 대한 정의는 도저히 답변을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영감과 관련해 떠오르는 에피소드는 여러 개 있습니다. 2006년, 저는 통영국제음악제의 개막작인 음악극을 써야 했습니다. 잠깐 서점에 들뤄 외국 도서 코너에 서서 눈앞에 있는 책들을 손에 들고 책장을 후루룩 넘겨갔습니다. 그러다 어떤 시에서 손이 멈췄습니다. ‘언제나 장미 한 송이’라는 시집이었습니다. 아무도 꺼내 읽은 것 같지 않은 흔적의 시집에 당시 제가 구상하면서 원하던 느낌과 이미지, 소리나 감정, 메시지 등이 모두 들어 있음을 느꼈습니다. 생각의 구체안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자 저는 음악극의 이름을 바로, ‘Rose(장미)’로 지었습니다. 시집이 ‘Rose’를 탄생시킨 셈이지요.
이처럼 일상에서 발견하는 사소한 것들이 영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매번 영감에 의존하고, 영감과 씨름하며 살지만 저는 ‘영감’을 아직도 무어라 정의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 나면 그때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TIMF앙상블 예술감독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교수
연극 ‘오구’ 1994
실내악곡 ‘산(散)’ 1999
음악극 ‘로즈(Rose)’ 2006
창작오페라 ‘연서’ 2010
음악극 ‘The Chorus; 오이디푸스’ 2011 외
작곡가 황병기
오래 보고 멀리 본다
나에게 있어 창작은 ‘가치의 실현’입니다. 때문에 시간에 쫓겨서 곡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영감은 시나 그림, 사색 등 도처에 깔려 있지만 그것이 작품을 위한 영감으로 발휘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하나의 생각을 작품으로 형상화하기까지는 많은 사색과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나는 2년의 시간을 생각하고, 2주 만에 곡을 씁니다. 생각이 멈추거나 떠오르지 않으면 그대로 있습니다. 나의 생각을 굳이 만들어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영감이 아닌, 인위적인 사상에 불가합니다. 그러한 생각의 잔상들이 정리가 될수록 빠른 시간 내에 곡을 쓸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을 고민할수록 나의 마음에 합당한 결과를 낼 수 있고, 정확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두면 ‘모방’이란 생겨날 리가 없습니다. 나에게는 ‘모방’이 없습니다. 나아가 나를 모방하는 ‘자기 모방’조차도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싫어합니다. 늘 마음 안에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또 지금 느끼는 모든 것을 다 쏟아냅니다. 나의 작품 가운데는 나의 전부를 쏟아내지 않은 작품이란 없습니다.
어려서 나는 ‘현대음악’ 듣기를 좋아했습니다. 1950년대부터였나 봅니다. 형식의 틀을 깨는 현대예술에 심취했습니다. 그 당시 전통음악에는 작곡의 개념이 불분명했고,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나는 떠오르는 대로 가곡 ‘국화 옆에서’를 썼고, 얼마 되지 않아 가야금 곡 ‘숲’을 쓰는 것으로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창작은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다’라는 막연한 열정이 작용했던 모양입니다. 가야금 독주곡 ‘침향무’의 경우, 신라 사람들에게 위촉을 받았다는 가정을 하는 것으로 영감을 얻었습니다. ‘내가 신라인이면 어떤 음률을 좇을까’로 시작한 작품입니다. 우리 전통음악은 거의 조선조의 유산입니다. 때문에 발상의 전환이 나를 새로운 창작의 세계로 이끌어줬습니다. 나의 곡은 오히려 서양의 인상주의 같다는 평을 얻곤 했습니다.
음악가로서 ‘가치가 실현’되는 완성의 순간, 제1의 감상자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작품을 쓰고 나서 내가 만족하면, 나는 자신이 있습니다. 제2의 감상자는 나의 아내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작품을 공감해주고, 격려해줍니다. 그때 나는 힘을 얻고, 안심합니다.
연주도 중요하지만 작곡가들의 역사가 바로 음악사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창작이 흡족하게 이뤄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주입식 교육에서는 창작력이 생겨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나라도 작곡가가 많이 배출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숲’ 1963
‘석류집’ 1965
‘침향무’ 1974
‘미궁’ 1979
‘밤의 소리’ 1985
‘춘설’ 1991
‘달하 노피곰’ 1997 외
작곡가 황호준
인간은 영원한 영감의 대상
제 작곡 과정은 우연히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악상으로부터 출발하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거의 매일 작곡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데, 곡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아 있는 동안 여러 음악적 아이디어를 논리적으로 발전시켜가는 방식으로 작업을 합니다. 때문에 영감에 의존하기보다는 제가 보내는 시간의 힘에 기대는 편입니다. 영감은 개인이 성실하게 보낸 시간의 보상이며, 이미 내 안에 내면화되어 있는 음악적 내용을 끄집어 낸 것입니다. 때문에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는 일상적으로 자신에게 감각되어지는 것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자기화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정서적으로 확장해나가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다.
다만 작품을 구상하는 초기 단계에는 주요 모티브를 만들어내기 위한 추상적 상상의 과정이 필요한데, 시와 그림에서 받은 인상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 종종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서 위촉 받은 국악관현악 작품을 써야 하는 상황에서 유난히 작업이 풀리지 않아 거의 보름이 넘도록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시작조차 못하고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책장에 꽂혀 있던 독일의 여류화가 케테 콜비츠의 화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죽음에의 초대’라는 그림이었지요. 이미 알고 있던 작품인데도 그날따라 강한 인상을 받았고, 바로 작업에 착수해 불과 삼 일 만에 16분이 넘는 국악관현악곡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를 꿈꾸다’를 완성했습니다. 영감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음에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사례 때문인가 봅니다.
작품에 직접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음악적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보다 스스로의 정서적 상태를 안정되고 충만하게 만들어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감동으로 충만한 상태일 때 상대적으로 작품이 더 잘 풀리는 것 같습니다. 여유가 있는 상황이라면 시나 소설을 읽거나 영화나 그림을 보기도 하지만, 당장 급한 상황일 경우에는 오히려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명상을 하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저는 끊임없이 ‘구체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추상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구체적 이미지로부터의 추상적 상상’ 혹은 ‘추상적 이미지로부터의 구체적 상상’을 통해 작품을 만들어왔습니다. 제 영감의 대상은 늘 ‘인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마감 시한을 정하지 않고 작품을 쓸 기회를 가져볼 생각입니다. 그것은 주어진 시간에 의해 강제되지 않고도 제 역량 이상의 결과물을 얻으려는 욕망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자기 성찰과 관련되어 있기에 매우 중요한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음악극 ‘오늘이’ 2008
국악관현악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를 꿈꾸다’ 2010
무용극 ‘풍속화첩’ 2011
오페라 ‘아랑’ 2011
뮤지컬 ‘왕세자 실종사건’ 2011
소리극 ‘이순신’ 2012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