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김새도 입맛도 문화도 다른 이들이 다함께 웃고 울었다. 미국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가 김지영 작곡가에게 위촉해 초연한 ‘우리 엄마의 엄마로부터’를 관람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웃음과 눈물의 중심에는 ‘미역국’으로 승화된 한국의 전통과 어머니의 사랑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해 11월 3일, 미국 텍사스 휴스턴 도심에 위치한 디스커버리 그린. 여유로운 풍경이 가득한 공원의 나무 사이로 음악에 맞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오래지 않아 구수한 미역국 냄새가 콧속을 파고든다. 지나가던 행인마저 모여들게 한 무대 아래에는 미역국에 입맛을 다시는 한국인부터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 미국인까지, 생김새도 입맛도 참으로 다양한 관객이 모여 있었다.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는 2007년부터 ‘휴스턴의 노래(Song of Houston)’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매년 2개의 창작 오페라를 위촉해 초연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3일부터 9일까지 휴스턴 시내 곳곳에서 공연된 ‘우리 엄마의 엄마로부터(From My Mother′s Mother)’는 재미 작곡가 김지영이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로부터 위촉 받아 선보인 작품이다. 김지영 작곡가는 ‘음식’이라는 보편적인 소재를 가지고 세대·문화 차이에서 오는 갈등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 그 사이에서 발견하는 어머니의 사랑 등 누구나 쉽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우리 엄마의 엄마로부터’에 담아냈다. 김지영의 곡에 재닌 조셉이 가사를 붙였으며 로렌 미커가 연출가로 나섰다. 소프라노 김효나가 할머니 역을, 메조소프라노 시게마쓰 미카가 어머니 역으로 출연했고, 딸과 사위 역에는 소프라노 박한나와 바리톤 리 그레고리가 각각 맡았다.
미역을 형상화한 배경이 인상적인 무대 위에는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 온 1세대(할머니)와 부모를 따라온 2세대(어머니), 그리고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인 남편과 결혼한 3세대(딸)가 등장한다. 오페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인 남편과 결혼해 출산한 딸을 위해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성껏 미역국을 끓인다. 어머니는 미역국을 들고 딸이 있는 병원에 가지만, 딸은 미국인 시어머니가 가져온 스콘과 요거트를 먹었다며 미역국을 사양한다. 미역국이 싫다고 말하는 딸의 투정을 병실 밖에서 들은 어머니는 실망한 채 고래와 미역에 얽힌 전설을 노래한다. 또 어린 시절 생일 때마다 먹은 미역국에 대한 추억을 회상한다. 막이 바뀌고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온 가족은 슬픔에 휩싸여 있다. 딸은 할머니를 잃고 나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노래하며 그리워하다가, 할머니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었음을 상기한다. 그리고는 아이를 바라보며 매년 아이의 생일에는 어머니에게 가겠노라고 노래하면서 미역국을 만들기 시작한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남겨준 전통으로 돌아가겠다는 딸의 아리아가 울려 퍼지며 막이 내린다.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 ‘우리 엄마의 엄마로부터’를 올린 작곡가 김지영은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다. 요요 마가 이끄는 실크로드 앙상블이 위촉한 ‘밀회’(2001년 연주)를 비롯해, ‘에밀레종’은 2006년 카네기홀에서 초연된 후 5년간 순회공연에서 연주됐다. 2010년에는 KBS교향악단이 미주 순회공연에서 ‘영웅들’을 뉴욕 카네기홀과 워싱턴 D.C 케네디 예술센터에서 초연했다. 현재 롱아일랜드 음악원 교수로 재직 중인 김지영 작곡가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로부터 작품 위촉을 받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2011년 초,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휴스턴의 노래(Song of Houston)’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12년 하반기에 초연할 작품을 위촉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동안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가 위촉한 창작 오페라 대부분이 전쟁·스파이·정치 문제 등 남성 중심의 이야기였던지라 이번에는 작곡가·극작가·연출가 모두가 여자인 만큼, 여성을 소재로 한 오페라이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이번 작품은 저의 첫 오페라 작품이고,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가 한국인 작곡가에게 작품을 위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소재 중 하나로 미역국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의 창작 오페라 담당자가 제게 오페라의 주제와 스토리는 철저하게 작곡가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작곡가가 오페라를 구성해 작곡하고, 극작가는 그 내용을 가지고 가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담당자와 오페라의 소재를 찾으며 제 인생 이야기를 하던 중 미역국과 한국의 산후조리 문화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오래전 저희 시댁에서 있던 일화인데요. 당시 아가씨의 출산을 앞두고 시어머니는 한국식 산후조리를 준비한 반면,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가씨는 더위를 참지 못하고 미역국 대신 얼음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해서인지, 두 사람의 입장 모두가 이해되면서도 여러 감정이 교차하더군요. 이 에피소드를 담당자가 매우 인상 깊게 들었고, 여기에 등장인물과 다른 요소들을 더 추가해 세계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세대 간의 갈등과 화해의 이야기로 오페라 내용을 발전시켰습니다.
오페라 연습은 어떻게 진행됐나요.
저를 포함해 지휘자·연출가·오페라 가수 등 오페라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휴스턴에서 한 달간 머물며 함께 연습에 참여했습니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9시까지 오페라 가수 개개인의 발음부터 음악적인 부분까지 꼼꼼하게 준비했습니다. 그 외에도 막과 막 사이의 음악을 추가로 작곡하거나, 가수의 특징에 맞게 아리아의 음역을 수정하는 등의 작업들이 함께 이뤄졌습니다.
극중 어머니가 부르는 아리아 가운데 고래와 미역에 얽힌 이야기는 한국인에게도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오페라를 구성하며 신화를 넣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역에 얽힌 신화를 찾던 중에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산부계곽변증설(産婦鷄藿辨證說)’에 기록된 구전 전승을 가져왔습니다. “사람이 물속에 헤엄쳐 들어갔다가 갓 새끼 낳은 고래에게 삼켜져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 고래 뱃속을 보니 미역이 가득 붙어 있었으며 장부의 악혈이 모두 물로 변해 있었다. 고래 뱃속에서 겨우 빠져나와 미역이 산후 보치하는 데 효험이 있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세인에 알려져 그 양험이 처음으로 알려졌다”는 대목을 아리아에 담았습니다.
무대에 등장하는 미역국은 어떤 의미를 갖나요.
오페라에서 미역국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과 문화를 상징합니다. 아이를 낳은 뒤 먹는 미역국은 단순한 국이 아니라 산후조리를 위한 절차이기도 하죠. 극중 미역국을 거부하는 것은 그동안 여러 세대에 걸쳐 내려온 전통문화를 거부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합니다.
오케스트라는 어떻게 구성했나요.
가야금·바이올린·첼로·플루트·클라리넷·타악 앙상블로 구성했습니다. 한국적인 소리를 오페라에 넣고 싶어 우리나라 악기 중에서도 다양한 음색을 보여줄 수 있는 가야금을 택했습니다. 가야금은 각 장이 연결될 때 중요한 역할을 하고요. 가야금 소리를 처음 들은 관객이 꽤 있어서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작품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나 아리아가 있다면요.
1막에서 할머니와 어머니가 무대 위에서 미역국을 실제로 만들며 듀엣으로 아리아를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에 사용할 미역을 구하기 위해 스태프들과 직접 한국 마켓을 찾았던 일들이 기억에 남네요. 3막에는 고래와 미역에 얽힌 설화를 들려주는 아리아가 나옵니다. 오페라 가수가 극적 효과를 위해 좀 더 길고 높은 음으로 만들어주기를 요청했던 부분인데요. 그 아리아를 가수가 무대 위에서 혼신을 다해 불러 많은 사람들이 감동받는 모습이었습니다. 마지막 5장에서 딸이 어머니와 화해하며 부르는 아리아를 연습할 때는 가수들과 스태프 모두가 각자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생각하며 눈물 흘리기도 했습니다.
매 공연 후 관객과 대화의 시간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관객 반응은 어땠습니까.
공연을 보며 웃다가도 눈물짓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미국에 사는 1~3세대 한국인들은 세대를 대표하는 각 캐릭터에 진심으로 공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줬습니다. 서구권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문화에 얽힌 음식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함께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한국적인 소재를 넘어서 세대 간의 갈등과 화해, 전통의 거부와 수용, 인류 보편적인 어머니의 사랑을 깊이 느꼈다는 것이 공통된 소감이었습니다.
글 김선영 기자(sykim@) 사진 Felix Sanchez/Houston Grand Ope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