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 극장 멤버들이 세종문화회관에서 펼친 ‘니벨룽의 반지’ 4부작 공연은 우리나라 공연 역사상 가장 화제를 모았던 무대의 하나였다. 그런데 과연 게르기예프의 지휘는 그만큼 뛰어났던 것일까? 솔직히 필자로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당시엔 공연 자체에 흥분되어 있었고, 러시아 가수들이 이만한 바그너를 들려준다는 것이 신기했으며, 예상하지 못한 아이디어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무대와 연출에 집중하느라 오케스트라의 연주력 자체에는 일단 점수를 후하게 주고 들었던 것 같다. 게르기예프는 2003년부터 ‘니벨룽의 반지’를 러시아와 유럽 무대, 그리고 우리나라에 올렸고, 이를 계기로 바그너에 대한 비중을 높여나가더니 지금은 나름대로 주목받는 바그너 지휘자가 되어 있다. 다만 전제가 있다. 이번 음반을 들으면서 절감한 바이지만 독일 정통에 입각한 바그너가 아니라 게르기예프 자신이 구축한 새로운 바그너를 들려주려 한다는 점이다.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의 콘서트홀에서 2011년과 2012년에 수 차례에 걸쳐 녹음한 소스를 편집한 이 SACD는 극장 이름을 딴 자체 레이블의 기술적 역량을 총동원한 산물답게 녹음의 밸런스가 잘 잡혀 있고 저음현의 풍성한 깊이감도 만족스럽다. 그런데 가슴을 쿵쿵거리게 만들어야 할 1막 전주곡부터 드라마틱한 박력이 부족하다. 늘어질 정도는 아니지만 충분히 길게 호흡을 잡은 템포, 그리고 음향 효과로 윽박지르지 않겠다는 게르기예프의 관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 유명한 3막의 ‘발퀴레의 말타기’도 마찬가지다. 가수들은 러시아에 국한하지 않고 국제적인 바그너 스타들을 다수 동원했다. 그런데 불운한 쌍둥이 남매 커플인 지크문트 역의 요나스 카우프만, 지클린데 역의 아냐 캄페는 물론 브륀힐데 역의 니나 스템메까지 모두 바그너 가수로는 억센 멋이 덜하고 소리 자체의 부드러움이 강한 출연자들이다. 강력한 드라마를 구축하기보다는 바그너 음악의 탐미적인 면을 부각시키고자 한 게르기예프의 의도에 부합해보인다. 감정의 진폭을 대조시키려는 시도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불륜 남매의 격정적인 사랑 이야기는 순화되었고, 부친의 명령을 어기고 지크문트와 지클린데를 구하려는 브륀힐데의 용기도 그저 선량함에서 비롯된 행동처럼 보인다. 훈딩을 부른 미하일 페트렌코는 돋보이는 역량을 과시하지만 소리의 질감이 이 배역에는 다소 젊게 들린다. 반면 보탄을 부른 르네 파페는 저음의 유연함과 노련함이 돋보인 적역이고, 프리카 역의 예카테리나 구바노바는 남편의 부당한 행위에 대한 아내의 분개와 여신으로서의 품격을 당당하게 살리고 있다. 게르기예프의 의도를 제대로 살리려면 예전의 시도처럼 러시아 가수로 채우는 편이 나았을 것 같다. 그랬다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그 특이함을 러시아 스타일의 ‘반지’라는 지역적인 개성 탓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국제적 바그너 가수를 섭외한 바람에 이제는 바이로이트의 ‘반지’와 비교되면서 그 정통성을 시험 받아야 하게 된 것이다. 논쟁반의 탄생이지만 바그네리안 사이에서 좋은 평을 듣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게르기예프의 ‘반지’ 시리즈는 2014년까지 계속 출반될 예정이다. 두 번째에 해당하는 ‘발퀴레’가 먼저 나온 것은 분위기를 띄우려는 마케팅 차원이다. 전야에 해당하는 ‘라인의 황금’은 올가을에 나온다.
글 유형종(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