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리 소콜로프의 1980년대 러시아 연주 실황

소콜로프를 소콜로프이게 하는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3월 1일 12:00 오전

무대 위에서의 존재감으로 보면, 현역 가운데 그리고리 소콜로프 정도의 ‘힘’을 갖춘 사람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소콜로프를 소콜로프이게 하는 요소’는 무엇보다 녹음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나 스피커를 통해 울려 나오는 소리에서도 감출 수 없는 무서운 집중력이다. 1990년대 그의 무대를 여러 번 접한 필자는 그의 독특한 무대 매너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등장해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퇴장할 때까지 그는 인사를 하는 순간까지 청중과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음악에만 집중한다. 건반이 부서져라 내리치는 타건 속에 감춰져 있는 세분화된 손끝의 감각과 극도로 예민해진 청각으로 음 하나하나에 몰입하며, 그 모습 자체로 수천 명의 청중들은 그의 음악적 ‘포로’가 되고 마는 것이다. 달라진 러시아의 경제 사정 덕분인지, 당당하게 ‘메이드 인 러시아’로 멜로디야 레이블에서 출시된 네 장짜리 박스 신보는, 과거 다른 레이블을 통해 낱장으로 소개된 음원들이 대부분이나 마치 소콜로프의 새 얼굴을 대하듯 반갑고 콘서트홀의 생생함이 느껴진다.
1985년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레닌그라드) 실황으로 녹음된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이 첫 장을 장식한다. 소콜로프의 접근 방식은 베토벤이 쌓아 올린 음의 건축물을 차분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변주 하나하나의 특성을 파헤치듯 과감하게 본질을 나타내고, 내제된 낭만성과 비르투오시티를 설명해내는 방법이다. 튀어나오듯 나타나는 미스터치들도 자존감과 내면의 확신으로 뭉친 소콜로프의 단면이라고 하겠다.
둘째 장의 쇼팽 에튀드집 Op.25는 한 음을 다루더라도 정성 어린 터치로 ‘어루만지는’ 소콜로프의 변신이 놀랍다. 음의 알맹이는 오롯이 살아있으나 프레이징의 마무리나 페달링에서 고도로 정제된 우아함이 배어 나온다. 함께 실린 브람스의 소품 가운데는 Op.79의 랩소디 두 곡이 인상적인데, 코드 하나에 실어내는 묵직한 중량감은 다른 러시아 피아니스트들과는 차별화되는 스타일이다.
세 번째 CD의 슈만 가운데는 단연 환상곡 Op.17이 하이라이트다. 다소 여유롭고 몽환적일 수 있는 슈만의 환상성은 소콜로프의 열정 아래 부서지며 새로운 환영으로 탄생한다. 기복이 심한 다이내믹과 아고긱은 마치 라흐마니노프의 세계를 감상하듯 다채롭고 풍성하다. 이어지는 소나타 2번 G단조와 함께 신음 소리와 기합이 섞여 있는 소콜로프의 ‘연주 외 소음’을 듣는 재미도 있다.
마지막 장은 오랜만에 음반으로 만나는 반가운 음원이다. 1966년 만16세로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이라는 믿기 힘든 결과를 빚어낸 어린 시절 소콜로프의 귀중한 기록이다. 당시의 실황은 아니지만 콩쿠르 직후 녹음돼 그 분위기는 생생하다. 콩쿠르 당시 연주했던 생상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실려 있는데, 다소 차분하고 평이한 진행인 차이콥스키와는 대조적으로 극명한 음상과 야무진 테크닉이 전면에 드러나는 생상스 쪽이 더욱 호연이다. 당대 최상급의 기교파로 이름을 날렸던 소년 피아니스트의 단면을 확인하는 데 충분한 실력이다.

글 김주영(서울예술종합학교 교수ㆍ피아니스트)


▲ 그리고리 소콜로프(피아노)
Melodiya MEL CD 10 02078 (4CD, AD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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