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작곡가 파스칼 뒤사팽 파리 현지 인터뷰

뒤사팽의 존재 방식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3월 1일 12:00 오전

올해 통영국제음악제 상주 작곡가로 초청된 파스칼 뒤사팽을 파리에서 만났다. 흑백의 프리즘으로 세상을 보고, 활짝 열린 가슴으로 생을 마주한다는 그는 느리고 깊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작곡ㆍ연주
나에게 음악은 육체적이고, 서정적이며, 감정적이어야 하는 그 무엇이다. 몇몇 연주자들은 정신적으로 완전히 교감한 연주를 들려준다. 내가 곡을 쓸 때 가지고 있던 감정의 파편들까지도 고스란히 담아서 전한다. 작곡 역시 내 감정들을 음악에 투영시켜서 악보에 남기는 굉장히 개인적인 작업이다. 연주자가 단지 음표뿐만이 아니라 작곡가의 정신과 영혼까지도 모조리 이해한 그런 연주를 들려줄 때, 그는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감정의 중심부에 들어와 있는 상태일지 모른다. 나는 관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창작자이기 때문에, 그런 연주를 들을 때는 남다른 감흥이 든다. 악보에 적힌 음표가 연주를 통해 현실화됐다는 사실 자체에 감동을 받지는 않는다. 아주 어린,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한 작곡가라면 모를까…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난 뒤에는 그런 일차원적인 사실에 감동받기 어렵다. 100퍼센트의 연주자를 찾는다는 건 더 어려운 일이다. 독창적인 해석을 해내고 청중에게 반응을 얻어내는 것은 연주자의 역량이다. 하지만 내가 곡을 쓸 때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연주를 들려주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내면에서 외부세계로
예를 들어 폴리니가 파리 살 플레옐에서 베토벤의 소나타에 이어서 슈토크하우젠을 연주한다면, 폴리니 정도의 엄청난 연주자가 어째서 슈토크하우젠을 수호하고 있는지, 거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폴리니라면 슈토크하우젠조차도 반짝이고 아름답게, 몇몇 부분은 거의 쇼팽에 가까울 정도로 연주를 해내니까. 내가 추구하는 바와 달리, 대부분의 현대음악은 어렵다. 그런데 어렵다고 귀를 닫고 마음을 닫아버린 사람들에게는 할말이 없다. 열려 있는 대중, 정신의 모험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청중을 갖고 있다는 건 창작자에게 큰 자산이다. 하지만 시작도 전부터 거부감을 드러내는 청중이라면, 창작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악기로 연주하는 건, 음악이 외부로부터 연주자의 내면으로 들어오는 행위이다. 하지만 작곡은 내면에서 외부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만큼 소통이 중요하다. 작곡가들의 내면에는 남이 쉽게 이해하기 힘든 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나 역시 처음에는 피아노를 배웠고, 오르간의 다성부에 강렬히 매혹되어 오르가니스트가 되려고도 했다. 하지만 재능이 특별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는 꿈을 접었다. 외부에 존재하는 음악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경지에 도달하려고만 해도, 특별한 재능과 동시에 생의 많은 부분을 헌신해야 한다.

외로운 늑대
내가 하려는 건 과연 무엇일까, 내면에 존재하는 이 강렬한 감정들을 어떻게 외부세계와 연결시킬 것인가, 그런 고민들을 하곤 했다. 창조하는 일을 할 것이라 인지하고 있었지만 열 여덟 살에 에드가르 바레즈의 음악을 듣고 갑작스럽게, 강렬하게, 즉각적으로, 내게 필요한 것은 음악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형제 중 두 사람은 건축가가 되었고, 나 역시 사진이나 건축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음악이 가장 절실했다. ‘작곡가’라는 타이틀은 직업적 측면에서, 성취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좋은 연주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피아노를 관두었다. 보다시피 내 작업실에는 피아노가 없다. 곡을 쓰는 와중에 소리를 예상하는 건 모두 내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피아노보다 오르간을 좋아했는데, 듣는 귀를 트이게 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격이었다. 오케스트라 곡을 쓸 때엔 여전히 오르가니스트처럼 겹겹이 쌓인음의 층위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떠올린다.
나는 ‘작곡가’라기보다는 ‘음악으로 글을 쓰는 작가’라고 스스로를 지칭한다. 내가 하려는 것은 음악이지만 결국 글을 쓰듯이 음악으로 의미 있는 문장들을 만들고, 그것으로 소통하고 누군가의 가장 깊은 심연에 닿고 싶기 때문이다. 나의 언어는 음악일 뿐, 시인이나 소설가와 다를 바 없는 일을 하고 있다. 바레즈의 음악을 들었을 때, 잠들어 있던 나의 음악적 자아가 눈을 떴다. 눈앞에 신세계가 열린 기분이었다. 이런 음악을 나도 만들고 싶다는 마음에 파리 1대학에서 미학을 가르치고 있던 크세나키스를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됐다. 음악 수업이 아니라 미학 수업이었으므로 작곡을 전문적으로 배웠다기보다 어떻게 예술가가 되어서 창조해야 하는지, 예술관을 배웠다. 세상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것, 예술가는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가… 이런 고민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기 시작했다. 학교의 동기들 중에도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미학과 수학, 철학을 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크세나키스 역시 나를 아주 늦게 알아보았다. 나는 비밀에 싸인, 존재감이 별로 없는 학생이었다. 다만 나는 그를 인간적으로 정말 좋아했다. 작곡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으므로 유명한 강의는 다 들으러 다녔다. 불레즈를 존경하지만 그는 어딘지 모르게 내가 접근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음악을 논하고 있었다. 음악적으로 너무 복잡하고, 나 와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는 음악적으로 백만장자인데 나는 동전 한 푼도 손에 쥐지 않은 느낌이랄까. 메시앙의 수업도 파리고등음악원에서 1년간 청강을 했지만 완전히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1년이 지나서는 그의 수업 청강을 중단했다. 불레즈와 메시앙을 현대음악의 거장으로서 존경하는 것과는 개별적으로, 예술관이 맞지 않는 사람의 제자가 될 수는 없었다. 나는 혼자서 작곡을 계속했고 결과적으로 나만의 언어를 가질 수 있었다.
모든 작곡가에게 필요한 것은 대체 불가능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계보를 만들고 분류를 한 뒤에 꼬리표를 달고 싶어 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가장 획기적인 작품을 남긴 작곡가들은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고, 분류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존경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베토벤ㆍ드뷔시ㆍ리게티ㆍ시벨리우스 역시 홀로 도도하게 빛나는 사람들이다. 드뷔시의 후손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있는가? 없다. 베를리오즈, 어쩌면 바레즈가 될 수도 있겠지만, 역시 없다. 베토벤의 후계자는 브람스인가? 아니다. 말러의 뒤를 이은 것은 쇤베르크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사람들이 아주 독특하고도 홀로 음악사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결국 위대한 창작은 그들이 도도하게 홀로 빛나고 있을 때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역사가 그들을 규정짓고 계파를 만들지만, 하지만 나는 모르겠다. 왜 커넥션을 꼭 만들려고 하는지.
누군가가 나를 무리 짓지 않는 외로운 늑대에 비유한 적도 있는데, 가장 나답기 위해서는 고독의 시간이, 나의 내면을 바닥부터 관조할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남을 따라 하지도 않고, 동어 반복도 하지 않는다. 남들은 나더러 독특하다고, 아무와도 닮지 않았다고 하는데 나는 매일 이곳에 앉아 철저하게 바닥부터 나를 들여다본다. 무의식적으로 늘 새로운 곡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우선 곡을 쓰기 위해 나 자신을 비워내고, 악상을 전개해가는 동안 나는 철저히 혼자다. 악보를 앞에 두고 세계와 대결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1977년 윤이상
‘자유… 고독’, 이번 통영국제음악제의 주제가 나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윤이상의 고향에서 이뤄지는 현대음악 축제는 그 타이틀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1977년 나는 윤이상과 같은 무대에 섰다. 내가 처음 작곡가로서 파리에서 데뷔를 했을 때, 그와 같은 날에 초연이 된 것이다. 겨우 이십대 초반의 작곡가였고 그는 이미 너무도 유명한 존재였으므로 나는 경외심에 사로잡혀 별다른 대화를 하지 못했다. 그가 무척 친절하고 열려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하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다. 그날은 내게 무척 중요한 공연이었는데 결과가 성공적이었으므로, 그 공연으로부터 커리어를 시작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후로도 몇 번 그의 작품과 함께 연주될 기회가 있었다. 환상적인 음악이었다. 그때까지는 전혀 들을 수 없었던 음악이었으니까. 나 역시 1970년대에 윤이상의 음악을 들었을 때, 한국의 전통음악에 기반한 음악이 가져오는 새로움에 전율을 느꼈다. 내가 스승으로 삼은 크세나키스 역시 프랑스 사람이 아닌 그리스 출신 이민자였다. 역사적으로 돌이켜보면 음악은 다른 문화와 마찬가지로 한껏 문을 열어 새로운 것을 수용하다가 다시 문을 닫고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식으로 개방과 폐쇄를 반복해왔다. 나를 매혹시키는 것은 음악이 스스로를 활짝 열고, 멀리에서 기원한 것들과 맞닿는 순간이다.
윤이상의 등장에는 음악계의 필요와도 맞물리는 지점이 있었다. 다름슈타트 음악제는 미국 CIA의 후원으로 운영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을 재건설한 것은 미국이었다. 슈토크하우젠의 음악이 나온 그 시점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클러스터를 사용한 새로운 음향과 후에는 전자음악과 결합하는 시도들을 통해 지금까지의 독일 특유의 문화들, 히틀러가 신봉했던 바그너와 게르만 문화를 삭제하고 새로운 음악을 독일 음악이라고 지칭하고자 했다. 다름슈타트 음악제에서 윤이상과 다케미쓰 도루가 주목받은 것은, 시기 적절하게 아시아 작곡가로서 그들이 현대음악계에 등장해서이기도 했지만, 미국의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후반, 서독을 재건하면서 미국은 그들의 문화를 여러 면에 있어서 유럽으로 전이시켰다. 다국적ㆍ다인종 문화에 기반한 그들의 시각에 따르면 동양의 전통이 ‘새로운 음악’에 필수 불가결했으리라. 그러므로 아시아적 색채를 지닌 윤이상과 다케미쓰는 그들에게 아주 이상적인 작곡가였다. 음악은 음악으로만 듣기 이전에 근저에 기반한 이런 정치적ㆍ사회적 시각의 접근 역시 필요하다.

젊은이에게 “사랑”
조언이라. 작곡가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소우주인데 내가 무슨 조언을 할 수 있을까. 앞서 말한 1977년 나는 스물두 살이었으니 어쩌면 너무 일찍 커리어를 시작한 걸 수도 있다. 그에 비해 요즘 작곡 전공 학생들은 너무 오랫동안 학교에 머문다. 현재 뮌헨 음대 초청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서른 살이 넘은 학생들도 종종 있다. 나는, 왜 아직도 학생이냐고 묻는다. 학교에 오래 남아 있는 것이 커리어에 마냥 도움이 되진 않는다.
나는 (파리고등) 음악원 출신도 아니고 인맥도 없었으므로, 작곡가가 되려면 방법은 한 가지였다. 내 곡이 많이 연주되는 것. 물론 운이 따랐다. 스펙트럴리즘이라든가, 당시 프랑스 작곡계의 주류 경향에서는 완전히 독립된 상태였으므로 그 견고한 카르텔에서 완전히 벗어난 존재로서 지금까지 왔다. 커리어가 시작된 이후로는 초고속 열차에 올라탄 것처럼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작곡가 스스로 세계와 대결하려는 자세다. 쉽지 않은 일이다. 다수의 제자들이 작곡가가 아니라 ‘음대 작곡과 교수’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 뻔히 보인다. 창작자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용기와 잘 풀릴 것이라는 긍정적인 마음, 중심을 잃지 않는 내면의 자신감, 무엇보다도 사랑이 필요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애가 정말 필요하다. 하지만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현대음악의 문제는 나르시시즘에 기반하고 있다. 현대음악이 외면받는 이유는 스스로에게만 관심을 보일 뿐 음악 외부에서 일어나는 반응들 혹은 수용자들의 마음가짐에는 무심하고, 그걸 거의 무시하기 때문이 아닌가. 예를 들어 독일의 현대음악계를 살펴보면, 여전히 1960~1970년대의 경향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거의 클럽을 이루고 ‘나는 현대음악이다, 나는 헬무트와 라헨만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들과 비슷한 부류의 음악을 한다는 표식을 드러내지 않으면 독일 현대음악계의 주류에 들어갈 수가 없다.
정명훈에게 헌정되고 서울시향으로부터 공동 위촉을 받은 ‘롱아일랜드의 아침’ 연주를 위해 서울에 갔을 때, ‘진은숙의 아르스 노바’ 프로그램에 참여한 젊은 작곡가를 만났다. 그는 빛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에 유학을 갔다가 스타일이 다르다는 이유로 새로 만난 스승으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았고, 그래서 용기를 잃은 상태였다. 하지만 한국 출신의 작곡가가 독일 현대음악계의 어법을 흉내 낸다 한들 성공해봤자 ‘아주 잘 모방한 작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독일 어법을 따라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흔히 ‘교수’인 작곡가들은 자신의 스타일을 그게 유일한 진리인 것처럼 강요한다. 하지만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고, 처음 유럽에 왔으니 그가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곡을 쓰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나는 격려를 해줬다. 그런 비난은 다 잊고 무엇보다 너 자신이 되라고 말이다. 아무리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작곡가의 클래스에 있다 해도, 자신의 어법을 찾아야 한다. 이미 존재하는 계파의 스타일에 절대적인 복종이나 충성을 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예술가가 되려면, 스스로 자아를 가지고 예술가가 되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자신의 이름 앞에 작곡가라는 호칭을 달고 그에 걸맞게 살아가야겠다는 의지와 신념이 필요하다.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별로 대단하지 않다. 작곡이란 가르칠 수 있는 장르의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 테크닉이 완성된 이후에는 어디까지나 자기자신과의 싸움이니까 옆에서 악보를 보고 이런저런 조언을 해줄 수 있고 의견을 교환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여성 작곡가들의 곡을 더 좋아하는데, 대부분 덜 야심 찬 경우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달라져서 좀더 많은 여성 작곡가들이 등장하는 것도 진보의 증거라고 본다. 그녀들에게는 음악에 대한 사랑이 전부일 뿐, 폭력적인 야심은 찾아볼 수 없다. 다수의 남성 작곡가들은 성공에 대한 욕심이 앞서는 경우가 잦다. 나는 그런 욕심과 야심으로 가득 찬 작품을 볼 때면 쉬이 불편해진다. 유명해지기 위해, 콩쿠르에서 입상하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쓴 작품과 오로지 음악에 취해, 음악이 주는 기쁨을 위해 만들어진 곡은 완전히 다르다. 악보만 보아도(연주를 들어보지 않아도) 창작의 기쁨과 희열에 빠져 있는 것이 전해진다. 작곡가로서 가르치면서 감동받는 순간이 있다면 그런 순간들이다.

음악의 국적
내가 프랑스적 작곡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사람들이 나에게 투사하는 이미지에 불과하다. 애초에 출발부터 프랑스적인 전통에 속해 있지 않았다. 어느 계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내가 프랑스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 음악을 프랑스 음악으로 분류하겠지만, 내 오페라의 제목들은 물론 텍스트도 독일어나 영어일 때가 흔하다. 조만간 출시될, 라디오 프랑스 필과 녹음한 음반(DG)은 정명훈과 작업했다. 가장 만족스러운 레코딩이 될 것 같다. 그는 한국 사람이지만 프랑스 음악계에 있어 그 어떤 프랑스 출신 지휘자보다도 뚜렷한 직관과 깊은 음악적 이해를 보여준다. 내가 프랑스 사람이고 내 음악은 프랑스 음악이므로, 프랑스 출신 지휘자와 작업해야만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음악은 형이상학적인 그 추상성 때문에, 자신의 영토에 기반을 두고, 그로부터 출발하지만 더 멀리, 차원을 뛰어넘어야 하는 장르이다. 프랑스인으로서 내가 누리는 음악적 자산을 부정하진 않겠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존재로서 자아를 갖는 것이 우선이다. 2013년의 뒤사팽은 1913년의 스트라빈스키와 달리, 그가 지닌 국적이나 토양보다도 창작 작품으로 더 먼저 평가받아야 한다.

‘열려 있다’
현대음악은 큰 시각에서 보면 세계의 일부인 서유럽에서, 독일을 중심으로 시작된 아주 좁은 세계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모든 것이 파괴되었고 그래서 작곡가들은 처음부터 시작했다. 오늘날 27개 국가가 유럽연합에 속해 있지만 당시는 일곱 개도 안 되는 나라들이 흔히 우리가 일컫는 세계의 전부였고, 북미가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냉전의 시대를 거쳐왔다. 중동과 아시아의 나라들은 우리의 시야에 존재하지 않았다. 러시아나 중국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우리가 향유해온 현대음악은 결국 세계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나라들만의 것이었다. 현대음악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작곡가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세계는 손바닥 안에 집어넣을 수 있을 만큼 작았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내가 가르치는 뮌헨 음대만 해도 러시아 출신 학생들이 많고,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음악원에 유학을 와 있다. 이런 세계화 시대에, 현대음악의 폭과 범주를 예전 그대로 고수하는 것은 과연 올바른 접근일지 모르겠다. 내 머릿속에서 악상을 미리 예상하는 동안 나는 모든 가능성에 스스로를 열어둔다. 모든 것은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나는 늘 피아노 없이 작곡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바그너ㆍ스트라빈스키ㆍ라벨ㆍ푸치니ㆍ드뷔시 등 피아노를 통해 많은 음악적인 시도와 실험을 한 후에야 음악을 쓸 수 있었던 작곡가들과는 반대로, 나는 그저 테이블 위에서 오선지만 펴놓고 작업을 한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음악적 이미지들이 있으므로 그걸 옮겨오는 과정이 작곡인 것이다.
나는 여러 면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철학자를 들뢰즈라고 여긴다. 스무 살 즈음 파리 8대학에 무작정 그의 수업을 들으러 갔다. 정식 학생은 아니었지만 그는 나에게 ‘내 인생의 가르침’을 준 철학자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사람들은 흔히 각자의 경험과 학습으로 형성된 도식에 따라 그것을 재확인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이 도식에서 벗어난 것을 말하려 들면서, 평소에 전부라고 여기던 틀에서 벗어나 전체를 마주하게 된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기 보다 새로운 전체를 발견하고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창작이다. 내가 음악을 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새로움이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다기보다, 음악의 범주를 확장해가는 것이다. 늘 ‘열려’ 있어야 하는 이유는 이 범주의 확장을 위해 스스로가 두르고 있는 틀과 방어기제를 내려놓아야 하고 그걸 체화시킬 필요가 있어서다. 윤이상이 한국의 전통 선율을 자신 음악의 소재로 삼았듯, 이미 존재하는 것을 새롭게 재발견하는 일도 창조적인 행위가 된다.

사진 찍는 작곡가
사진은 나의 업이 아니지만 내 삶을 살기 위한 필수 요소이다. 나는 작곡가이고 음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필요가 있다. 나에게는 사진이 그렇다. 라이카 M6으로, 오로지 흑백으로만 찍는다. 이미 세상에는 너무 많은 색채가 있으므로 내가 구성한 세계 속에는 색채를 배제한 흑백만이 존재한다. 흔히 빠지기 쉬운 오류인데 흑백엔 두 가지 색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빛에서 어둠으로 가는 그 사이에 아주 다양한 층위의, 오묘하게 다른 수백, 수천 가지의 흑과 백이 존재하고, 나는 그 미세한 차이를 드러내는 색상들을 통해 세상을 본다. 뉴욕ㆍ베를린ㆍ뮌헨ㆍ도쿄ㆍ파리…. 서울은 아직 원하는 이미지를 담아내지 못했다. 2011년 서울시향과의 공연이 있었지만, 겨우 사흘 머물렀기 때문이다. 사진 기술을 배우는 데에도 한때 골몰하기도 했고, 예전에는 현상ㆍ인화까지 직접 다 했지만 시간을 많이 소요하기 때문에 이제는 찍는 일에만 집중한다.
빛이 없는 공간이라 그런지 암실에 있으면 시간이 휙 날아가고는 했다. 사진을 찍는 행위는 작곡과 비슷한 점이 많다. 우리는 공간을 느끼고, 이미지를 구성한다. 나는 선과 공간이 주는 형태와 긴장감에 관심이 많다. 흑백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아니라 원래 나는 무채색을 좋아한다. 이 작업실의 대부분 역시 흑백이다. 검은색 안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색깔들이 숨어있고, 흑백을 통해서 세상을 좀더 다르게 볼 수 있다. 색채는 충분히 우리 주변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쳐다보고 예상하고 머릿속에 미리 떠올려보고 셔터를 누르면 결과는 시간이 꽤 지난 후에 다가온다. 디지털 카메라는 거의 거울과도 같이 즉각적으로 사물을 비쳐내는데, 수동은 결과를 손에 쥐기 전까지는 어떤 사진이 나올지 전혀 모른다. 아무리 디지털의 시대라고 해도, 아직까지 수동작업을 고집하는 사진가들이 꽤 있는 건 여전히 아날로그의 어떤 부분은 디지털로 치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사진집도 나오고, 꾸준히 사진을 찍고 있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작곡가일 뿐, 사진작가는 아니다. 사진은 내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두 번째 요소다. 사람들이 관심을 보여서 이렇게 사진집이 나왔고, 전시도 하게 됐다. 음악과 사진, 두 장르에 걸쳐서 창작의 영감을 많이 받는다. 사진적 테크닉이 내 음악에 스며들기도 한다.
오페라를 작곡할 때 미장센, 연출에도 내 견해를 피력하고 바그너 정도는 아니지만 내 음악과 함께 존재하는 주변 장르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전적으로 맡기기보다는 내 의도가 충실히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한다. 무대 미술을 직접 하기도 하는데 설치미술 작품에 가깝다고나 할까. 나는 공간과 건축에도 관심이 많다. 늘 음악이 생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나는 음악 안에만 갇혀 있고 싶지 않다. 음악은 아주 넓고 깊은 세계이고 자유와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수단이자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
나라는 사람은 늘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싶어 하고,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고자 하기 때문에 사진에서의 존재 방식 – 혼자 집중하고 생각하고 공간과 장면을 프레임 안에 구성하는 것 – 이 도움이 된다. 이 와중에 나는 음악에만 갇혀 박제된 예술가가 아니라 생동감 있는 존재로 거듭난다. 나는 음악가 이전에 예술가이고, 예술가란 창조하는 사람이다. 작가ㆍ소설가ㆍ영화감독ㆍ작곡가ㆍ사진작가… 이들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구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이전에 모두들 창조하는 사람들이라는 것,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다는 것에 더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창조하는 사람들은 그 운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른다. 다만 인생이 그들에게 구체적인 장르를 정해주리라. 창조하는 것, 문을 여는 것,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내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삶과 인생을 좀 더 의미 있게 만드는 일이 예술가들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통영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상연될 어린이를 위한 작품 ‘모모’ 역시 내 아이들을 비롯해 아직 현대음악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은 아이들이 쉽게 음악을 접하길 바라며 썼다. 지금까지 결과는 아주 성공적이다. 교육적인 측면에도 나름의 노력을 계속하고 싶다. 나는 젊은 작곡가들을 만나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그들에게는 더 많은 미래가 있고, 그 미래에는 아직 쓰이지 않은 음악들이 존재한다. 현재 음악원에 매여 있는 교수가 아니니까 아주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아니지만 꾸준히 가르치는 일을 지속할 것이다. 진은숙이 서울시향과 함께 ‘아르스 노바’를 운영하고 마스터클래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나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젊은 작곡가들에게 좀 더 많은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다. 만나서 격려해주고, 의견을 나누고, 조언을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활발한 창작이 이뤄져 그들이 작곡가로서 자립하는 것을 돕고 싶다. 그럼 더 많은 음악들이 창작될 것이다. 걸작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딛고 선 음악의 영토가 더 비옥해질 것이다. 그건 나에게도 좋은 일이고 나뿐만 아니라 음악을 듣고 향유하는 인류 전체를 봐도 정말 근사하고 좋은 일이다. 아시아 초연이 될 ‘To Be Sung’이 어떻게 통영에서 펼쳐질지 벌써 설레고 기대가 된다.
*파스칼 뒤사팽과 함께하는 통영국제음악제 프로그램은 이어지는 기사 참조

글 김나희(파리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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