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좋은 어느 날,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있었다. “6시부터 9층 문화홀에서 오페라 이야기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평소에는 내 귀에 와 닿지 않던 백화점 문화홀의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오페라 강연회? 어떤 내용일까?’ 자석에 이끌리듯, 왠지 안 가면 후회할 것 같은 마음이 갑자기 든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날 2004년 글라인드본 페스티벌 실황을 처음 보았다. ‘금발 카르멘’으로 등장한 안네 소피 본 오테르는 충격적인 연기와 노래로 나를 유혹했고, 필리프 조르당의 지휘와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압도적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오페라 중 가장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인 카르멘은 ‘팜므파탈’인가 아님 ‘희생양’인가? 그날 만난 카르멘의 모습에 내 마음은 몹시 흔들렸다. 그리고 그때부터 오페라와의 적극적인 만남이 시작됐다. 이전에는 관심이 있었어도 FM 라디오의 음악방송을 듣거나, 가끔 공연장을 찾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날 오페라와의 만남은 새로운 희열을 느끼게 했다. 여행에서도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 그 지역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듯이, 특별한 지식 없이 봐왔던 오페라를 친절한 설명과 함께 아리아에 담긴 의미까지 세세히 알게 되니 마치 새로운 세계가 열린 듯한 기분이었다. 가수에 따라, 지휘자에 따라 달라지는 맛을 서서히 느끼면서 오페라의 세계에 더욱 깊숙이 발을 내딛게 됐다.
그러던 중 이 좋은 음악을 혼자 즐기기에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행복을 공유하고, 함께 즐기고 싶었다. 그래서 ‘누구에게 이 즐거운 소식을 알릴까’ 고민하다가 제일 먼저 친정어머니가 떠올랐다. 하지만 어머니가 먼저 하늘로 떠나시고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새어머니였기에 서로 공감대와 친밀감이 높지 않았다. 나 역시 아버지와 모두를 위해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을 늘 머리로만 생각하던 차에 먼저 용기를 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어머니는 오페라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문화센터에서 아코디언 연주 강의를 하는 어머니는 평소 음악에 관심이 많았지만, 오페라는 그동안 제대로 감상할 일이 없었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정말 고맙고, 행복하다”라는 말과 함께 딸이 아니면 어떻게 오페라와 이렇게 가까워질 수 있었겠느냐는 이야기를 하며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이후 어머니와 나의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모녀 사이에 커다란 공감대가 형성되니 함께 하는 다른 일들도 차츰 늘어났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또 다른 오페라와의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며 지내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투우사의 노래’가 집안에 울려 펴진다. 오페라의 세계에 새롭게 눈뜨게 해준 ‘카르멘’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동그라미를 꺼내다’에서는 ‘내 생애 잊지 못할 음반’을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이번 호에는 은평중학교 이미정 교사의 동그라미를 나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