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충격적이고 기발한 패션쇼를 상상해보았는가? 실제로 눈앞에 펼쳐진다면? 여기, 당신이 떠올리는 패션쇼에 근접할 상상력 충만한 쇼가 있다. 그저 평면적으로 ‘패션’만을 보여주는 쇼가 아니다. 패션과 음악, 이 둘을 입체적으로 조합시킨 신개념 종합예술이다.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공연 의상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세멜레 워크’가 통영국제음악제의 새 시대를 알린다. 3월 22~23일 통영시민문화회관.
지난 1월, 로코코 스타일로 기품 있게 꾸며진 시드니 타운홀이 ‘신성한 런웨이’로 변신했다. 30미터 길이의 런웨이 양쪽으로 관객이 두 줄씩 앉아있다. 셋… 둘… 하나! 스포트라이트가 켜지는 순간, 런웨이 위로 모델들이 쏟아진다. 이들의 손에는 악기가 들려 있다. 마치 프랑스 궁정의 대향연에 초대받은 예술가 같긴 한데, 20세기 펑크족 느낌도 난다. 그런데 ‘모델’이라 여겨졌던 이들의 정체는 런웨이 중간쯤 이르렀을 때 베일을 벗는다. 런웨이를 걸어오던 이들은 백스테이지로 사라지지 않고 돌연 오른쪽 중앙에 이미 착석해 있는 연주자들과 나란히 자리를 잡고, 연주에 돌입한다. 이들은 ‘진짜 음악가’들이었다! 소품인 줄만 알았던 이들의 손에 들린 악기 역시 진짜 연주용 악기였다. 패션쇼의 서두를 장식한 이들은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카레이도스코프 앙상블이었다. 연주자들이 콘서트에서 입는 검은색 연미복을 떠올리면 이들의 의상은 파격 그 자체다. 이들에 이어 스웨덴 출신 지휘자 올로프 보만 (Olof Boman)이 펭귄을 떠올리는 네모난 턱시도에 복숭아뼈가 드러나는 댕강한 바지를 입고 앙증맞게 등장한다. 그들의 사전엔 클래식 하면 으레 떠오르는 ‘권위’라는 단어는 없어보인다. 이어서 울리는 헨델의 음악….
‘세멜레 워크’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패션쇼와 헨델의 오페라 ‘세멜레’(1743)가 합쳐진, 모든 상상을 뒤집은 종합예술이다. 관객은 카운터테너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릴 법한 위치에서 음악을 감상하고, 관객인 줄 알았던 옆 사람이 알고 보니 관객 중간중간에 흩어져 있던 비밀 합창단 요원이다. 오페라와 패션쇼를 넘나드는 꿈 같은 쇼가 80분간 펼쳐진다.
헨델의 음악이 홀에 울려 퍼지자 곧이어 패션모델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타조 털 머리 장식과 가부키 메이크업에 비비안 웨스트우드 특유의 드레스를 입고 있다. 모델들이 우아하게 긴 런웨이를 ‘캣워크’할 때 아무도 그 사이 소프라노 알렉산드라 자모이스카(Alexandra Za-
mojska)가 있을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가 노래를 시작할 때에야 비로서 관객은 ‘우리의 세멜레’를 알아본다. 그녀의 ‘영원한 기쁨, 영원한 사랑(Endless Pleasure, Endless Love)’이 끝나고 등장하는 벨기에 출신의 카운터테너 아르맹 그라메(Armin Gramer)는 헨델의 ‘당신이 걷는 곳마다(Where’er You Walk)’를 아름답게 부른다. 신의 세계로 왔음을 알리는 듯 주피터를 감싸고 워킹하던 ‘진짜 패션모델’들은 어느새 여신을 연상시키는 금과 은빛의 환상적인 드레스를 이미 바꿔 입고 있다. 그녀들의 워킹은 중성적인 소리에 맞추어 늦은 템포의 워킹으로 바뀐다. 다른 세상의 여신들처럼.
‘세멜레 워크’는 패션쇼이기에 아름다운 의상이 폭포처럼 시야를 덮는다. 하지만 단지 패션으로 국한하기엔 너무나 많은 요소들이 숨어있다. 독일의 쿤스트페스트슈필레 헤렌하우젠이 제작한 이 프로덕션은 개성 강한 예술가들의 서로의 철학과 예술적 근성을 고집스레 엮어 결코 단순치 않은 메시지를 담아 만든 쇼이다. 즉 총기획에 세계적인 명성의 기획자 루드거 엥겔스(Ludger Engels)가 있었다. 비주얼은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그녀의 오른팔 브리짓 스테푸티스(Brigitte Stepputtis, 비비안 웨스트우드 퀴트르 총책임자)가 맡았으며, 연주는 진보적인 칼레이도스코프 앙상블, 지휘는 스웨덴 출신의 ‘21세기 가장 흥미로운 지휘자’로 꼽히는 올로프 보만이 참여했다. 이 개성 강한 네 개의 주춧돌 위에 ‘세멜레 워크’가 쌓아 올려졌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이 흔치 않은 기회를 자신의 철학을 보여주는 데 십분 활용했다. 의상과 음악을 통해 자신이 결정적으로 기여한 펑크문화를 다시 공고히 했고, 동시에 오랫동안 참여해온 ‘기후 변화’ 관련 운동에까지 세멜레의 메시지를 연결시켰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1980년대 펑크음악을 대표하는 섹스피스톨 매니저의 파트너였고, 여성 음악가가 중심이 되는 펑크운동 및 펑크 패션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패션쇼 중간, 세멜레가 파멸에 이르는 장면에서는 1980년대 펑크음악을 대표하는 엑스레이 스펙스의 ‘속박은 집어치워(Oh Bondage Up Yours)’ 노래의 가사를 대사로 차용하고, ‘유리스믹스’의 히트 싱글 ‘달콤한 꿈(Sweet Dreams)’이 불린다. 마치 세멜레가 산화하는 듯한 이 장면은 기후 변화로 불타는 지구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메타포 같다. ‘세멜레 워크’에 등장하는 의상 또한 기후 변화 운동의 일환인 ‘정신차려(Get a Life)’ 콜렉션을 택했다.
헨델부터 유리스믹스까지, 바로크에서 펑크까지
패션과 연출 외에도 음악적인 면에서도 파격이 이어진다. 현대적인 즉흥곡을 지휘하는 것으로 유명한 올로프 보만은 직접 카레이도스코프 앙상블과 함께 ‘세멜레 워크’의 음악을 발전시켰다. 바로크 악기를 연주하다 말고, 무대로 갑자기 뛰어나와 지미 헨드릭스 스타일로 앰프를 이용해 강한 전자음을 연주할 때, 쇼 장은 아방가르드적 콘서트장으로 변한다. 푸르스름해진 조명은 날카로운 악기 비명 소리를 더 자극한다. 이 부분은 세멜레의 최후에 대한 복선이며, 동시에 세멜레가 받은 서약의 비극성을 고조하는 역할을 한다. 음악을 통해 패션쇼 런웨이의 아찔함과 신에게 도전하는 듯한 메시지를 함께 전달하면서 비극 속 카타르시스의 절정을 보여주는 예술작품이 탄생했다.
그렇다면 세멜레는 왜 파멸을 맡게 되는 것일까? 어떤 이야기이기에 헨델부터 오늘날의 천재적인 예술가들을 움직일 수 있었을까?
세멜레는 신화에 등장하는 ‘인간’이다. 주피터를 비밀스레 사랑한 세멜레는 자신의 결혼식 날에 한탄을 하고, 이를 본 주피터는 세멜레를 신의 세계로 데리고 간다. 주피터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욕심이 점점 커진 세멜레는 자신을 영생의 여신으로 만들어달라고, 주피터에게 제신의 제왕으로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조른다. 주피터는 자신이 최고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그 힘이 너무 강력해서 위험할 것이라 경고하지만, 세멜레는 이를 그대로 믿지 않는다. 결국 주피터를 졸라 그의 약속을 받아낸다.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는 주피터는 신의 최고 권위와 함께 다시 나타나고, 한낱 인간에 불과한 세멜레는 주피터의 신적 에너지에 몸이 불타버린다. 재로 변한 세멜레로부터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탄생했다.
‘세멜레 워크’는 이 줄거리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주피터의 등장 부분에서는 마치 영화에서 나오는 핵폭탄이 떨어지는 순간처럼 전 무대가 최고로 환하게 조명이 터지고, 다시 암흑이 흐른다. 그리고 굳어버린 세멜레를 등지고 주피터는 느릿느릿, 태양을 상징하는 듯한 불타는 불덩어리가 놓인 바퀴 달린 수레를 끌면서 반대편으로 걷는다. 그때 부르는 ‘달콤한 꿈’이 앞서 말한 유리스믹스의 히트곡이다.
“달콤한 꿈은 이것으로 만들어졌지.”
같은 곡에서 “난 세계 7대양을 여행하고 있어”라는 가사는 오대양과 천국ㆍ지옥을 상징했다는 평도 있다. 유리스믹스가 ‘선과 악’으로 구분된 당대의 이분법적 생각과 물질적인 삶을 조롱했듯이, 지금도 우리를 유혹하는 달콤한 꿈은 세멜레의 그것과 같은 허망한 꿈일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디오니소스적 무분별한 ‘넘침’은 결국 우리 사회에 대한 파괴를 일으킨다는 무거운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그를 이처럼 아름답게, 상징적으로 보여준 ‘세멜레 워크’는 그래서 또 한번 놀랍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인간의 전형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지닌 ‘시간을 거스르는 생존력’이다. 그리스 신화에, 로마시대 오비드의 시로, 헨델에 의해 다시 읽히는 세멜레의 이야기는 아직도 유효하다.
*통영국제음악제 ‘세멜레 워크’ 정보는 본지 56쪽 참조
글 김승민(런던 이스카이 컨템퍼러리 아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