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샤 코파친스카야의 버르토크·외트뵈시·리게티 바이올린 협주곡집

맨발의 피들러가 만든 음색의 향연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3월 1일 12:00 오전

매체 현실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음반은 더 보수적으로 내적 일관성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 개별 곡 단위로 음악을 듣는 음악 청취자들에게 왜 굳이 CD 한 장에 이런 곡들을 모아두었는지, 나아가 왜 이런 순서로 음악을 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강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기준에서 볼 때 이 음반은 언뜻 빗나간 컬렉션으로 보이기도 한다. 헝가리 출신의 작곡가들이 쓴 20세기 이후의 작품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세 작곡가의 스타일은 상당히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첫 번째 CD에 담긴 버르토크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과 외트뵈시의 ‘세븐’은 작품 자체만으로는 이음새를 찾기 어렵다. 버르토크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의 경우 작곡가 초기의 낭만주의적 향취(협주곡 1번에도 남아 있었던)를 없애고 현대적 음향을 드러내면서도 여전히 변주에 입각한 협주곡의 전통적 요소를 갖추고 있는 반면, 외트뵈시의 ‘세븐’은 즉흥성에 기대어 매우 급진적인 음향 실험으로 일관하는 작품이다. ‘세븐’은 2003년 우주왕복선 콜롬비아 호의 폭발로 생명을 잃은 일곱 명의 우주 비행사를 소재로 한 만큼 우주 공간에서나 들릴 듯한 사운드들이 몽환적으로 재현된다.

버르토크의 세속적 사운드를 고려할 때 ‘하늘과 땅’ 차이라 해도 좋을 만한 두 작품 사이의 간극을 신비스럽게 메우는 것이 파트리샤 코파친스카야의 파격적인 바이올린 연주다. 코파친스카야는 몰도바 출신으로, 앳되어보이는 얼굴 모습과는 달리 ‘맨발의 피들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그녀는 정식 연주회 무대에서 맨발로 연주한다) 거칠고 과감한 보잉을 선보인다. 악보에 충실한 정교한 해석과 깨끗한 음색을 추구하던 CD 음반 시대의 종말을 알리듯 코파친스카야의 바이올린은 버르토크의 첫 악장부터 야생의 활력을 불어넣는다. 저렇게 연주하면 바이올린 현이 끊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 만큼 거친 보잉을 하다가도 콧소리 나는 슬러로 여린 프레이즈들을 이어가는 모습은 그녀의 음악 스타일이 동유럽의 집시 연주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도록 해준다. 솔로 바이올린 음색 구사의 차원이 다르다고 할까. 그리하여 새로운 화법으로 그려진 버르토크의 협주곡이 외트뵈시의 ‘세븐’으로 이어질 때 놀랍게도 별다른 이질적 색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코파친스카야의 집시풍 바이올린이 버르토크와 외트뵈시의 작품 모두 헝가리의 음악적 전통을 공유하고 있음을 새삼스레 상기시켜준다.
물론 이 점은 직접 지휘봉을 잡은 외트뵈시가 빚어내는 탁월한 앙상블 효과 덕분이기도 하다. ‘세븐’의 마지막 악장에서 펼쳐지는 현기증 나는 음색의 향연은 두 번째 CD에 담긴 (30분이 채 안 되는 짧은 러닝타임으로 보너스 CD같은 느낌을 주는) 실내악풍의 리게티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다시금 부드럽게 이어진다. 외트뵈시와 앙상블 모데른의 든든한 지원 속에서 코파친스카야는 자신의 화려한 바이올린 음색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이토록 지극히 현대적인 음악 텍스처 속에서도 헝가리적 향취를 느끼게 만드는 것은 코파친스카야의 바이올린일까, 외트뵈시의 해석과 지휘일까. 아니면 리게티의 음악적 지향일까. 세 가지 모두가 정답이겠지만, 굳이 고르라면 나는 첫 번째 답을 택하겠다.

글 최유준(음악평론가)


▲ 파트리샤 코파친스카야(바이올린)/페테르 외트뵈시(지휘)/프랑크푸르트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모데른 앙상블
NaIve V 5285 (DDD)
★★★★★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