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창극까지 ‘서편제’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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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4월 1일 12:00 오전

영화부터 시작해 창극까지 이어진 ‘서편제’의 20년. 창극 ‘서편제’는 기존의 전통 판소리에 충실하다. 작품의 내용과 연결되는 전통판소리를 가져와 매우 곡진(曲盡)하게 채운다. ‘곡진하다’는 ‘매우 정성스럽다’ ‘매우 자세하고 간곡하다’는 뜻이다. 곡진이라는 한자 그대로, 노래(曲)를 통해서 극(極이자 劇)에 달하려 한다. ‘판소리’ 자체에 충실한 창극 ‘서편제’는 ‘창작’과 ‘전통’을 잘 병치시켰다고 할 수 있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음음 아라리가 났네.
창극 ‘서편제’는 남도민요 ‘진도아리랑’으로 시작한다. 영화 ‘서편제’에도 ‘진도아리랑’ 장면이 있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아버지 유봉 과 딸 송화, 그리고 아들 동호 세 주인공의 현실과 관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20년 전으로 돌아가자. 1993년 영화 ‘서편제’는 단성사에서 단관 상영했다. 한국 영화 최초로 서울에서 백 만이 넘는 관객이 이 영화를 봤다. 당시의 영화 흥행 역사상 최고 기록이다. 판소리를 소재로 한 영화에 이토록 많은 관객들이 호응을 하게 될 줄을 누가 예상했겠는가!
당시 ‘서편제’는 새로운 브랜드가 됐다. 이러한 비유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국악’은 오래되었다는 점에서 창고에 있는 ‘재고’인지 모른다. 반면 영화 ‘서편제’는 포장과 내용을 다르게 한 말 그대로 ‘신상’이었다. 당시 새로 개업한 노래방 이름이 ‘서편제’일 정도였으니, 그저 ‘국악’이라는 이름 속에서 존재했던 ‘판소리’를 온 국민이 알게 된 것이다.
OSMU(One Source Multi Use). 한 가지 텍스트(캐릭터)를 다중적으로 활용함을 말한다. 한국의 문화콘텐츠 관계자들이 즐겨 쓰는 말이다. ‘서편제’는 전통예술과 관련해 OSMU의 가장 좋은 예라고 하겠다.
영화 ‘서편제’는 이청준의 소설(1976)에서 출발했다. 1980년대, TV영화를 개척한 프로그램 KBS의 ‘TV문학관’을 기억하는가? ‘TV문학관’의 100회를 기념해서 만든 작품이 ‘소리의 빛’(1983)이다. ‘서편제’와 맥을 같이하는 작품이다. 김성녀(송화)·김종엽(유봉)이 주연이었고, 김홍종이 연출을 맡았다. 사실 ‘서편제’는 영화 이전에도 비슷한 영상물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유독 영화 ‘서편제’가 더 널리 알려졌을까? 영화라는 매체가 갖고 있는 힘 때문일까?
원래 ‘서편제’는 이청준의 같은 주제 연작 다섯 편 중 하나였다. 그 다섯 편을 아우르는 제목은 ‘남도사람’이었다. ‘소리의 빛’도 그 연작 중의 한 편, ‘서편제’도 그 연작 중의 한 편이다. 영화 ‘서편제’가 기획될 때, 원래 책 제목이기도 한 ‘남도사람’을 두고 고민하다가 ‘남도사람’은 지역성이 강하게 드러나 최종적으로 ‘서편제’를 선택했다고 한다. 영화 ‘서편제’가 인기를 끌자, 연작소설 ‘남도사람’의 제목도 뒤이어 ‘서편제’로 바꾼 일화가 있다.
이처럼 ‘서편제’는 신선한 작명이다. 국악이라고 하면 관심이 없을지라도 꽤 익숙한 것이라고 착각한다. 따라서 궁금증 역시 별반 없다. 이후의 한국 영화 ‘쉬리’나 ‘공동경비구역 JSA’가 그랬던 것처럼 ‘서편제’ 역시 생소한 이름으로 국악에 대한 궁금증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용어였다. 임권택 감독은 영화 ‘서편제’로 한국 영화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일본의 시사잡지 ‘아에라’에서는 오정해가 “한국 여성의 새로운 아이콘”이라고 크게 주목하기도 했다.
정부는 영화 ‘서편제’가 큰 흥행을 이룬 이듬해인 1994년을 ‘국악의 해’로 지정했다. 한 편의 영화가, 한 시대의 사회·문화적 합의를 이룩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악의 해’에는 판소리를 소재로 한 후속 영화로 ‘휘모리(이일목 감독)’를 제작하기도 했다.
영화 ‘서편제’가 국악 혹은 판소리에 대한 관심을 유발하는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래도록 국악(판소리)을 업으로 삼으면서 무대를 지켜오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상대적 박탈감’이나 ‘장르적 자괴감’도 갖게 했다. 자신들은 한평생 전통예술에 정진해왔음에도 그동안 사회적 관심을 크게 얻지 못했으나, 영화가 갖는 강력한 매체적인 힘으로 인해 국악(판소리)에 관심을 갖게 되는 현상은 오히려 당시 국악인들에게 장르적(예술적이 아닌) 한계와 소외감을 갖게 했다.
‘서편제’의 영향력은 전통예술의 ‘안’보다는 ‘밖’으로 더 큰 반향을 끼쳤다. 다른 장르의 예술인들이 판소리를 비롯해 국악에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국외에서도 한국의 전통예술에 대한 관심이 더 늘게 된 것이 사실이다. 유네스코에서 인류무형문화유산을 지정하기 시작했을 때, 한국의 ‘판소리’는 2003년에 비교적 일찍이 등재됐다. 서편제에 등장하는 ‘진도아리랑’은 지난해 ‘아리랑’으로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바 있다.
이야기를 ‘서편제’로 좁혀보자. 소설을 바탕으로 해서 드라마(1983), 영화(1993), 뮤지컬(2010)이 만들어졌고, 이제 창극 ‘서편제’가 무대에 올랐다.
이들은 소설이라는 문학적 텍스트에서 어떤 것을 취했을까? 임권택의 영화는 그의 작품이 대개 그렇듯 ‘시대’와 ‘사람’의 관계에 집중한다. 그는 한국의 근현대사적인 변화가 전통을 홀대, 내지 소외시켰다는 주제를 부각했다. 임권택 감독은 ‘길’을 강조했다. ‘서편제’ 이전의 ‘만다라’, ‘서편제’ 이후의 ‘취화선’이 그렇듯, ‘로드무비’의 형식을 강하게 드러낸다. 이는 ‘서편제’의 속편격인 ‘천년학’(2006)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길’을 키워드로 삼는 것은 뮤지컬 ‘서편제’도 마찬가지다. 이지나 연출의 뮤지컬 ‘서편제’는 국악 내부적인 변화에는 관심이 없다. 근현대사와 판소리를 병치시키는 것도 약하다. 송화는 전통음악(소리꾼)과 대중음악(로커)을 하는 이름 없는 소리꾼으로 전전하고, 동호는 이름난 로커로 성공한다. 뮤지컬 ‘서편제’는 무대 중앙의 원형회전무대와 한지로 만든 지전을 이용한 담의 좌우 이동을 통해 사람이 걷는 ‘길’과 소리를 찾는 ‘길’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윤호진 연출의 창극은 어떤가. 그는 ‘길’을 강조하지 않고 ‘시대’와 중첩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판소리’ 그 자체에 더욱 빠져들게 만든다. ‘길’을 대신해 ‘계절’의 변화를 더욱 드러내는 그의 연출은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는 봄·여름, 2부는 가을·겨울을 다룬다. 그것이 곧 인생의 ‘전반기’와 ‘후 반기’를 표현하고 있다. 주인공이 같이 지낸 시기와 따로 사는 시기로 구분되는 이 막의 1부에서는 어린 송화와 어린 동호의 이야기가 애틋하고, 2부에서는 젊은 송화와 젊은 동호, 그리고 노년의 송화를 찾아 나선 노년의 동호 이야기가 절절하게 다가온다.
모든 ‘서편제’를 관통하는 두 개의 노래 중 하나는 ‘진도아리랑’, 또 다른 곡은 단가 ‘사철가(이산저산)’다. 계절의 변화를 인생에 비유한 노래 ‘사철가’로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주인공의 구도를 가장 잘 풀어낸 작품은 창극 ‘서편제’다.

한(恨)·연(緣)·환(環)
영화·뮤지컬·창극에서의 가장 중심인물은 송화다. 영화에서는 송화와 유봉의 관계에 더욱 초점을 두고 있다면, 뮤지컬에선 송화와 동호의 관계에 관심을 모은다. 조광화가 쓴 뮤지컬 텍스트가 갖는 매력 중의 하나는 모성(母性)을 잘 드러낸다는 점이다. 송화(누나)가 동호(동생)를 챙기고, 동호가 송화에게 끌리는 저변에 모성이 존재한다. 뮤지컬이 내용적인 측면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동호를 낳아준 어머니의 존재감이다. 그녀는 짧게 등장하되, 깊게 각인된다. 뮤지컬 배우 정영주의 절제된 연기와 빼어난 가창력이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 돋게 만든다. 이를 시각적으로 잘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인연의 ‘끈’이다.
김명화가 쓴 창극에서는 실제적으로 네 명이 주인공이다. 송화와 동호, 유봉과 금산댁(동호모)은 모두가 ‘상처 입은 영혼’들이다. 창극에서의 금산댁(박애리 분)은 판소리를 하기보다는 구음(口音)을 부른다. 구음은 판소리의 선율을 따르되, 가사가 없는 노래다. 말로 할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를 소리로 풀어낸다는 느낌을 강하게 드러낸다. 동호의 아기 시절에 어머니가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영화에서의 금산댁은 거의 없는 인물과도 마찬가지다. 이 캐릭터를 뮤지컬에서 살려냈고, 창극은 더욱 강력한 존재감으로 부각시킨다.
이청준의 소설에서 김명곤의 시나리오가 강조한 것은 판소리에 내재된 ‘한(恨)’이다. 뮤지컬 넘버에 ‘끈’과 관련한 가사가 있는 것에서도 드러나듯 조광화의 뮤지컬 대본이 강조한 것은 ‘연(緣)’이자 ‘끈’이었다. 세 작품의 문학적 텍스트 가운데 김명화의 극본은 가장 단아하고 미학적이다. 영화는 계절이 매우 사실적임에 반해 창극은 사계절이 구상적이지 않다. 대신 비구상 내지 추상적으로 설정하며 계절의 순환과 인생의 순환을 이야기한다. 구체적인 삶은 다를지라도, 동호와 송화는 곧 유봉과 금산댁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유추하게도 만들어준다.
세 명의 ‘송화’가 등장하는 창극이 독특하다. 초년의 송화(봄·여름), 중년의 송화(가을), 말년의 송화(겨울)가 있다. 이는 계절과 그 순환을 배우(소리꾼)를 통해서 시각적이고도 청각적으로 드러내준다. 계절의 개념이 가고 또다시 오는 ‘순환’을 따르듯이, 창극 ‘서편제’는 한과 연과는 또 다른 환(環)을 미학적으로 잘 제시하고 있다.
이중 판소리를 가장 잘 살려낸 텍스트는 어떤 것일까? 단연 창극이다. 여기서의 ‘창극’은 분명 ‘창작 창극’이다. 그럼에도 작창(作唱)은 없다. 새로운 노래를 만들지 않은 창작 창극은 내가 알기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창극 ‘서편제’는 기존의 전통 판소리에 충실하다. 작품의 내용과 연결되는 전통판소리를 가져와 매우 곡진(曲盡)하게 채운다. ‘곡진하다’는 ‘매우 정성스럽다’ ‘매우 자세하고 간곡하다’는 뜻이다. 곡진이라는 한자 그대로, 노래(曲)를 통해서 극(極이자 劇)에 달하려 한다. 창극 서편제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창극 ‘서편제’는 유비(類比, analogy)를 잘 알고 있다. 지금까지 부분적으로 유비적 효과를 차용한 작품은 있었다. 반면 이 창극만큼 치밀하거나 처절하지는 못했다. 창극 ‘서편제’의 극적인 사실감이나 긴장감이 매우 격조가 있다. 그 이유는 바로 ‘판소리’ 자체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창작)창극’과 ‘(전통)판소리’를 잘 병치시켰다고 할 수 있다.
영화부터 시작해 창극까지 이어진 ‘서편제’의 20년. 그동안 우리문화도 알게 모르게 변화했다. 다행인 것은 ‘판소리’는 ‘서편제’의 덕분인지 뿌리가 든든하다는 사실이다. 영화 ‘서편제’에서 마지막 장면은 눈이 휘날리는 가운데 송화가 어디론가 다시 떠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의 배경음악은 명창 고(故) 김소희(1917~1995)의 구음이다. 소설가 이청준(1939~2008)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름, 그의 소설을 떠올리면 전라도 장흥의 갯벌이 함께 떠오른다.
2011년 뮤지컬 제작자인 조왕연은 ‘서편제’를 제작하면서 겪게 된 많은 심적 고통을 죽음으로 끝낸 것으로 알고 있다. 조왕연 대표의 죽음 후, 뮤지컬 ‘서편제’는 ‘더뮤지컬어워즈’에서 큰 상을 휩쓸었다. 나에게 조왕연은 영화 ‘서편제’의 유봉과 겹쳐진다. 이런 이가 있었으므로 대한민국 창작뮤지컬도 진정성의 뿌리가 내리고 있다.
‘서편제’의 대표적 뮤지컬 넘버 ‘살다보면, 살아진다’. 그가 남긴 작품 속의 노래야말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주문’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한편으로 ‘살다보면, 살아진다’는 곧 ‘판소리’ 자체의 삶(생존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한때는 사라질 위기에 있었던 판소리, 국악인들만의 전유물 같았던 판소리가 지금 세상에서 하나의 ‘소통’을 만들어내고 있다. 판소리는 이제 인류의 무형유산이자, 예술을 향한 작은 씨앗을 뿌리고 있지 않은가!
“살다보면, 살아진다.”

글 윤중강(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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