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택

지식인 광대의 시절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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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4월 1일 12:00 오전

그의 모든 작업은 현장과도 같은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시절을 그럴 법하게 그려내어 노래하는 임진택은 우리시대의 고여 있지 않은 진정한 광대다.

담시에 판소리를 입힌 ‘소리내력’
임진택은 문식(文識)과 시대를 보는 안목이 철저한 광대다. 그는 1969년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입학했다. 그가 대학에 다녔던 시대는 두 개의 경향이 병존하고 있었다. 하나는 군사독재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으로 캠퍼스의 분위기가 자못 숙연했고, 다른 하나는 탈춤과 마당극 같은 민중예술이 당대의 소모적 대중문화에 대한 대안이자 대학생들에게 하나의 교양으로 자리 잡았다. 임진택을 알기 위해 우리는 1960·1970년대의 사회적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0년대 성립한 군사독재는 1970년대에 이르러 그 폭력적 상황이 심해졌다. 1970년대 초반 김지하는 ‘오적’과 ‘비어’를 발표한다. 이 작품은 말 그대로 담시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군사독재에 대해 신랄한 풍자와 혹독한 비판, 그리고 비장한 저항의 정신이 담겨 있었다. 시는 까다로운 한자를 이용하여 쉽게 다가갈 수 없게 보이지만, 변조해 만든 한자의 본래 음을 확보하면서 읽어가노라면 일정하게 전통적 율격과 음보에 맞게 짜여 있어서 읽는 시라기보다 듣는 시라는 느낌이 강하다. 전편을 통해 부도덕한 지배층에 대한 풍자와 야유가 압도적이어서 당대 독자들은 이 작품의 통렬한 야유를 통해 일말의 후련한 정서를 공유했다. 김지하는 사상계에 발표한 ‘오적’으로 인해 필화사건을 겪게 된다.
김지하의 담시를 판소리로 창작한 사람이 바로 우리시대의 지식인 광대 임진택이다. 임진택은 1950년생으로, 서울대 외교학과 69학번이다. 판소리 광대이면서 문화운동가인 그는 1974년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으로 김지하·지학순 등과 함께 구속 수감되었다가 불기소 처분되어 풀려난 이력을 갖고 있다. 1970년대의 민족과 민중의 논의는 이와 같은 군사정권의 지배논리에 대한 대항논리로서 작용했으며, 민중문화운동과 일정하게 연관되었다. ‘판소리를 통한 사회 비판과 풍자’라는 표현에 걸맞게 창작판소리는 사회적 발언의 성격이 강한 쪽으로 창작 작업이 이루어졌다. 판소리의 한쪽 측면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 현상에 대한 적극적 항변을 창작판소리가 맡아서 수행해야 한다는 예술관이 강력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애초 형성기의 판소리가 맡았던 현실의 사실적 반영과 풍자라는 기능을 회복하고자 하는 정신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소리내력’은 30분 정도의 길이로, 1974년 12월 3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구속자 석방을 위한 기도회’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정식 무대에서 공연된 적은 없으나 임진택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택은 김지하의 시 ‘오적’과 ‘비어’의 율격에 끌려서 시들을 외우고 다녔고, 그것을 우리 전통적인 강창의 양식으로 공연하고자 하는 욕심을 가져왔다.
이 작품이 무대에 오르게 된 계기는 그가 1974년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으로 김지하·지학순 주교와 함께 구속되었던 사건에서 기인한다. 유신독재의 연장책으로 정권에서는 인혁당 사건·민청학련 사건 등을 만들어냈는데, 그 조작된 사건의 물줄기에 임진택도 끼어 있었다. 1974년 초여름에 그는 구치되어 있다가 법원으로 가는 호송차에서 김지하와 우연히 만나게 됐다. 그 버스 안에서 임진택은 이미 사형이 구형된 상태의 김지하에게 ‘소리내력’을 완성도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보겠노라 약속했다. ‘소리내력’에서 500년 구금형을 받은 안도라는 주인공과 사형이 구형되어 있는 김지하는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꼭 좋은 작품으로 만들어달라”는 김지하의 말이 임진택에게는 유언과도 같이 들렸다고 회고했다.
임진택은 구치소 안에서 함께 수감 중이던 이들 앞에서 김지하의 시 ‘비어’를 나름대로 율격을 갖춰 암송했는데, 본격적인 작품으로 만들어보라는 요청을 여러 차례 받았다고 한다. 그는 8월 불기소 처분으로 구치소에서 나오면서, 내내 이 작품을 어떻게 만들까 구상했다. 1974년 12월, 명동 카페 ‘떼아뜨르’에서 열린 정권진 선생의 ‘수궁가 감상회’에서 임진택은 판소리라는 장르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됐다. 그는 판소리적 양식을 선택해 ‘소리내력’을 다듬어서 12월 31일의 명동성당 공연에 참여했다.
‘소리내력’이 인기를 끌게 된 계기는 그 무렵 결성된 ‘민문협(민중문화운동협의회)’에서 돌린 성래운 선생의 시낭송 테이프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테이프의 앞면에는 성래운 교수가 낭송한 시들이 실려 있고, 뒷면에는 임진택의 ‘소리내력’이 복제되어 배포됐다. 이 테이프는 당대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침울한 시대의 정서에 위안이 되었다.

‘똥바다’ ‘오월광주’ ‘오적’
우리에게는 창작판소리의 대가로 알려진 임진택의 정통 판소리 공부는 실하고 단단하다. 그는 TBC TV의 프로듀서로 근무하던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정권진 명창 문하에서 정식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를 이수했다. 이와 같은 학습 경력이 그의 창작판소리의 단단한 내용과 함께 음악적 형식미를 갖춘 토양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임진택은 1985년부터 본격적인 소리꾼으로 활약한다. 그러나 그가 추구한 예술세계는 옛 판소리가 아닌 새로운 창작판소리 활동이었다.
‘똥바다’는 한 시간 정도의 길이로, 1985년 4월에 우리 마당에서 초연되었으며 주로 대학의 축제와 지역, 그리고 독일·일본·미국 등지에 초대돼 120회 이상을 공연하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작품이다. 특히 연대 노천극장 공연에서는 6천 명의 청중이 이 공연을 지켜봤다. 1984년 민문협 결성을 계기로 기왕의 ‘소리내력’에서 축적된 역량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풍자적 작품을 김지하·황석영·장선우·채희완 등과 함께 의논하면서 선정했다. 이 무렵부터 소리꾼 이규호가 임진택의 소리에 고수로 합류해 좋은 연주를 선보였는데, 판소리 애호가보다는 학생을 포함한 지식인이나 일반 청중에게 훨씬 강렬한 인상을 심었다. 해마다 50여 개 대학축제에서 이 공연이 이루어져, 하나의 증후군으로 자리 잡았던 시절이었다.
‘똥바다’는 김지하의 ‘분씨물어’를 토대로 삼아 판소리로 창작한 작품으로, 반일(反日)의 주제를 풍자로 다루고 있는데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대대로 조선 땅에서 똥 때문에 죽은 일본인 가문의 자손인 삼촌대라는 인물이 그 원수를 갚기 위해 잔뜩 먹기만 하고 똥을 참았다가 관광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입국한다. 그는 기생파티에서 실컷 먹고 놀아난 다음,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이순신 동상 위로 기어 올라가 참았던 똥을 내싸지르다가, 동상 위의 새똥을 밟고 미끄러져버린다. 그래서 동상 아래로 떨어지는데 그곳은 이미 자신이 싸놓은 똥으로 똥바다를 이루고 있어서 자신이 싼 똥에 자신이 빠져 죽는다는 이야기이다. 일본과 매판 지배층에 대한 풍자와 함께 한반도 전체가 똥바다에 빠져 몰살될지도 모른다는 무거운 주제가 깔려 있는 작품이었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오월광주’는 한 시간 반 정도의 길이로, 광주민주화운동 10주년을 기념해 임진택이 직접 사설을 쓰고 작창한 작품이라 1990년 5월 1일부터 광주에서 시작해 전주와 서울 등지의 무대에 올렸다. 공연의 총 횟수는 20회 정도였다. 임진택의 증언에 의하면 이 작품은 1989년 11월부터 작품 구상에 착수해 6개월 만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광주의 연희패에서 활약하던 윤상원과 박규선 등을 회상하는 것이 작품 창작에 큰 힘이 되었다고 회고했으며, 사설은 주로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홍희담이 정리한 ‘광주 민중항쟁 비망록’을 토대로 한 것이라고 한다.
광주의 비극적 사건을 구체적이면서도 개별적인 사연으로 녹여서 작품 안에 절규와 응축된 분노, 격정·비감·해학 등 판소리적 자질을 잘 드러내고 있는 빼어난 작품이다. 작품 전체 구성의 틀을 먼저 짜고, 소리 대목과 장단을 정한 다음, 사설과 작창을 동시에 진행해 6개월 정도의 작업을 통해 완성했다. 당시 유행하던 운동가요인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을 마치 삽입가요처럼 집어넣어 청중이 함께 부르도록 유도했다.
청중이 함께 숙연하게 행진곡을 불렀던 ‘오월광주’에는 국악가요 두 개가 들어 있다. ‘남도의 비’는 광주시민들이 도청을 탈환한 지 사흘째 되는 날, 비 내리는 시민궐기(蹶起)대회의 처연한 모습을 그려낸 노래다. ‘광주천’은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도청에 총공세를 감행해 시민군들이 하릴없이 전멸당하는 마지막 장면을 그려낸 곡이다. 서사적으로 흐르는 판소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서정적인 정서를 드러내는데, 특히 이 국악가요를 연주할 때는 대금과 해금이 함께 해 아련한 느낌을 증폭시켜준다.
임진택의 ‘오적’은 그의 첫 번째 창작판소리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1990년대에 완성됐다. 이 곡은 30분 정도의 길이로, 1993년 8월 학전에서 초연된 김지하의 시를 토대로 한 작품이다. 임진택은 1970년대 초반부터 입버릇처럼, “‘오적’ 만들고 싶어서 판소리 배운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는 이 작품에 가장 애착이 있지만 정작 판소리로 만드는 데 근원적 어려움을 지니고 있어 작업이 미루어졌다고 했다. 두려움의 하나는 장단 구성의 어려움이었고, 또 다른 두려움은 그가 ‘오적’을 판소리로 완성해 부르는 순간 자신이 어딘가로 잡혀가버리고, 끝내 공연은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는 상념이었다. 이 때문에 ‘오적’은 임진택에게 창작판소리라는 화두를 맨 처음에 던져준 작품이면서도 가장 나중에 완성됐다.
임진택이 시대를 노래하는 지식인 광대로 살면서 제작한 네 작품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청중에게서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그의 예술에 전폭적인 지지와 갈채를 보낸 청중은 판소리 애호층보다는 다른 층위의 청중이었다. 기왕의 판소리 애호가들은 그의 소리, 특히 성음에 대해 마뜩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하였다. 임진택이 이 작품을 광주에서 부를 때, 광주 청중의 반응은 시원찮았다고 임진택은 증언했다. 그는 1980년대 중반, 대학축제마다 초청을 받아 공연하는 유명한 창작판소리의 명창이 된다. 그의 예술을 애호하는 층이 두터워지면서 그 가운데서 판소리 창작에 관심을 갖게 되는 일군의 또랑광대들이 배출되는 등 그의 운동은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되고 있다.

마당을 재현하는 연출가
임진택은 이후에도 창작판소리 작업에 혼신을 다해 ‘백범김구’와 ‘남한산성’을 완성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판소리의 미학이 조금 더 원대해지고 원숙해지는 모습이 이 작품에서 보인다. 임진택은 전통시대의 극장인 마당을 어떤 방식으로 오늘 우리시대에 구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연출가이기도 하다. 그는 1985년 마당극전문극단 ‘연희광대패’를 창립해 판소리를 포함한 전통예술에 기반을 둔 마당극 운동을 수행했다. 그는 1997년, 과천세계마당극큰잔치의 예술감독을 맡아 축제를 총괄하는 큰 규모의 연출가로 우뚝 선다. 2000년에는 세계통과의례페스티벌의 집행위원장을, 2001년부터 6년 동안은 남양주·양평의 세계야외공연축제의 집행위원장을, 그리고 2002년에는 전주세계소리축제 총감독을 맡아 새로운 마당축제의 방향성을 모색했다. 2007년에는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에 주인공으로 출연해 임진택의 전통판소리 미학을 보여주기도 했다.
살펴본 것처럼 지식인 소리꾼 임진택이 만든 창작판소리는 모두 여섯 편이다. 김지하의 시 ‘비어’에서 한 부분을 떼어내 창작한 30분짜리 창작판소리 ‘소리내력’, 김지하의 시 ‘분씨물어(糞氏物語)’를 판소리로 만든 한 시간 분량의 공전의 히트작 ‘똥바다’, 그리고 김지하의 시 ‘오적’을 40분 창작판소리로 만든 임진택은 ‘오월 광주’는 1시간 20분 분량의 판소리를 만들기도 했다. 이후 2010년에는 두 시간 반짜리의 대하 판소리 ‘백범 김구’의 사설을 짓고 곡을 붙여 공연했다. 그리고 2011년에는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토대로 새롭게 사설을 구성해 두 시간짜리의 판소리로 완성해 공연했다. 조선 후기에 생겨난 판소리가 애초에 지녔던 문제의식을 회복해간다는 점에서, 임진택의 창작판소리 운동이 판소리에 대한 가장 진지한 모색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창작판소리는 우리의 삶을 일정하게 간섭하고 끼어드는 기능을 한다. 창작판소리를 통해 우리는 전통판소리의 모습을 다시 비추어본다. 상당히 세련된 형태로 존재하는 ‘춘향가’ ‘심청가’의 미의식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기회가 함께 이루어질 때 판소리로서의 자리매김이 온당하게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임진택은 민중문화운동협의회를 낳게 만든 장본인이자, 문화운동가이고, 판소리 광대이자 뛰어난 축제연출가이기도 한 임진택의 모든 작업은 현장과도 같은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시절을 그럴 법하게 그려내어 노래하는 그는 우리시대의 고여 있지 않은 진정한 광대다.

글 유영대(고려대 교수) 사진 노승환(www.rohsh.com)


▲ 김지하 창작판소리 1 ‘오적·소리내력’, 2 ‘똥바다’
김지하의 담시 ‘오적’과 ‘소리내력’ ‘분씨물어’를 임진택이 다듬고
작창해 담은 음반
(서울음반, 1994)


▲ 임진택 창작판소리 ‘5월 광주’
광주민주화운동을 그려낸 임진택의 판소리 음반
(서울음반,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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