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인의 명창을 만난 국문학자 유영대

소리로 쓰는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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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5월 1일 12:00 오전

나의 생각에 인문학은 해롭다. 그러나 그는 인문학은 해롭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문학을 사랑하고 있다. 우리 삶과 이야기에 녹아있는 진정한 인문학. 그것을 그는 사랑하고 있다. 그대들은 인문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멀찍이 떨어져서 관조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말들인가? 아니면 저 혼자 탐닉하고 싶은 구독의 서적 같은 것인가? 아니면 동경해야 하는 제 3세계의 언어인가. 그도 아니면, 요즘 같은 시대에 강요받아야 할 적용의 인용문인가. 도대체 인문학은 무엇인가.
그는 조선시대 후기에 살았던 고수관이라는 명창이 있었음을 회고한다. 물론 그에게 고수관은 책으로 만난 인물이다. 조선시대 명창으로 권삼득·송홍록·염계달은 유명하나 명창 고수관은 국악계에서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 그는 신이 나서 고수관 이야기를 했다. “고수관은 (좋은 의미의) 임기응변에 강해 평양감사 향연에 가도 ‘춘향가’ 가사 안에 그날 벽에 붙은 시구를 읊어 노래했던 명창이며, 기생점고 가사에도 그날의 기생 이름들을 넣어 불렀던 이다. 그의 곁에는 신위라는 학자가 있어 격이 없이 벗처럼 지냈다”라고. 마치 자신을 신위에 비유하듯.

우리 안에 인문학
우리는 도처에 있는 문학을 터부시할 때가 많다.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인문에 대한 정의가 모호하기에 혹자는 어떤 것도 읽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크고 작은 이야기는 곧 삶이자 역사이고, 미래다. 역사의 기류를 쫓아 인류(人流)의 작은 것 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관찰하는 학자가 있다. 바로 국문학자 유영대. 그가 만난 인문의 통로는 ‘판소리’다.
판소리에 담긴 담화를 넘어 그는 그 소리를 그려내고 있는 작가들을 기록한다. 여기서 작가란 소리꾼으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소리꾼에게서 그는 ‘인문’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는 ‘인문’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유영대 선생과의 대화 중에 남는 것은 이상하게도 ‘인문’이다. 단순히 그가 인문학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것도 부인할 수는 없는 문제다. 그러나 또 다른 차원의 것이 있다. 그것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유영대는 지난달까지 ‘객석’ 지면에 50인의 명창에 대해 소개했다. 소리꾼이 무어라고 그들의 생몰과 삶을 이토록 성실하게 기록할까. 유 교수에게 물어보면 일언한다. “그들의 삶과 노래는 기록이 절실하다”라고. 알면서도 ‘왜 그러느냐’ 다시 묻고 싶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 뻔하다. 오히려 동문서답을 할 것이다. “송순섭 선생은 마음으로 복속할 만한 어른이다”라고.
고려대학교에서 구비문학을 가르치고, 국립창극단 예술감독·판소리학회 회장·구례동편소리축제 추진위원장·서울시문화재위원 등을 역임한 그의 경험은 그도 인정한 바, 학계에서 바라보아도 이상한 사람에, 국악계에서 바라보아도 희한한 일이다.

예술사의 중허리에서
1956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유영대는 법을 전공하고 정치인을 꿈꾼 아버지 아래에서 비교적 부유하고, 엄중하게 자랐다. 그가 할머니 손을 잡고 남원 장에 가면 당시 굿·판소리·사도세자극 등이 걸지게 벌어지곤 했다. 당시 축음기나 음반을 파는 곳을 소리사라고 불렀는데, 남원의 소리사들에서는 주로 판소리를 틀었다. 중학교 때에는 수업 시간마다 박초월 명창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하는 ‘판소리 광’인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은 닐 테이프와 큰 카세트를 교실로 들고 와 학생들에게 박초월 명창의 소리를 들려주곤 했다. 어릴 적부터 오롯이 가슴으로 국악을 만난 그는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입학 후, 수업이 끝나면 민예극단을 오가며 연극제작 실습·판소리 수업·무가 연구 등의 수업을 들었다. 박사과정 중 전주 우석대학교로 부임한 그는 곳곳에 우리소리가 널린 전주 연구실에 앉아 국악인들을 자신의 수업 가운데 모셨다. 그들을 학생들과 만나게 하는 것은 말 그대로 구비문학과 고전문학의 살아있는 수업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 부임한 고려대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21세기부터’ 그는 그토록 흠모하고 사랑하던 고전의 현실세계의 중심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국립극장장이었던 신선희의 추천으로 그는 “학계의 업적에도 아무런 소용이 없고, 욕심도 없었던” 자리로 간다.
‘고수관은 딴전이라’는 속담이 있다. 소리꾼 고수관이 정해진 음을 바꿔서 다른 음으로 노래 부르는 것을 들어 하는 말이다. 마치 청년 유영대의 모습 같다. ‘딴말’이나 ‘딴소리’가 아닌, 국문학을 하는 학생이 민속예술, 민속학에 관심을 두었으니 유영대의 ‘딴행위’ ‘딴전’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이 ‘딴전’을 ‘진전(進 또는 眞의 의미의 진)’으로 역전시킨다.
그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을 맡았던 시절, 수성반주(노래의 선율을 따라 즉흥적으로 하는 반주)로만 음악을 구성했던 창극에 관현악을 도입하고, 극 내에 한국 무용을 부각시키기도 했으며, ‘산불’ 등의 근대문학을 엮어 창극으로 그려내기도 했다. 시대를 반영하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종류의 예술 혹은 문학이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때문에 당시 그가 감독을 맡았던 작품들의 앞에는 늘 ‘보편적인 음악극’이라는 슬로건이 붙었다. 전통적인 방식에 익숙하던 단원들은 당시 유 교수의 감독 체제에 적응하느라 애를 태워야 했다. 그토록 전통을 뒤져 해매고, 그 속에서 살기를 원하던 그에게 연출은 또 다른 작가론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급진적인 변화를 주려했던 창극과 더불어 그가 재임 기간 내 가장 심혈을 쏟고 애정을 가졌던 프로그램은 국립극장의 ‘완창 판소리’였다. 당시 400석 극장에 30명도 차지 않던 객석으로 운영되던 시절, 그는 ‘완창 판소리’를 판소리의 탄탄한 예술성으로 무장해 도심의 새로운 판소리 관객층을 만들었다. 판소리 본질을 살리고자 노력했던 그의 기획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가 쓰는 글
유영대 명창론에 소개된 인물들은 이 ‘완창 판소리’가 가능한 소리꾼들이다. 대개 4시간에서 12시간까지도 걸리는 판소리 완창을 제대로 해낼 줄 아는 사람만이 명창의 대열에 오른다. 유영대는 이 시대의 명창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객석’의 명창론에 기고한 유영대 글의 특징은 ‘객관성’이다. 인물의 생몰과(‘21세기 명창론’에서 ‘몰’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을 중심으로 그는 명창들을 기록했다. 명창론의 첫 시작은 자신이 겪은 명창과의 만남의 상황을 실감 나게 그려낸다. 독자로 하여금 마치 그곳에 함께 있음을 느끼게 할 정도다. 이어서 그는 명창의 절창 대목을 소개하는데, 이것이야말로 ‘21세기 명창론’에서 주목해야 할 한 부분이었다. 소리를 부를 줄 아는 소리꾼이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귀명창은 이 글을 읽으며 소릿 대목을 기억해낸다. 그리고 절창으로 꼽는 대목의 거론이야말로 소리꾼에 대한 진정한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명창이라 불릴 즈음이면 자신이 좋아하는 대목 한 구절씩이 있기 마련이다. 안숙선의 ‘쑥대머리’, 송순섭의 ‘새타령’, 이일주의 ‘심청이 물에 빠지는 대목’, 임진택의 ‘똥바다’처럼 말이다.
그의 명창론에서 이어지는 글은 명창들의 ‘소리 내력’이다. 이 대목에서는 이 시대 소리꾼들이 소리를 배우며 느낀 환희를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데, 이는 하나의 모습 같지만 음악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 예술가들의 ‘순간의 기쁨’과 ‘희망’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특히 글 안에서 만나는 옛 명창들의 ‘말법’이 재미있다. 언어의 재미가 숨어있는 명창론은 도심을 중심으로 언어가 표준화되고 있는 오늘 날, 그나마 남아 있는 구어의 특징을 기록할 수 있는 글이었다.
이어지는 글의 구성은 21세기 명창론에서 흔하고도 독특한 대목이다. 바로, ‘소리꾼들이 겪게 되는 사회와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다. 이 대목은 개인적으로 21세기 명창론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사회가 소리꾼에게 주고 있는 정신적인 억압과 횡포를 상세하게 기록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낮에는 소리를 배우고, 밤에는 카펫 청소하는 일을 하여 돈을 벌고”(남해웅) “퓨전그룹을 결성하여 리드 보컬로 활동”(민은경)하면서 음악을 했다는 이야기는 21세기이기에 더욱 대두되는 사건들이다.
그렇게 치열하게, 혹은 무던하게, 아니면 쉽게 싸워 다음의 단계로 오르는 명창들의 과정은 (그의 말에 의하면)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을 낸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그는 결코 미래를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철저히 ‘오늘’을 이야기 했다. 대상을 향한 감수성을 아주 가볍게 처리하는 면모를 그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이기 때문에 가능한 ‘글 안에 깃든 객관’, 그것을 향한 조심성은 다분하다. 그것은 아마도 강력하게 결론을 내리는 식의 사고가 가져오는 일방성의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으로 사려 된다. 때문에 그의 글은 미래를 말하고 있지 않지만, 독자는 글의 전체를 통해 앞으로 다가올 날을 그리게 된다. 한마디로 역사와 문학을 향한 철저한 그의 기록정신이 대상을 가장 대상답게 놓아두게 만든 것이다.
끝으로 그는 자신의 작업에서 노승환의 사진, 박성환의 연출, 이용탁의 음악을 빼놓지 않는다. 그들과의 협업으로 인해 자신의 연구가 가능하다고 했다. 물론 그들도 유영대의 기조 안에 존재하는 인물들일 것이다. 비로소 조선의 학자 ‘신위’가 떠오른다. 그들과 벗하며, 무엇을 끊임없이 써내려가고 만들어내는 작업. 그 중 ‘객석’과 함께 해온 ‘21세기 명창론’은 잠시 쉽표를 찍는다. 충전의 시간을 갖고 그는 다시 찾아올 것이다. 나는 서두에서 인문학은 해롭다고 말했던가. 이 시대 문화의 미시적인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유영대의 인문학은, ‘유영대인문학’은 해롭지 않다.

글 정우정 기자(wjj@) 사진 박진호(Studio BoB)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역임 2006~2011
구례동편소리축제 추진위원장 역임 2009~2010
서울시문화재위원 역임 2002~2009
현재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충청남도문화재위원·세종시문화재위원
창극 ‘십오세나 십육세 처녀’ ‘청’ ‘산불’ ‘로미오 줄리엣’ ‘몽유도원도’, 무용극 ‘풍속화첩’ ‘꽃신’ 등의 예술감독 혹은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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