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류에 물들어 있는 똑같은 소리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소리를 찾고 싶다. 천편일률적인 국악의 시김새와 목구성에 신물이 날 즈음 ‘이제는 어떤 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하는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국악에서 ‘큰 선생님’이라 이르는 그들에게는 ‘특유의 소리’ 색깔이 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음색이나 구성이 바로 자신의 이름을 만들어간다. 우리는 이를 ‘명창’이라고 이른다. ‘명창’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그의 목소리를 이름이리라. 우연히 그 어려운 이름, ‘명창’의 기질을 갖춘 사람을 찾았다.
지난 4월 19일 국립극장의 ‘박범훈의 소리연’ 공연이었다. 2부의 첫 곡 ‘신맞이’가 시작된 지 2분 20초 무렵,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국악관현악에 둘러싸인 채 무대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듯 소리는 아스라했다. 그러자 곧 중추신경이 모두 곧추 설 정도로 기가 막힌 귀곡성이 흘러나온다. 네 사람의 뒷소리와 80명의 국악관현악을 음정 하나로 이끌었던 그는 정말 울고 있었을까?
소리 외연의 확장이라는 말은 쓰고 싶지 않다. ‘외연’이라는 말 자체로 뭉뚱그리고, 가려버릴 수 있는 개념들이 많기 때문이다. 얼굴조차 잘 보이지 않는 흐릿한 기우 속에 선명한 목소리가 남았다. 이름은 전영랑이라고 했다. 그는 1983년생이다.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현재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연희과, 이화여대 대학원 한국음악과에서 공부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국악을 하는 이모 아래에서 경기민요를 익히고, 중요무형문화재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이춘희 선생께 민요를 공부하고도 대학은 연희과를 선택했다. 특이한 이력이다. 보통 경기소리를 공부한 학생들은 ‘민요 전공자’가 되는데 말이다.
“김덕수 선생님께서 무악을 공부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하셨어요. 보통 경기민요를 하는 사람들은 서울굿, 한양굿이라고도 하는 굿소리를 함께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저도 그렇게 배워야 하는 건가도 고민했었죠. 그러나 저는 조금 다른 길을 선택한 것 같아요.”
그가 말한 다른 길은 ‘목소리’ 그 자체였던 듯하다. 3분여의 짧은 노래에 음색을 배분하며 끌어갔던 그의 목소리를 상기하며 어떻게 만들어내는 것이냐 묻자,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해 듣고, 체크한단다. 간편한 대답이었지만,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많은 공정이 들어가는지 공감했다. 그는 어디 어느 지점에서 청중을 끌고, 자신을 끌어당길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해보였다.
“소리 자체에 매료되면 정신을 못 차리는 편이에요. 누군가 매력적인 소리를 발견했다 하면 저는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나, 어떤 과정을 겪었나부터 봐요. 밤새 찾아보고 분석하는 습관이 생긴 것 같아요. 셀린 디옹이나 비욘세가 좋아요. 그들의 감성을 따라갈 수가 없죠.”
이십 대 홍대에 가서 꽹과리를 들고 비나리를 하며 자주 놀았다는 그는 현대 사람들이 국악을 즐길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고 일축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잘 들려준 적이 없다는 자숙의 언어로 들리기도 한다. 제대로 하지 못하면 제대로 들려줄 수도 없고, 제대로 듣지 못하면 매력을 알지 못한다는 원리가 된다.
“대학 때 연희과에서 공부를 했던 덕분에 동해안 별신굿·진도 씻김굿 등 우리나라 원천적인 소리를 만날 기회가 많았어요. 그때 강의를 나오던 선생님들은 박병천·김정희 선생님 등 모두 한국의 전통 소리를 구가할 줄 아는 대가셨어요. 그분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됐던 것 같아요. 선생님들은 저희가 소리를 하면 늘 “네가 하는 게 맞다”며 격려해주셨어요. 장구나 북통 하나만 무릎 앞에 두고도 음을 가지고 멋을 부릴 줄 아는 분들이셨죠. 박병천 선생님은 장구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해주신 느낌이에요. 가령 오늘은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자 하면 그것이 곧 노래가 됐죠.”
판에 박힌 것을 좋아할 리 없어보이는 그의 표정에서 ‘음악’은 살아 움직였다. 대화 내 간간이 노래를 곁들이며 ‘소리’를 설명하는데, 성음이 보통이 아니다.
“저는 원래 음정이 굉장히 불안정한 사람이에요.” 소리꾼이 그러면 어떻게 노래를 하느냐 반문하자, “늘 잘한다 잘한다 듣다 보니, 잘하는 줄만 알았지 뭘 하고 있는지 몰랐죠. 공연을 다니기가 바빴어요. 그러다 어느 날 제 목소리를 ‘봤어요’. 음정은 하나도 맞지 않은 채 ‘필(feel)’만 가득했죠. 국악기는 모두 가공하지 않은 나무로 만들다 보니, 정확한 수치의 음정이 유지될 수가 없어요. 연주하며 점점 올라가기도 하고요. 그런데 재즈나 다른 장르의 음악과 만나니 이 부분이 부딪히는 거예요. 국악이라면 악기들이 맞춰주고, 또 제가 찾아갔을 문제이지만 음악이 그래서는 곤란하다 판단했죠.”
“무악 속에는 힘이 있어요. 음악을 잡아당기고 끌어내는 힘인데, 저는 그 부분이 좋았던 것 같아요.” 물론, 무악 속에 있는 미묘한 기운은 누구나 인정하는 부분이지만, 기존의 스승들이 그것을 무대화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도 보인다. 그것은 말로 설명하거나 음으로 교정하기 힘든 소통의 지점이 있다. 어쩌면 전영랑은 이러한 지점을 누구보다 명징하게 알고 있는 듯했다.
예민한 성격이 음악에 작용하니 어느 정도 효과를 이루는 것 같다며 자신의 목소리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그의 자세가 독특해보였다. 그것은 미성숙의 단계인 자아도취의 자세가 아닌, 자신의 목소리를 ‘갈고 닦는다’라는 의미가 적합할 것 같다.
“늘 선생님이나 친구들은 걱정해요. ‘선생님 목소리만 쫓아야 할 시간에’라고 말하죠. 그런데 저는 선생님 앞에만 서면 주눅이 드는 걸요. 그것은 선생님이 정말 위대하기 때문이에요. 그 근처에도 갈 수가 없어요.” 이미 자신이 좋아하는 목소리를 스스로 찾아내고, 만들어버린 그의 성음에 ‘비견’이라는 단어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그’라는 표현만이 적절하다.
국악에서 기대하는 스타성이라는 것은 어쩌면 ‘진짜 성음’으로 무장된 포장일지 모르겠다. 그것이 없다면 국악인들은 대중 밖으로 나오기 굉장히 곤란한 구조 속에 있다. 그들의 간격을 전영랑이 해결할 수 있지는 않을까 기대해본다. 그 이유는 그가 하는 소리는 틀에 박힌 민요도, 굿도 아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목소리 자체에 브랜드를 거는 시대에 국악이 나아가야 할 자세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는 전영랑의 기질을 억누를 수는 없어보인다. ‘목소리’만으로 승부를 건 게임에 승리하기를 바랄 뿐.
글 정우정 기자(wjj@) 사진 김효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