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일 점심. 서울 삼청동. 창이 큰 어느 카페. 바로 전날 금호아트홀에서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전곡을 연주한 피아니스트. 궁금한 게 많은 기자.
제 느낌에, 어제 첫 아리아는 바흐가 만졌던 건반악기, 마지막 아리아는 오늘 우리가 만지고 있는 건반악기였어요. 아주 천천히, 하프시코드에서 피아노로 이동하는 거죠. 25번 변주에서 저는 확신했어요.
그렇게 들으셨군요. 사실 바르디 선생님과 이 곡을 한 사람의 인생으로 보기로 했어요. ‘흐름’을 말하고 싶었죠. 마지막 아리아는 죽음, 회상으로 봐도 좋고요. 실제로 25변주에 제일 중점을 두었어요. 사실 각 변주가 사라반드, 폴로네즈… 다 댄스예요. 그러다 마지막에는 거의 베토벤처럼…. 악보 생긴 거만 봐도 그래요. 바흐 스스로도 뒤로 가면 갈수록 좀더 새로운 걸 시도했어요. 바흐답지 않게 완벽하지 않은 화성도 많이 나오고. 그런 점을 좀더 드러내고 싶었어요.
‘골드베르크’를 한다고 했을 때, 각각은 너무 짧은 변주인데 한 시간의 기승전결을 어떻게 만들지 엄청 궁금했어요.
일단 계획을 정말 많이 세웠어요. 변주 사이사이 시간까지 계산했어요. 몇 개는 아타카로 가고요. 이 곡 자체가 한번 런스루 하는 것도 힘들잖아요. 혼자 해보려고 해도 계속 막혀요. 오히려 현대곡보다 외우기 어려운 측면도 있죠. 작곡 당시는 암보로 연주하는 시대가 아니었으니까요.
첫 아리아 템포는 어떤 기준으로?
그것 때문에 너무 애를 먹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좀더 느리게 연주하는 것 같아요. 근데 제가 내린 결론은, 내가 편해야 한다. 느리게 했다가는 너무 숨이 막혀서 노래를 못할지도 몰라요. 이건 말 그대로 아리아고 사라반드예요. 평소에는 무대 위에서 쉽게 감정에 빠지는 편인데, 어제는 노래를 해도 최대한 끼 부리지 않고, 최대한 ‘진짜 멜로디’를 고집하고 싶었어요.
사실 최근 두 번의 독주회를 보고, ‘건반 앞에서 마냥 조심스러워하지는 않는 것 같다’라고 느꼈어요.
무대 위에서 연주가 많이 바뀌는 편이에요. 하고 싶은 걸 다 해요. 감성에 많이 치우치고요.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어요. 그래서 케머링 선생님이 많이 뭐라고 하셨어요. 무대에 올려놓으면 착한 학생처럼 친다고, 그게 너무 답답하셨나 봐요. 그런데 바르디 선생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애가 착한 거 같진 않은데, 웬 착한 척이냐. 무대 위에서는 솔직해도 된단다.” 하하. 사실 연습할 때는 굉장히 계획적으로 해요. 연습을 안 하더라도 피아노 앞에 앉아있어야 마음이 놓여요. 연습을 할 때는 최대한 감정적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요. 그래야 일 분이라도 더 칠 수 있으니까. 그러다가 결국엔 무대 위에서 저를 놓는 것 같아요. 틀린 음도 짚고 하는데, 그건 정말 ‘너무나’ 신경 쓰지 않아요. “연주가 너무 감정적이어서 완벽성이 떨어진다”라는 평도 가끔씩 듣죠. 근데 저는 완벽성보다 감정적이란 말이 더 좋아요.
하프시코드를 연주해본 적이 있나요?
학부 졸업 앞두고 2년 정도 공부했어요. 하프시코드로 나름 졸업연주까지 했으니까요.
1단 건반의 피아노로 2단 건반을 위해 쓰인 변주곡을 연주하는 어려움이 있죠.한 음을 동시에 두 손가락으로 눌렀을 때의 이상한 상실감 같은 것도 있고.
그뿐만 아니죠. 양팔을 교차해 연주할 때도 많잖아요. 이번 연주를 준비하면서 4월 중순인가, 정말 앞이 깜깜해서 ‘하프시코드도 배웠겠다, 하프시코드로 연주할까’라는 생각까지 했어요. 어떤 연주자들은 양팔 교차 부분을 교차하지 않고 칠 수 있도록 손을 바꾸기도 하는데, 전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21ㆍ22변주를 아타카로 연결한 것도 계산의 결과라고 했는데, 또 ‘나만의 계산’이라 할 만한 것은요?
끝마다 페르마타가 붙어 있어서 22번으로 넘어갈 때의 아타카도 나름 많이 고민했어요. 22번 변주 내내 우나 코르다 페달을 밟고 있었고요. 바로크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어디서 버릇없이”라고 할 텐데, 하프시코드도 버튼 하나 옮기면 한 옥타브가 더 추가되어 소리 나는 것처럼 왜 피아노는 변화를 주면 안 되지 싶었어요. 25변주, 그것만큼은 정말 특별해야 하기에 앞 뒤로 휴식이 길었어요.
25변주 들으면서 ‘아, 김다솔의 의도를 알겠다’ 싶어서 주변을 둘러봤죠. 객석의 반은 잠에 빠져 있고, 반은 충격에 빠져 있었어요.
‘골드베르크’는 사람이 많이 잘수록 성공한 연주라는 말이 있잖아요. 시프가 그랬어요. 다 재우는 게 목적이다.
연습 때 어떻게 런스루를 했나요?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어요. 대신 기차 안에 있거나 비행기 안에 있거나. 다행히 악보 자체를 좋아해요. 악보를 그냥 ‘뚫어져라’ 보는 게 취미예요. 특히 슈만은, 공부할 때 들여다보면 책 읽는 것보다 재미있어요. 베토벤은 들여다보지 않으면 칠 수가 없죠. 베토벤과 드뷔시는 너무 자세히 써놓았어요. 들여다보면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라는 생각이 들 만큼 자세하죠. 반면 슈만은 소설을 읽는 느낌이랄까요. 주제가 반복될 때마다 크레셴도의 위치가 미세하게 이동해 있고, 그런 거 보면 재미있어요. ‘골드베르크’를 외워서 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외워서 했는데 연주가 별로면, 그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악보를 안 보고 치고 있더라고요. 런스루는 공연 한 5일 전부터 매일 한 번씩 했어요. 녹음해서 들어보고. 바로크 음악은 실제로 들어보면 생각하는 것과 너무 달라요. 템포도 생각보다 다르게 느껴지고. 한국 오기 전에 친구들을 앉혀놓고 전곡을 쭉 쳐봤어요. 잠을 자도 서로 번갈아가면서 자라 하고요.
레슨도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선생님과 서로 시간 맞추기가 어려워서 한 번 만나면 여러 번 만나고, 아니면 스카이프로 얘기해요. 지난 4월 중순에 선생님께 5월 초에 ‘골드베르크’를 한다고 말씀드리니까, 왜 이제 말하느냐고 뭐라 하셨어요. “이게 만만한 곡이 아닌데” 이러시면서 “이 곡만큼은 연주하고 나면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 돼 있을 거니 열심히 해봐”라고 말씀해주시더군요. 신경이 정말 많이 쓰이셨는지, 며칠 후 자기 악보 전체를 사진으로 찍어서 메일로 보내주셨어요. 그걸 또 ‘뚫어져라’ 봤죠.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바흐는 언제 할 거냐고 자주 물어보는 편이에요. 비슷한 답을 들어요. 아직은 도전할 때가 아니다. 그런데 ‘골드베르크’를 덜컥 한다고 해서….
나중에 다시 하더라도 젊어서 한번은 해봐야 한다 생각했어요. ‘디아벨리’도 그렇고요.
바흐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요?
다른 작곡가들에 비해 훨씬 부담은 되는데, 지금 부담스러우면 나중엔 더 그럴 거라는 생각이에요.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말하는 ‘부담’이 정확히 어떤 거죠?
우선 표현하기가 너무 힘들고, 또 바로크는 이래야 한다, 바흐는 이래야 한다라는 사람들의 선입견도 작용하겠죠. 세뇌를 당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리고 언제부턴가 바흐가 너무 ‘콩쿠르 음악’이 되어버렸죠.
바르디 선생님 말씀처럼, ‘골드베르크’ 이후 정말 변할 것 같나요?
요 며칠 사이 겁이 없어졌어요. 실제로 ‘골드베르크’보다 큰 곡이 없는 것도 같고. 준비하면서 너무 고생을 해서 그런지, 이때까지 미뤄온 것들에 도전할 수 있겠다는 기분이에요.
글 박용완 기자(spir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