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계절이 오고 있다. 모든 생명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는 새로운 기운이 흘러 넘친다. 생명에 대한 자연스러운 감정을 두고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바이오필리아(biophilia)라고 말했다. 하지만 소리는 어떠한가. 눈에 보이는 꿈틀거림, 이미지나 상징 같은 언어적 요소가 없지만 소리는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그래서 신경의학자 올리버 색스는 자신에 저서 ‘뮤지코필리아(musicophilia)’에서 인간의 마음과 뇌에 작동하는 음악의 힘에 관해 이야기했다.
중학생 시절, 친구들은 팝송과 기타에 빠져 사춘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어리석게도 음악을 술이나 담배 피하듯 여겼으니, 학업에는 약간 도움이 되었을지언정 감성이나 친화력 면에서 꼴지를 면치 못하는 신세였다. 이후 우연찮게 음악을 듣기 시작하면서 당시의 내가 얼마나 불쌍한 존재였는지를 알게 됐다. 음악 소리에 어깨 한번 제대로 흔들 줄 모르는 인생이 얼마나 가련한가. 팝송조차 즐기지 않았던 시절엔 클래식 음악이 머릿속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소음이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그렇기에 오랜 세월 동안 나의 음악적 기억이란 풀 한 포기 자라기 어려운 사하라 사막과도 같았다. 최근 그 사막에 비를 내리게 해준 음악이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이었다.
출근 길, 어김없이 자동차 오디오의 FM 라디오 스위치를 누르니 익숙한 선율의 실내악 연주가 들려온다. 머릿속 모든 신경과 시냅스를 한껏 흥분시키며 쾌락 호르몬이라 불리는 도파민을 펑펑 쏟아지게 해주었던 연주. 늘 삭막하기만 했던 출근길에 나를 음악 본연의 감동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그 선율을 음미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은, ‘이 곡 제목이 뭐더라?’ 기억력 제로인 스스로를 탓하며, 재빨리 스마트폰 어플로 음악을 검색했다. 어플이 알려준 제목은 슈투트가르트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맙소사, 내가 며칠 전부터 차에서 듣고 있던 음반 아니던가. 내가 가진 음반이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것에 적잖은 자부심으로 음악의 볼륨을 높이려는 순간, 또 한 번 맙소사. 차에 울려 퍼진 음악은 FM 라디오에서 나온 것이 아닌 오디오 CD 플레이어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하라 사막 같은 나의 기억력을 다시금 원망해보지만, 그래도 그 덕에 모든 음악이 늘 새롭고 신선하게 들리는 것이 아니겠냐는 긍정의 위로로 마음을 달래본다.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음악이 선사하는 빗방울 같은 선율에 오늘도 나는, 메마르고 황량한 사막 같은 음악에 대한 기억을 다시금 촉촉히 적셔본다.
‘동그라미를 꺼내다’에서는 ‘내 생애 잊지 못할 음반’을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이번 호에는 백북스 대표이자 박성일한의원 원장인 박성일의 동그라미를 나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