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T(마이클 틸슨 토머스)가 굴삭기 지휘하는 것 봤어?” 식의, 클래식 음악계의 ‘진보적’ 뉴스만을 전하는 한 친구가 이번에도 신기한 영상을 들이밀었다. 웬 젊고 잘생긴 남자가 도심의 밤거리 한복판에서 피아노 건반을 섬세히 두드리자, 피아노는 마법 양탄자라도 된 듯 훌쩍 공중 부양하여 마천루를 비행한다. 영상의 제목은 ‘프란체스코 트리스타노 – 바흐케이지’. 바흐와 케이지, 있어보이는 두 이름의 조합으로 ‘또 한 명의 연예인 등장?’이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일찍이 면한 그는, 게다가 ‘도이치 그라모폰’ 소속이란다. 여전히 노란 문장의 힘(변별력이라기보다 힘)을 믿기에, 트리스타노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그런데 정작 정보의 보고가 되어야 할 유니버설 뮤직 한국지사는 그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했다. 사실 ‘메이저 레이블’에는 이미 너무 많은 ‘메이저’ 피아니스트가 존재하니까. 그래, 좀 지켜보자. ‘트리스타노’라는 책을 그리 쉽게 덮은 것이 2011년의 봄이다.
지난해 여름, 그의 깜짝 내한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룩셈부르크 수교 50주년을 기념하여 피아니스트 최유진과 금호아트홀에서 듀오 리사이틀을 열었다. 프로그램은 스카를라티와 프레스코발디로 구성했단다. 이 무대로 그의 본색이 다 드러나지는 않았으리라. 프란체스코 트리스타노는 1981년 룩셈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에 피아노를 시작했고, 흔히 예상할 수 있는 유망한 신예 피아니스트의 소년기를 지나왔다. 작은 특이점이라면 작곡을 병행한 것이다. 일반적인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의 면모, 그 이상을 펼치고 싶어 하는 면면은 콩쿠르 이력에서도 엿볼 수 있다. 2004년 오를레앙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현대음악의 최전선에 있는 바로 그 콩쿠르 말이다. 또한 ‘아주 젊은 피아니스트’로서는 드물게 바로크 음악에도 일찍이 본격적인 관심을 가져왔다. ‘뉴 바흐 플레이어스’라는 체임버 앙상블을 구성하여 바흐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녹음했다. 이뿐만 아니라 베리오ㆍ프레스코발디ㆍ자작곡 등 참으로 일반적이지 않은 레퍼토리들을 즐겨 연주하고 녹음했다. 밤에는 클럽에서 디제잉도 열심히 하면서.
앞서 소개한 ‘바흐케이지’는 유니버설 클래식ㆍ재즈와의 계약 후 내놓은 첫 결과물로 2011년 3월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을 달고 발매됐다. 이후 트리스타노는 이웃나라 일본에서 꾸준하고도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한편 두 번째 내한임에도, 도이치 그라모폰 아티스트임에도 우리에게 한없이 낯설다. 아직은 이 땅에서 ‘레어템’이다. 세상 모두가 다 아는 디자이너 브랜드의 국내 매장, 길에 널린 ‘10초 백’이 속속 팔려나가는 와중에도 어째 잘 팔리지 않는 ‘특이하고 요상한 가방’ 같은 존재다. 독자들께서, 그 비교 한번 참 상스럽다 하셔도 그의 존재를 꼭 이렇게 표현하고 싶었다. 좀더 강렬히 기억하도록.
지난 2년간 내 간헐적 관심이 대상이었고, 내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낯선, 희귀종의 프란체스코 트리스타노가 ‘저다운’ 프로그램으로 한국을 찾는다. 지난해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한 ‘롱 워크(Long Walk)’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롱 워크’는, 당대의 거장 북스테후데를 만나러 엄격한 직장(교회)에 ‘휴가계’를 내고 뤼베크로의 긴 여행을 떠났던 바흐의 발걸음을 뜻한다. 이번 내한에서는 앨범 수록곡인 북스테후데와 바흐의 음악들, 트리스타노의 창작 ‘프로덕션’ 등을 만날 수 있다. 전자음악적 요소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이르캄의 엔지니어 요하임 올라야가 한국으로의 ‘롱 워크’에 함께 한다.
이하 트리스타노와의 서면 인터뷰.
‘21세기 피아니스트’라는 특집을 준비하고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21세기 피아니스트가 어떤 사람들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생각을 대변하는지는 알고 있다. 나의 소박한 의견은 이러하다. 2013년, 즉 지금은 레퍼토리를 연주만 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새로운 피아니스트는 레퍼토리와 만나는 새로운 방법을 제안해야 한다. 지금껏 얼마나 많은 쇼팽 발라드가 녹음됐는가. 새로운 콘셉트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렇다고 내가 전통과 맞서는 건 아니다. 전통은 창의적인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클래식 음악은 과거에 관한 롤플레잉게임이 아니다. 살아있는 존재다.
21세기 피아니스트에게 도이치 그라모폰과 같은 ‘메이저 레이블’은 어떤 의미인가?
유니버설 뮤직/도이치 그라모폰과 계약했을 때, 나는 이미 열 개 음반을 녹음한 후였다. 내가 녹음하고 싶은 프로젝트의 독립성과 자유를 보장받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메이저 레이블과의 협업은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플랫폼이고, 매우 만족스럽다.
로절린 투렉의 마스터클래스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 혹은 바흐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면 살짝 알려달라.
마스터클래스 도중 잠깐의 만남이었고, 그녀는 머지않아 세상을 떠났다. 장식음과 음색에 관한 흥미로운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바흐에 관한 멋진 얘기라면, 그의 음악은 비어있는 캔버스와 같다는 것. 그 외에도 재미난 관점을 전해 들었는데, 모두 매우 개인적인 얘기들이다.
‘롱 워크’ 음반에서 사용한 피아노, 구체적으로 8번 트랙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아리아에 등장하는 피아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
오늘날 가장 멋진 악기인 야마하 CFX의 소리다. 총 18개 마이크의 조합으로 녹음했고, 앨범의 각 트랙은 각각의 기묘한 믹스를 거쳤다. 아리아는 피아노로부터 15미터 떨어진 거리의 룸마이크로 녹음했다. 그리고 한 쌍의 클로즈 마이크를 점진적으로 페이드인했다(보통 피아노 독주 녹음에서 클로즈 마이크는 해머와 현 가까이에 세팅한다. 그래서인지 트리스타노의 아리아는 처음엔 공간감을 느낄 수 있지만 “점진적 페이드인”이란 그의 말처럼 뒤로 갈 수록 금속성의 소리를 낸다). 바흐가 미래에 ‘헬로’라고 인사하면 어땠을까라는 의도였다.
최근 내가 본 어느 젊은 피아니스트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전곡 연주는 변주를 거듭할수록 점점 느려지고, 루바토가 많아지고, 페달링도 많아지고, 차츰 여유가 생겼다. 나는 25번 변주에 와서는 ‘이 피아니스트가 하프시코드에서 모던 피아노로, 건반악기의 진화를 표현했구나’라고 추측했다. 연주 후 그에게 물으니, 그의 대답은 조금 달랐다. 무슨 의도였을까? 정답은 이 질문지의 맨 끝(여기서는 본지 70쪽)에 있다.?
연주를 직접 듣지 않고 얘기만 들어서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바흐는 피아노를 위해 이 곡을 쓰지 않았다. ‘건반악기’를 위해 썼다. 그 음악이 하프시코드ㆍ클라비코드ㆍ오르간, 어떤 악기로 연주되든 소리의 본성은 바흐에게 이차적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나는 바흐의 작품을 피아노로 연주할 때, 가능한 대위법에 대한 예우를 표한다. 페달링 혹은 루바토의 폭넓은 활용이 방해가 될 수 있다. 피아노는 하프시코드보다 ‘더 나은’ 악기가 아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악기이다. (트리스타노는 질문에서의 “진화”라는 표현을 반박하고 싶어하는 듯하다.)
‘롱 워크’에 실린 북스테후데의 작품들에 ‘당신의 창작’은 어느 정도 들어갔나?
딱 여느 작곡가에게 주어진 만큼. 악보는, 말하자면 사용설명서다. 연주자는 그것을 해석해야 한다. 이전에 북스테후데의 음악이 피아노로 녹음된 적이 없었기에, 이 프로젝트는 정말이지 흥미진진했다. 그는 피아노를 본 적 없다. 발명되기도 전이니까.
어느 인터뷰에서 앨범에 수록된 자작곡 ‘롱 워크’는 “작곡이 아닌 프로덕션에 가깝다”라고 말했다.
‘롱 워크’의 시작점은 바흐의 기나긴 행진이었다. 북스테후데를 만나기 위해 걸었던 400킬로미터. 나는 ‘발자국’이라는 아이디어가 마음에 와 닿았다. 거리의 문제만이 아닌, 유산으로서 말이다. ‘롱 워크’는 전통에 대한 오마주라기보다 전통에 대한 업데이트를 제안한다. 이것은 21세기의 북스테후데, 21세기의 바흐, 그리고 21세기의 트리스타노이다. 나는 이 콘셉트로 지난 몇 년간 작업해왔다. 프로젝트가 무르익었을 때, 녹음을 하러 스튜디오로 향한 것이다.
북스테후데를 향한 바흐의 ‘긴 여정’에서 가장 동감할 수 있었던 부분은?
바흐는 당대의 살아있는 거장을 만나고 싶다고, 단독으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휴가를 내야 했고, 몇 주를, 어쩌면 몇 달을 걸었다. 그 자체가 놀랍다.
북스테후데는 자신의 딸과 결혼하면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이어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 바흐에게 제안했다. 당신이라면 받아들이겠는가?
우리사회는 다양한 메커니즘으로 발전되어간다.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살면서 이 정도의 강력한 유혹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전혀. 아주 조금이라도 비슷한 상황조차 겪어본 적 없다. 다행이지 뭔가.
최근의 가장 큰 고민은?
많은 프로젝트들. ‘롱 워크’ 리사이틀이 이어지고, 지금은 밴드 아우프강(Aufgang)과의 투어로도 바쁘다. 유럽 각지에서 나의 솔로 클럽 퍼포먼스도 계속되고.
스스로 멋지다고 생각하나?
내가 뭐라 할 게 아니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쿨하다’ 혹은 ‘위대하다’ 같은 느낌이 음악 작업의 동기부여가 될 수는 없다. 나는 피아니스트이고, 나는 일렉트로닉 음악을 하고, 그게 나다. (멋진 이미지는) 필요하지만, 간절히 원하고 욕망할 만큼은 아니다.
글 박용완 기자(spir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