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와의 인간적인 관계가 중요합니다.” “음악이 우선입니다.” 그의 말은 뜬구름 위를 떠다녔다. 말이 말을 낳고, 말이 현상을 낳고, 음악이 말을 통해 환상이 되는 순간, 말의 기세 속에서 음악은 어디에 있는가. 만프레트 아이허는 자신이 좇는 음악적 이상을 구름 위에 고이 올려둔 채 현대음악의 전경을 그려나가고 있었다. 8월 31일부터 11월 3일까지,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글 김여항 객원기자
ECM 전시회 오픈 하루 전날, 만프레트 아이허가 내한했다. 그는 전야제인 ECM 나이트, 아이허가 들려주는 음악감상회, ‘ECM과 고다르’ 영화제에서의 좌담, 그리고 기자간담회까지 총 4일간 공식 일정을 가졌다. 그의 일정을 따라가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아이허는 말을 아끼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기어이 에둘러서 결국엔 본질만을 이야기했다. 그에게 있어 음악은 추상 안에 있는 듯보였다. 하지만 아티스트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녹음 세션, 그리고 앨범 커버를 작업하는 과정까지 그의 작업은 엄청나게 치밀하고 꼼꼼했다. “아티스트를 믿는다”는 두루뭉술한 원칙 아래에는 깐깐한 제작자라는 현실적인 인물이 있었다. 1,400여 장의 앨범을 제작해온 그 구체성은 제거하고 아이허는 그가 모은 현대음악의 풍경만을 이상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이상을 현실화하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저 멀리 구름 위에 올려둔 이상은, 그가 말하는 현대음악은 구름 위에 실제로 존재할 수 있었다.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라는 제목을 가진 ECM 전시회는 네 개 층에 걸쳐 각각의 주제를 가진다. 아이허가 제시한 몇 가지 말들을 주워 삼아 4층으로 구성된 전시회를 글로 구성해보고자 한다.
새로운 시작
전시회는 지하 4층에서 시작한다. 연도별로 길게 늘어진 앨범 커버 사진들은 지하 1층까지 뚫려 있는 벽을 타고 위로 올라간다. 여기가 만프레트 아이허, 그리고 ECM을 처음 만나는 지점이다. ECM의 음악을 이미지로 먼저 접하면서, 한 편에 널찍하게 자리 잡은 소파에 앉아 대표 음반들을 담은 MP3 플레이어를 재생하면서 ECM의 음악세계를 한 손 위에 올려두고 이리저리 굴려볼 수 있다. 이 공간에서 아이허가 소개하고 싶은 음악들을 집중 감상하는 음악 감상회(8월 31일)가 열렸다. 그는 포기와 미련 사이에 애매하게 존재하는 어느 음악학도, 혹은 그냥 음악 애호가의 질문을 받았다. “저와 같이 음악적 재능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재능을 발견해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아이허는 대답했다. “여기에 와서 ECM의 음악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음악적 재능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이허는 자신의 음악 철학을 잘 듣는 것, 경청의 예술을 깨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예술 행위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만남의 광장 같은 라운지를 지나면 아이허가 새로운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잘 들음으로써 ECM의 역사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그 시작의 순간이 전시되고 있다. 록과 솔의 시대가 도래하며 재즈 음반이 설 곳이 점차 줄어들던 1960년 후반, 아이허는 소규모 레이블을 인수하여 ECM을 창립했다. 레이블 초기부터 함께해오며 ECM을 대표하는 아티스트가 된 키스 재럿의 작업을 사진 및 영상과 함께 보여주는 복도를 따라가면 17개의 기둥이 나타난다. 각각의 기둥은 ECM을 재즈의 명가로 만들어준 초기 재즈 명인들의 작품을 소개한다. 얀 가바렉·칙 코리아·팻 메스니·폴 블레이 등이 그들이다. 아이허는 어떤 음악을 듣고 싶은지에 대한 자신의 직관에 확신을 가지고 연주자들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재즈 연주자들은 자신의 음악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 잘 팔리는 ‘소리’ 대신 음악 그 자체를 담아주는 장소로 모여들었다. 다양한 소리를 듣게 되는 ECM의 미래를 가늠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에디션 오브 컨템퍼러리 뮤직
여러 음악을 발굴하며 영역을 확장해온 ECM의 현대음악 여정을 볼 수 있는 곳. ECM의 뉴 시리즈를 연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세계를 소개하며 지하 3층이 시작된다. 여기는 ECM, 즉 에디션 오브 컨템퍼러리 뮤직을 정의하는 곳이다.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은 “ECM 음반에서 드러나는 급진적이고 엄격한 해석, 소리의 공간적 깊이, 반복과 변주라는 패턴의 순수함, 시대를 초월한 영원함을 보여준다”는 문구로 전시장이 열린다. ECM의 ‘뉴 시리즈’는 1984년 패르트의 ‘타불라 라사’로 시작해 재즈를 넘어 영화음악, 무대음악, 시 음악에 이르기까지 그 장르를 확장시켜나갔다. 한편으로는 월드뮤직이라 일컬어지는 전 세계의 음악, 심지어 대중음악이라는 범주에서 좀처럼 분리될 줄 몰랐던 소위 일렉트로닉 음악의 DJ들까지 만나왔다.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음악을 꿈꾼다”는 아이허의 말은 사실 아직은 기성화되지 않은 음악과의 만남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자신을 그 자리에 둔 채 자신이 아닌 대상과 만나게 하는 존재, 그래서 달라진 나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곧 동시대 음악인 것이다.
아이허는 전 세계를 유랑한다. 고유의 정체성을 가진 음악을 가장 잘 만날 수 있는 곳, 그 음악이 가장 자신 스스로가 되는 곳을 찾기 위해서다. 그렇게 여행하면서 그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작업들을 진행했다. 지하 3층 전시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스티브 라이히·아르보 패르트·발렌틴 실베스트로프·죄르지 쿠르타그·기아 칸첼리의 작품, 그리고 킴 카쉬카시안과 언드라스 시프의 연주 작업들을 볼 수 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작곡가이자 무대 연출가인 하이너 괴벨스, 작곡가이자 안무가, 영화감독이기도 한 메러디스 몽크, 영화감독 장뤼크 고다르, 그리고 영화음악가 엘레니 카레인드루와 함께 한 협업의 결과물이 각기 한 공간씩 차지하고 있다. 음악이 먼저, 이미지가 먼저. 우리의 감각은 무엇에 지배당하는지를 순간순간 판별하고자 하지만 음악이 이미지를 전복하고, 이미지가 음악을 전복하는 뒤엉킴 속에 어느새 그 판별은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한 발짝 더 옮기면 우리는 또 다른 문화와 만난다. ‘어크로스 컬처’ 섹션에서는 디노 살루치·에그베르투 지스몬티·슈테판 미쿠스 등 우리가 흔히 월드뮤직으로 불러온 뮤지션들의 음악세계가 고유의 정경을 담은 채 소개된다. 아이허는 음악 행위는 곧 문화를 담는 것이라고 보면서 이를 “자신을 주변으로 위치해놓고 다른 문화와 접해봄으로써 숨겨져 있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월드뮤직을 펼쳐놓은 섹션에서 한국의 민요를 부른 신예원의 앨범을 발견하며 낯선 자아가 아닌, ‘원래 우리음악’을 만나게 되는 건 ECM이 보여주는 역설이다.
풍경과 마음
ECM을 그림으로 떠올리게 만드는 ECM만의 대표 이미지가 있다. 고요하고 적막한 풍경, 형체를 알 수 없는 사물들, 호수, 구름, 바람과 같은 형상들이 그것이다. 지하 2층은 음악이 이미지와 맺는 관계, 그리고 음악과 이미지가 우리와 맺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음악은 음악 그 자체일 뿐, ECM의 앨범 커버에 담긴 이미지는 음악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음악이 완성되고 나면 어떻게 포장할 것인지 말하며 떠오르는 이미지를 끄집어내는데, 때로는 음악이 주는 이미지와 반대로 커버가 쓰일 때도 있다. 내용을 드러낼 수도, 또는 내용과 충돌할 수도 있으나 그건 그다지 중요치 않다. 음악과 이미지가 만나 우리에게 선사하는 재구성된 감각의 세계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 공간에서는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다. 토마스 분슈·자샤 클라이스·페터 노이서 등 ECM과 오래 작업해온 작가들의 작업을 중심으로 ECM의 음악세계를 재편해서 보여주고, 한편에서는 앨범 커버에는 담을 수 없었던 풍경을 영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깊숙한 곳에는 아늑한 지하 4층의 음악 감상 공간과는 또 다른, 심각하게 음악을 만날 수 있는 암실이 있다. 다른 감각으로 음악을 체험하고 싶다면 놓치기 아까운 곳이다.
음악과 이미지를 다루는 법은 장뤼크 고다르와의 작업을 소개하면서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아이허는 고다르에게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고다르의 영화는 음악이 먼저 나와 이미지를 소개한다고 아이허는 설명한다. 내용보다 음악이 먼저 놓일 정도로 사운드와의 관계를 긴밀하게 여긴 고다르의 작품세계에서 아이허는 영화와 음악, 또는 이미지와 음악이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지점을 발견한다. 무려 5년 동안 아이허를 쫓으며 그가 세계 곳곳에서 작업하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사운즈 앤 사일런스&rs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