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기엔 케라스

불멸의 이상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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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11월 1일 12:00 오전

첼리스트 장 기엔 케라스의 엘가 협주곡을 꺼내 들었다. 세상을 어느 정도 살아본 중년의 성숙함, 날카롭고 설득력 있는 해석과 언제 어느 순간에도 빛을 잃지 않는 시적인 첼로의 소리는 놀라운 조합을 이루며 듣는 이를 단번에 사로잡는다. 슬픔과 비통함, 고뇌와 통곡, 한탄…, 마치 첼로가 인간의 몸을 획득한 듯, 육성을 듣는 듯 통곡이 전해진다. 이 목소리는 우리의 존재 안팎을 동시에 울린다. 마치 피부 위에 새겨진 오래된 상처와 그 상처를 남기고 지나간 고통스러운 육체의 기억을 영원히 잊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등 부상으로 3개월간 무대를 떠났던 그가 베를린의 콘체르트하우스에서 드레스덴 필하모닉과 미하엘 잔덜링의 지휘로 드보르자크 협주곡을 연주하며 성공적인 복귀를 알렸다. 여전히 섬세한 시적 감수성에 강인함을 더해 돌아온 그를 베를린과 파리에서 만났다.

글 김나희(파리 통신원) 사진 Marco Borggreve

다쳤던 팔과 등은 이제 괜찮은가. 3개월간의 공백을 깨고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아무 문제 없다. 드보르자크를 성공적으로 연주할 수 있다는 건 모든 레퍼토리들을 다 해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곧 피아니스트 알렉산드르 멜니코프와의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 녹음을 앞두고 있고, 그동안 취소했던 실내악 활동을 포함한 적지 않은 수의 연주들을 소화해낼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회복되었다.

부상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해도 괜찮은가. 연주자들 사이에서는 설령 건강상 문제가 생기더라도 공개하기를 꺼리는 듯하던데.
쉬쉬하더라도 예정된 공연을 취소하면서 소문은 다 나게 마련이다. 홈페이지에도 일부러 직접 작성한 메시지를 올렸다. 음악은 기계가 아닌 피와 살로 된 인간이 연주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어째서 부상을 부끄러워하고 숨겨야 하는지, 나는 터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첼리스트가 3개월간 첼로를 연주할 수 없는 상황. 무척 괴로운 일이었을 듯하다.
지난 3개월이 고통만으로 얼룩졌던 건 아니다.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연주 여행을 다니느라 챙기지 못했던 가족, 친구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이제 마흔여섯에 이른 내 인생에 대해, 흔히 말하는 중년에 도달한 삶을 복기하는 시간이었다. 이런 휴식이 필요했다고 어쩌면 몸이 먼저 반응을 보였던 걸지도. 아홉 살에 첼로를 시작한 후 단 하루도 첼로를 진심을 다해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늘 존재하는 것이 첼로이고, 첼로와 함께 있을 때에만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내가 첼로를 연주하기 때문에, 음악으로만, 첼로로만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지점에 우리가 같이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첼로를 ‘연인’이라 지칭하고 싶지는 않다. 연인이란 단어가 불멸 혹은 영원의 이미지를 채워줄 수는 없다. 사랑이 끝나버리면 연인이라는 단어는 무의미해진다.

베토벤은 ‘불멸의 연인’에게 영원한 사랑을 고백했다. 첼로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여기에 비할 수 있는가.
앞서도 말했지만, 단 한 번도 첼로를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다. 오직 첼로와 함께여야만 가능한 미래를 꿈꾸기도 한다. 첼로와 함께이므로 나는 수세기 전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의미 있는 무엇이 된다. 이만큼 나이가 먹고 보니 사랑만 하며 살기에도 인생이 짧은 것 같다. 내 사랑은 이토록 깊어서, 나는 첼로와 함께 불멸을 꿈꾸고 영원으로 남기를 간절히 바란다.

쇼스타코비치·엘가·드보르자크는 스타일이 전혀 다른 작곡가들이다. 당신의 레퍼토리는 폭이 넓고, 불과 며칠 간격을 두고 전혀 다른 곡들을 연주하기도 한다. 어떻게 매번 작곡가가 의도한 곡의 심장에 다다르는가?
연주자로 산다는 건 음악을 사랑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작곡가의 세계 속으로 잠영하듯 들어가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다. 누군가를 정말로 온전하게 아는 것, 가장 깊은 내면까지 들어가서 알아가는 과정이므로 우주를 경험하게 된다.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의심이 들 때도 많다. 한 사람을 깊이, 그가 지닌 세계를 이해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직관만으로 음악만으로 작곡가에게 접근하는 방식도 가능하지만, 작곡가가 어떻게 화음을 사용하는지, 그가 기본으로 두고 있는 악기는 무엇인지, 혹은 악기 없이 곡을 쓰는지, 어떤 문화적 토양에서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버르토크는 헝가리의 민속음악과 바흐의 정제된 음악을 결합시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환상적인 일인지 모른다. 만약 한 작곡가에 대해 충분히 탐구할 만한 시간이 없다면 무대 위에 그저 직관을 가지고 올라가는 수밖에. 지금이야 어느 정도 작곡가들의 언어를 알게 되었지만 더 젊었을 때에는 그저 나 자신을 한껏 열어젖히고, 음악에 가까워지고자 애쓰는 수밖에 없었다. 음악가들에 대해, 그들의 삶과 언어와 또 그것에서 비롯된 문화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그저 악보에 적힌 음표에 생명을 불어넣겠다, 내 악기를 품에 안고 무대에서 순간을 살고 내려오겠다… 이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음악적 직관, 본능적인 감각만을 가지고 무대에 올라가도 만족할 만한 연주를 할 수 있었나.
물론 직관과 감각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런 연주는 마치 영속성을 가지지 못한 순간의 반짝임과도 같다. 연주자는 곡 전체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우리가 이성과 감각을 모두 지닌 존재인 것처럼, 음악에 접근하는 데에도 두 측면 모두 필요하다. 음악의 순간 속에서 숨 쉬는 것은 물론, 노력을 더해 음악적 깊이를 갖춰야 비로소 완전해진다. 물론 한 작곡가의 생애를 아는 것이 언제나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슈베르트를 예로 들어본다면, 매독에 걸려 고작 서른한 살에 세상을 떠났고, 친구들과 모여 밤이 지새도록 즉흥연주를 즐겼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건 그의 가곡을 듣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실러·괴테·하이네·뮐러와 같은 시인들의 시에 영감을 받아 음악을 결합시켰다. 그의 가곡에서 시어와 화음 사이의 그 미묘한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슈베르트 음악의 핵심을 이룬다. 단어가 바뀌는 순간, 화음 역시 장조에서 단조로, 그 시어의 의미를 따라간다. 슈베르트의 가곡을 듣고 난 뒤라면 우리는 첼로를 켜는 게 아니라 마치 시어를 전달하듯, 가곡을 부르는 성악가처럼 노래할 수 있다. 베토벤을 연주할 때에는 그가 언제나 교향곡을 염두에 두고 곡을 썼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첼로 소나타이지만 종종 프레임의 전환이 교향곡의 그것처럼 일어난다. 베토벤의 교향곡을 이해한 후 그의 첼로 소나타를 연주하면 온전히 둘이서, 피아노와 합일된 연주를 할 수 있다. 혼자가 아니라.

프라이부르크 음대에서 제자를 양성해내는 교수로도 맹활약 중이다. 당신은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을 거쳐 서른이 넘어 솔리스트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른 나이에 데뷔하여 신동으로 주목받는 방식이 아니었다. 연주자로서 꿈을 가진 학생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나 멀리 보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즉 음악의 전체를 느끼라는 것이다. 대부분 반주자와 함께 클래스에 와서 첼로만 켜나가기에도 급급하다. 첼로가 요구하는 테크닉적 수준이 얼마나 높은가. 왼손으로는 지판을 짚어야 하고 오른손으로는 활을 조절하며 소리를 빚어내야 하는데, 그것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해내는 것만 해도 엄청난 노력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반면 거기에 쫓겨서 음악의 전체적인 그림을 보지 못한다. 화분에 담긴 꽃을 상상해보면, 꽃잎의 화려한 색, 풍겨나는 향기, 꽃술에 묻어 있는 꽃가루와 잎사귀와 줄기의 싱싱한 초록이 과연 전부일까? 그렇지 않다. 화분에 담긴 흙, 그 아래로 뻗어나간 뿌리, 외부적으로 꽃에 와 닿는 햇빛과 바람까지 음악 안에 다 들어있다. 화분 속으로 들어가서 뿌리부터 거슬러 올라가 꽃잎의 최후 세포에까지 이르는 물을 상상해보자. 피상적인 연주를 위한 손놀림이 아니라 음악을 한다는 건 한 송이 꽃의 생명력을 유지시켜주는 물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음악이론에 대한 기초 지식을 튼튼히 하는 것 역시 필수적이다. 특히 화성에 대한 이해를 높여야 음악을 관통하는 시선을 갖출 수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신의 파트가, 멜로디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알고 있다. 스스로 노래를 불러보거나 수평적인 진행을 체화하면서 가능해진다. 하지만 수직적인 측면, 음들이 어떻게 울리는지를 고민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음악원에서 기초 음악이론을 다 배우지만 이론 수업으로 그칠 뿐, 자신이 연주하고 있는 곡에 적용시키지 못한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협주곡이나 소나타를 연주할 때에도 자신의 파트에만 급급해 피아니스트에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 당연히 피아노와 자신의 악기가 만나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지 듣지 못한다. 그런 학생이 오케스트라와 만나 협연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협주곡을 언제나 오케스트라 총보 버전으로 먼저 본다. 그래야 음악을 전체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은숙의 첼로 협주곡을 아주 많이 좋아하고, 주저 없이 우리시대의 가장 뛰어난 첼로 협주곡의 걸작이라고 했다. 언젠가 당신은 나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나는 첫 음, 즉 하프의 G#음에 이미 온 마음을 빼앗겼다.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신비한 아득함이 묻어 있는 그 소리에서 이미 진은숙의 첼로 협주곡은 스스로가 걸작이라는 징표를 달고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오는, 신을 상징하는 커다란 비석을 기억하나? 나에게는 이 하프의 첫 음이 바로 그랬다. 이 첫 음을 이어받아 그 이후로 진행되는 오케스트라에서 우리는 걸작의 풍모를 감지해낼 수 있다. 하나의 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보통은 화음의 한 음이다. 그리고 이 음은 어딘가로 향한다.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가? 이것이 우리의 화두이다. 첼로가 연주하는 첫 음이 어딘가에서 뚝 떨어진 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피아노의 반주를 통해 존재했던 음이라는 것, 우리는 그 음을 다시 첼로로 재현시키면서 음악의 결을 더해나간다는 걸 이해하는 순간, 음악을 바라보는 시선이 통째로 바뀐다. 베토벤 첼로 소나타 3번을 연주하는 요요 마를 예로 들어보자. 나는 요요 마의 엄청난 팬인데 그가 얼마나 열려 있고 넉넉하며 풍요로운 소리를 빚어내는지… 모든 첼리스트들은 아마 그에게 매료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단 하나의 커다란 첼로 소리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협주곡을 연주할 때 오케스트라의 음에 자신을 얹고 첼로를 싣는다. 인토네이션이나 소리의 질감 모두 첼리스트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소리에 맞추는 것이다. 화음은 화분에 담긴 흙과도 같고, 독주 첼로는 그를 기반으로 피어나는 꽃과도 같은 것이다. 흙에서 떠나온 꽃은 곧 생명력을 잃는다. 요요 마가 이매뉴얼 액스와 함께 녹음한 음반을 보면, 그의 변화무쌍함은 더욱 분명하다. 피아노와 함께 연주하는 부분과 솔로 파트에서의 첼로 소리는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음악의 전체를 볼 것, 자신의 세계에 갇히지 말 것, 그것이 내가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그 다음에는 작곡가가 이 곡을 왜 썼는지, 작곡가의 작품세계 전체에서 이 곡은 무슨 의미를 갖는지, 어느 시기쯤에 쓰였는지, 어느 순간에, 어떤 영감을 가지고, 누구에게 헌정을 했는지 등을 고려해볼 수 있다. 베토벤처럼 새로운 규율들을 정립하고 싶어 했는지, 하이든처럼 소소한 기쁨에 흡족해 하는 철학자였는지, 슈만처럼 어떤 고통과 내적인 갈등 속에서 끝없이 치달았는지. 이런 걸 알면 연주하면서 작곡가들의 특성과 캐릭터를 자신의 언어로 녹여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건 활을 어떻게 쓰는지, 현을 짚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는 조금 다른 문제이다.

스스로의 이름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기를 바라는가.
벌써 마흔을 훌쩍 넘겼고, 꼭 최고가 아니어도 된다. 내가 사랑하는 음악을 하고 있고, 내가 좋아하는 동료들과 함께하며, 스타 마케팅에 기대지 않지만 최고의 수준을 보장하고 음악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레이블(아르모니아 문디)에서 음반을 내고 있다. 음악가들은 자주 회의를 품는다. 스스로 하고 있는 것이 과연 유용한가? 내가 이 곡을 꼭 연주할 필요가 있는가? 연주자가 되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끝없고 엄청난 헌신을 요구하는지, 끝없이 연습하고 음악을 향해 매진하는 동료들을 보면 여러 생각이 든다. 악보를 끝없이 들여다보고 분석하고 연구하면서도, 작곡가들의 생애와 관련된 문헌을 찾아보면서도 더 젊었던 시절의 나 역시 언제나 의심하고는 했다. 특히 드보르자크를 연주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내가 왜 드보르자크를 연주해야 하지? 이미 로스트로포비치가, 요요 마가 정말이지 근사하게, 더 이상은 잘해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이렇게 눈부신 성취를 이뤘는데 내가 뭔가를 더 해낼 수 있단 말인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최고가 되는 것보다 개인적인 나만의 것을 세상에 내놓고자 하는 소망이 있다. 그런 첼리스트로 남고 싶다. 내가 세상에 내놓는 것이 설령 최고는 아닐지라도, 이데아적 숭고한 아름다움을 나만의 해석을 통해 전달하고 싶다. 내가 어떤 작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정과 그 음악이 나에게 선사하는 감정들에 대해 작품과 나 사이의 관계를 드러낸다면 누군가는 좋아할 것이고, 누군가는 좋아하지 않으리라. 누군가의 이데아와 나의 이데아는 맞닿아 공명할 것이고, 다른 이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이데아가 서로 맞닿는 순간, 음악은 위대하고 높은 무엇으로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이다. 내 영혼을 강력하게 드러내는 것보다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종종 서로의 이데아가 맞닿는다고 해도 결과가 늘 의도했던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내가 존경했던 우상들은 로스트로포비치·요요 마였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부터 자주 사람들은 내 연주를 듣고 피에르 푸르니에를 떠올린다고 말했다. 푸르니에를 첼리스트로서 존경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처럼 연주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는 뭐랄까… 지나치게 귀족적이고 고상했다. 나는 로스트로포비치처럼 육체적인 첼로, 요요 마처럼 넉넉하고 폭넓은 소리에 경도되어 있었고 그들처럼 연주하고 싶어 했다. 내 연주에 무언가 푸르니에를 연상시키는 지점이 있었을 것이다. 연주자의 의도와 달리 듣는 사람이 내 연주를 어떻게 수용하는지 거기까지는 연주자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이번 신보 엘가 첼로 협주곡에 대한 반응이 좋다. ‘텔레그래프’ 리뷰는 이 곡에 들어찬 당신의 시적 감수성과 첼로에 대한 사랑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별 다섯 개와 함께.
엘가 협주곡을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작업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모르겠다. 드보르자크 앨범을 프라하 필하모닉과 함께 작업했는데, 작곡가의 출신 나라 교향악단과 그들의 걸작을 녹음할 수 있는 건 크나큰 행운이다. 아무리 세계화가 급속도로 이뤄지고 있다고 해도, 각각의 오케스트라들은 자신들만의 특성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두 앨범을 모두 함께 한 지휘자 이르지 벨로흘라베크는 전직 첼리스트로서 이 협주곡들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함께 작업하는 동안 여전히 지휘자로 머무를 뿐, 설령 첼리스트인 나에게 조언을 준다고 하더라도 아주 조심스럽고 비밀스러운 방식을 고수하는데, 첼로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는 그와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첼로와 오케스트라 사이에서 완전한 합일의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환경, 즉 작곡가의 에스프리를 이해하고 있는 고국의 오케스트라와 첼로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지휘자와 함께 만들어진 음반이다.

당신의 첼로(1696년 산 조프레도 카파)에 대해 얘기해달라. 약간 거친 양감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표면과 배니시 빛깔이 정말 아름답다.
토리노에서 태어나 3백 년 넘는 시간을 지나온 이 악기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놓인,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다. 이 세상 존재하는 그 누구보다도 내 영혼에 가까이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관계가 그렇듯 위기의 순간들 역시 존재한다. 어느 날 갑자기 원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면, 나는 카파를 품에 끌어안고 “왜 그러지? 오늘은 왜 소리가 안 나오니? 무슨 일이 있어?”라고 묻는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끝없는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악기와의 관계도 예외가 아니다. 음은 살아있는 것이다. 공기의 진동이고, 살아있고, 육체적이다. 듣는 사람에게 어떤 기억과 추억 혹은 생각들, 감정의 편린들을 불러일으키지만 어쨌거나 음은 살아있다. 순간적으로 살아있도록 하기 위해 연주자는 음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내가 무대에 오르는 것은, 통조림을 열어서 거기에 보관된 정지된 상태로 존재해온 음식물을 먹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 지점에 있는 일이다. 우리는 무대에서 늘 새롭게 창조해야 하고, 0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내가 긴장하거나 몸 상태가 안 좋을 때면 여지없이 첼로 소리가 찌그러져 있거나 흉하게 짓눌려 있기도 한다.

20여 년간 무대에 서왔는데, 여전히 0부터 시작한다고 느끼나.
누구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이전 세대의 음악가 중 한 분이 “수천 번의 공연을 했더라도, 모든 공연이 첫 공연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을 했다. 수천 번의 경험이 있다고 해서 휘파람을 불면서 씩씩하게 아무 걱정 없이 무대에 오를 수 있겠는가. 다시 0부터 시작해야지. 경험이 물론 당신이 홀딱 벗고 있는 것처럼 느끼지 않도록 도와주지만 어쨌든 무대에 오른다는 건 그렇다. 사람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최고를 기대하고, 뭔가를 전달해야 하고, 전혀 경험이 없는 초보와 다를 바가 없다. 무대 위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하고, 특별한 경험을 선사해야 하고, 음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우리의 사랑을 전달해야 하고, 그게 과연 성공할지는 시도해보기 전에는 전혀 모르고….
여기서 요요 마와의 이야기를 해보자면, 그의 마스터 클래스를 대여섯 번 참가했다. 뉴욕에서 공부하던 시기였는데, 대부분이 탱글우드에서였다. 나는 그를 우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갓 스무 살을 넘긴 나에게 그는 무대 위 긴장과 두려움에 대해 말했다. 만약 청중에게 닿고 싶다면 이 모든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고 청중을 위해 연주해야 한다고. 그가 주로 쓰는 방법은 객석에서 단 한 명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법한, 그렇게 보이는 사람. 예를 들면 휠체어에 앉아있는 나이 많은 할머니라든가. 늙고, 지나온 삶이 고단했을 테고, 여러 희로애락을 다 겪어본 그녀가 음악을 듣기 위해 공연장까지 왔을 때 얼마나 많은 것을 기대하고 왔을까. 다른 관객보다 그녀를 만족시키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울지 모르나 한편 음악으로 그녀의 영혼이 잠시 휠체어를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도 있다. 그건 장담컨대 음악만으로 가능한 작은 기적이다. 이런 기적을 위해서라면 내면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건 해볼 만한 일이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건 연주자로서 평생의 과제이다. 무대에 서기 전의 긴박감과 아드레날린이 당신을 자극한다. 그걸 긍정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훌륭한 자극제이지만, 때로는 아드레날린과 흥분이 두려움과 긴장을 증폭시키고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 연주자와 음악을 완전히 망가뜨릴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경험으로 인해 아드레날린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데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15년 전보다 훨씬 자주, 좋은 공연을 많이 하고 있다. 최근에 함께 한 지휘자 야닉 네제 세갱은 아드레날린을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아주 좋은 본보기이다. 그와 함께라면 언제나 상상 이상의 것이 가능하다.

좋은 공연이란, 완벽을 말하는가?
완벽보다는 이상에 가까워지는 것, 궁극적으로 음악의 본질에 다가서는 것이 음악가로서 내가 지닌 목표이다. 당신이 말하는 무적의, 철갑을 두른 듯한 무결점의 이미지가 무엇인지는 알 것 같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종종 순간마다 우리가 무결점(invincible)이라고 잠시 믿기도 한다. 언제나 다가오는 건 아니고 가끔씩. 완벽함을 어떤 규격과 측정의 단위로서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건 자유의 경지, 우리의 최종 목표에 도달하는 걸 방해하는 요소로 변할 수도 있다.

“그런데 첼리스트 장 기엔은 어디에 있니?”
다양한 활동을 유지하다 보면 균형 맞추는 것이 어렵지는 않나? 대부분 가르치는 일보다 무대 위에서 연주자로 남기를 원하는데.
가르치는 일이나 무대에 서는 일 모두 내가 갖고 있는 토양이다. 흙은 그저 흙일 뿐, 그걸 들여다보면서 나누고 분석할 수는 없다. 모든 음악 활동이 단단히 연대한 채 맞닿아 있고, 내가 더 아름다운 음악의 꽃을 피워낼 수 있도록 하는 근간이 되어준다. 고향인 엑상프로방스 부근에서 운영하는 여름 페스티벌 역시 내가 이 많은 활동들을 왜 다 하고 있는가에 대한 답이 된다. 실내악에 반해서, 혹은 현대음악 레퍼토리 때문에… 나를 찾아오는 학생들은 그 이유는 다양하다. 그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음악의 길은 이토록 다양하다는 것을 나 스스로의 삶을 통해 증명하고 싶다.
인생에서 가장 자극적이고 인상적인 사람들을 만난 곳이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이었다. 불레즈는 물론 동료였던 피아니스트 피에르 로랑 에마르와 플로랑 보파르는 어떻게 음악을 해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깨달음을 주었다. 파리 고등 음악원에서 에마르가 맡았던 실내악 수업의 조교로 꽤 오랜 시간 일을 했다. 나는 에마르의 조교가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 선 한 사람의 음악가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행운을 경험했다. 음 하나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지금 우리 앞에 놓인 한 곡이 어떤 과거의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존재하는지, 음악으로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순간의 증인이 되는 경험이었다. 가르치는 일이 이렇게 흥미롭고, 열정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오히려 우리에게 더욱 풍성한 영감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단 두 마디를 가지고도 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에마르는, 한 소절의 멜로디만 들어도 수천 가지의 음악적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다. 다각도에서 음악을 바라보며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가장 뛰어난 두뇌를 지닌 음악가이다. 플로랑 보파르 역시 일상의 짤막한 대화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영감과 자극을 줄 수 있으며, 누구보다 탁월한 음악적 통찰력으로 작품을 꿰뚫어보는 사람이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마비 증세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건반 위에서 단 하나의 동작도 절대로 낭비하지 않는다. 부상을 극복하고 초월의 경지에 다다른 운동선수와도 같다. 나는 그에게서 엄숙함과 강인함을 보았다.

당신도 부상을 겪으며 스스로의 몸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고, 더 강해졌다고 말했다.
부상을 경험하고 돌아온 이후에 오히려 더 높은 수준의 운동선수가 될 수 있다고 말한 어느 축구 선수의 인터뷰를 기억한다. 육체적으로 내 근육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게 되었으니 더 효율적으로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초월의 경험은 단지 육체적인 것만은 아니다. 프라이부르크 음대에서 불레즈의 ‘메사제스키스’를 학생들과 함께 연주했을 때, 청중은 불레즈의 음악언어를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날의 공연 중 가장 열기 어린 순간이었다. 현대음악에 대한 선입견을 깨트리면서 음악적으로 희열의 경지에 다다르는 것 역시 어떤 면에서는 초월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불레즈·쿠르타그·리게티·뒤티외… 이러한 작곡가들과의 만남이 당신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나.
쿠르타그·코다이의 작품을 함께 녹음하기로 해서 쿠르타그 앞에서 직접 연주하며 점검을 받은 적이 있다. 그의 곡은 총 6분 남짓이었는데, 나는 그와 여섯 시간을 함께 보냈다. 단 한 소절에 두 시간을 넘게 투자하는 모습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음악의 본질에 대한 엄격함을 엿보았다. 그는 나에게 아주 다양한 주문을 해왔고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주문에 따라 곡을 연주했다. 네 시간이 다 되어가자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방전될 지경이었다. 그러다 그의 한 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너는 작곡가인 내가 원하는 대로 이 곡들을 연주할 수 있다. 그런데 첼리스트 장 기엔은 어디에 있니?” 음악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가되, 연주자로서 스스로를 잃지 말아야 함을 배웠다. 작곡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음악이란 결국 우리가 믿고 바라온 모든 것들의 필연적인 재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환상은 일시적이지만 숭고한 위대함은 영원히 남는다. 현대음악은 머리로, 고전·낭만 레퍼토리는 가슴으로 연주한다는 말에 100퍼센트 동의하지는 않는다. 다만 접근이 다르다는 점은 확실하다. 작곡가들의 개별적인 음악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접근법 역시 달라야 한다. 불레즈의 악보를 베토벤 소나타의 악보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연주를 통해 음악이 될 때, 이데아에 도달한다는 점은 같다. 결과적으로는 같은 결과물, 공기의 진동인 ‘음’으로 순간에만 존재하나 청중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는다. 음악에는 사실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크부터 현대음악까지, 세기를 뛰어넘는 레퍼토리들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걸 좋아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위대한 음악의 숭고한 아름다움은 시대를 뛰어넘는다. 음악이 지닌 불멸의 본질에 이데아적 아름다움으로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장 기엔 케라스 내한 공연 | 11월 13일 오후 8시 LG아트센터
루토스와프스키 ‘자허 변주곡’, 린드베리 ‘스트로크’, 쿠르타그 ‘사인Ⅱ’ Op.5b 외,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 코다이 무반주 첼로 소나타 O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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