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시도 도밍고의 베르디 바리톤 아리아집

도밍고에 비친 베르디 자화상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10월 1일 12:00 오전

2007년, 불세출의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가 ‘시몬 보카네그라’의 타이틀롤을 부르기 위해 바리톤 훈련에 돌입한다고 선언했을 때 과연 도밍고답다는 긍정론이 대세였다. 가수의 한계를 넘어 지휘자로, 또 극장 행정가로 늘 새로운 일에 도전해온 그의 행보에 바리톤 가수라는 덤이 얹히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시각이었다. 도밍고의 부모는 멕시코에서 스페인 민속 오페라인 사르수엘라 극단을 운영했고, 그는 사르수엘라 바리톤으로 경력을 시작했다. 테너로서 도밍고의 음색이 정통 리리코보다 무거운 스핀토와 드라마티코 사이에 위치하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다. 드디어 2009년, 베르디 중기의 묵직한 남성 오페라가 재조명되는 데 기여한 도밍고의 ‘시몬 보카네그라’는 비록 바리톤으로서 완벽한 경지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제노바 총독의 신분으로도 벗어나지 못하는 비극적 남성상을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필자도 뉴욕·런던·밀라노에서의 공연을 영상자료로 보면서 적어도 극적인 감동만큼은 과거 어느 명가수에 못지않게 잘 살렸다고 생각했다. 이후 도밍고는 ‘리골레토’의 타이틀롤에 도전하는 등 비록 횟수는 많지 않지만 바리톤 역을 계속하고 있다.
베르디 아리아집은 그 산물이다. 베르디가 즐겨 입던 의상과 모자 차림으로 표지를 장식한 도밍고의 모습은 이 음반이 바리톤을 위한 것임을 상징하고 있다. 베르디는 늘 자신을 테너가 아닌 바리톤 배역, 특히 딸이나 아들의 문제로 비통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아버지의 모습에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베르디 오페라 26편의 모든 테너 아리아를 수록한 음반을 내놓기도 했던 세기의 테너가 70세를 넘긴 나이에 주요 바리톤 아리아를 부른 음반을 보면서 그 열정에 감동하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물론 객관적으로 오페라 역사에 빛나는 전설적인 바리톤의 것과 비교할 수는 없으리라. 음성의 부드러움, 풍요로움에 있어서는 과연 탁월하지만 바리톤 특유의 단단한 맛은 아무래도 부족하고, 특히 나이 탓에 파워가 부족한 점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유 있게 받쳐주면서 올라가는 힘이 부치는 것은 도처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도밍고는 편법을 동원하지 않았다. 스튜디오 녹음이므로 첨단 편집 기술을 이용하면 적어도 호흡의 문제는 상당히 가릴 수 있었을 것인데, 그런 잔재주를 동원하지 않았다.
‘시몬 보카네그라’와 ‘리골레토’ 외에 도밍고에게 어울리는 바리톤 역은 무엇이 있을까? 우선 희극적인 ‘팔스타프’는 어울리지 않는다. 유머가 풍부한 도밍고이지만 기본적으로 진지한 사람 아닌가. ‘오텔로’의 이아고도 어울리지 않는다. 아무리 바리톤 훈련을 했어도 집요한 악당으로서의 도밍고를 연상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반면 막베토(맥베스)의 경우는 좀 다르다. 왕위 찬탈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지만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고뇌하고, 회한에 잠기는 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오페라 4막의 감동적인 아리아 ‘연민도, 존경도, 사랑도’가 첫 트랙을 장식한다. 이 밖에 ‘가면무도회’의 레나토, ‘라 트라비아타’의 제르몽, ‘에르나니’의 카를로스 국왕, ‘일 트로바토레’의 루나 백작, ‘돈 카를로’의 로드리고, ‘운명의 힘’의 돈 카를로가 도밍고의 도전 대상이다. “베르디의 바리톤 배역에 매달리는 것은 인간의 깊숙한 심리를 뚫고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생각과 부합하는 선택이다.

글 유형종(음악 칼럼니스트)


▲ 플라시도 도밍고(바리톤)/파블로 헤라스 카사도(지휘)/오케스트라 데 라 코무니타트 발렌시아나
Sonny Classical 88883733122 (DD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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