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나 네트렙코(소프라노)/
드미트리 흐보로스톱스키(바리톤)/
콘스탄틴 오르벨리얀(지휘)/
러시아 국립교향악단/
아카데믹 그랜드 합창단
DG 0734548 (16:9/PCM Stereo,
DTS 5.1/101분) ★★★★☆
모스크바 관광의 첫 순서로 꼽히는 붉은 광장은 15세기 전부터 노천시장으로 만들어진, 러시아 격동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본 산증인이다. 695미터에 달하는 광장의 북쪽 끝에는 양파 모양의 둥근 지붕이 인상적인 성 바실리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러시아어로 크렘린은 성벽을 뜻한다. 붉은 광장 서편으로 삼각형 모양으로 둘러싼 크렘린은 대통령 집무실이 위치한 러시아의 심장부이기도 하다.
2013년 6월 19일 저녁 붉은 광장에서는 전 세계로 생중계된 기념비적인 공연이 열렸다. 러시아가 자랑하는 톱클래스의 두 성악가, 안나 네트렙코와 드미트리 흐보로스톱스키의 갈라 콘서트가 그것이다. 2003년 6월 모스크바와 라이벌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창건 300주년을 맞아 에르미타주 박물관 뒤편 궁전광장에서 게르기예프 지휘의 환상적인 야외 콘서트를 본 적이 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꼭 10년 만에 모스크바에서도 비슷한 모양새로 자존심을 세우는 격이었다.
이 공연에 연주된 차이콥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 가운데 유명한 폴로네즈를 배경으로 모스크바 중심부를 비춘다. 과도하게 늘어난 빛의 앙금, 백야의 영향을 받아 해가 여전히 중천에 떠 있는 모스크바의 눈부신 정경이 음악보다 먼저 눈을 사로잡는다. 카메라는 크렘린 궁 안으로 들어와 우스펜스키 사원을 비롯한 성당 광장을 지나 붉은 광장에 멈춘다. 구소련 시절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가 이끌었던 소비에트 국립교향악단으로 더 잘 알려진 러시아 국립교향악단은 아예 ‘스베틀라노프 오케스트라’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하다. 거칠고 호방하기 그지없는 현과 원색적인 금관이 압권인 이 악단이 먼저 베르디의 ‘운명의 힘’ 서곡으로 우렁찬 팡파르를 울린다.
2005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비올레타로 열연했던 날씬한 네트렙코는 이제 잊어야 한다. 결혼과 출산으로 체중이 불어난 네트렙코의 가장 최근 모습을 여기서 만날 수 있다.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 중 ‘사랑하는 친구들이여’를 부르기 위해 등장한 네트렙코의 우람한 외모에 먼저 놀란다. 하지만 음색은 더 두터워지고 감정 표현 또한 능수능란해졌음을 곧바로 알 수 있다. 반짝이는 은발을 나부끼며 나온 흐보로스톱스키는 왜 현재 정상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돈 카를로’ 중 ‘나는 죽지만 행복하오’는 절절한 절창이다.
모스크바에는 유독 까마귀가 많다. 흐보로스톱스키가 ‘일 트로바토레’의 레치타티보 “아무도 없군. 성가소리도 들리지 않네”를 나지막하게 부르기 시작할 때 까마귀 울음소리는 음악과 꽤나 잘 어울린다. 이때 크렘린의 20개 탑 가운데 으뜸인 스파스카야 탑의 시계는 오후 8시 35분을 가리킨다. 해는 여전이 떠 있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부르는 아카데믹 그랜드 합창단은 비브라토를 마음껏 구사하는 러시아 합창의 진수에 다름 아니다. 차이콥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은 러시아 성악가와 오케스트라·합창단이기에 당연히 오리지널로 감상할 수 있다. 이윽고 해기 진 뒤에 펼쳐지는 앙코르 세 곡은 그야말로 축제의 현장이다. 헝가리 작곡가 칼만의 ‘차르다슈의 여제’를 부를 때 손뼉 치며 온몸으로 춤추는 집시 공주 네트렙코에 객석은 열광한다. 음악 영상물로는 유일하게 붉은 광장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내용물 또한 최상급이어서 눈과 귀가 모두 즐겁다.
글 유혁준(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