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가 너무나 존경한 나머지 자신의 편지에 50번 넘게 언급한 작가가 있다. 인상파 화가 드가는 그 작가의 판화를 750점이나 소유했다. 피카소는 심지어 미켈란젤로에 그를 견주었다. 고흐나 드가와 같은 동시대 작가들이 인정했던 그의 작품은 현재에도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사랑 받고 있다. 현존하는 세계적인 작가 피터 도이그도 늘 그의 작품을 곁에 둔다고 한다.
‘선수가 알아보는’ 작가의 이름은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 1808~1879). “누구?”라고 되묻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세계미술사를 이끈 대예술가들이 흠모했으나 정작 우리 ‘대중’에게선 잊힌 그는 누구인가. 도미에의 눈에 비친 파리를 만날 수 있는 전시회가 1월 26일까지 로열 아카데미의 벌린텅 하우스 전시실에서 열렸다.
오노레 도미에는 1808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태어나 어릴 적 부모와 함께 파리로 이주했다. 작가로서 그가 맞이한 세계는 1848년 2월 혁명, 제2공화당, 나폴레옹 2세의 제2제정과 파리 코뮌 등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격동의 프랑스 혁명시대였다. 소용돌이의 파리를 배회하며 그는 소외 받는 사람들을 그렸다. 그의 스케치는 판화·석판화·풍자화가 되어 파리 사람들에게 매일같이 읽혔다. 도미에는 40여 년간 쉬지 않고 작업한 끝에 4천여 작품을 남겼다. 그러다 1872년 앞을 볼 수 없게 되어 작업을 중단한다. 그로부터 2년이 흘러 세상을 떠날 때는 지독한 가난뱅이였다.
스스로 선택한 가난이었지만 도미에에겐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 자유가 있었다. 그리고 싶은, 좋아하는 주제만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 필리프 왕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스물넷 나이에 옥살이를 했던 도미에는 공화당을 지지했고 신랄한 정치 풍자화를 뽑아냈다. 그는 언제나 일상 속의 사람들을 관찰했으며, 그 기억을 안고 스튜디오로 돌아와 작업했다. 단 한 번도 모델을 쓰지 않았으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스케치하고, 다시 지우고, 덧그렸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들은 오묘한 생동감과 사실성을 간직한 채 세상의 단면을 꼬집는 통찰력을 지닌다.
작가가 그토록 사랑했던 파리의 19세기는 근대, 그 자체를 상징했다. 작가들은 밖으로 나와 야외스케치를 했고 기차역을 그리기도 했다. 보들레르는 파리에 찬사를 보내며, 신화·성경을 소재로 한 역사화가 아닌 파리를 그리라고 주창했다.
도미에가 그린 사람들은 흔히 그의 친구들이었고, 단순한 소재 그 이상이었다. 노동계급의 발레리나들을 그린 드가의 접근법과는 달랐다. 그래서 도미에의 그림에는 애정이 있다. 휘황찬란한 변화 속에 소외된 계층을 사랑했고 그들의 목소리를 소리 없이 화폭에 담았던 오노레 도미에. 비록 그 이름은 잊혔지만 언제나 우리 ‘대중’ 곁에 있을 작가다.
글 김승민(런던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