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9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김광석이란 이름이 자주 들린다. 비음 섞인 창법과 털털한 웃음으로 우리에게 많은 울림을 주었던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20여 년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가 남긴 족적이 너무도 큰 것 같아 아쉽고 또 그립다.
고인에 대한 추억이 남다른 탓일까. 작년 한 해 뮤지컬 공연가에서는 김광석의 음악으로 만든 주크박스 뮤지컬들이 여러 편 막을 올렸다. ‘김종욱 찾기’로 유명한 ‘장장’(극작가·연출가인 장유정과 작곡가·음악감독인 장소영을 줄여 부르는 말) 콤비의 ‘그날들’을 필두로, 콘서트 형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리고 영화계에서 낙양지가를 올리고 있는 투자배급사 뉴(New)와 영화감독 장진이 의기투합한 ‘디셈버’ 등이다. 아무래도 원래의 뮤지션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안타까움이, 환상이 주를 이루는 무대 공간인 뮤지컬의 제작 붐을 야기한 것이 아닐까 싶다.
특히 ‘디셈버’는 여러모로 기대와 시선을 집중시킨 작품이었다. 선율이 익숙한 ‘김광석’표 음악에 요즘 뮤지컬계의 블루칩이라는 김준수가 주연으로 참여하고, 스크린과 무대를 넘나들며 대중적 인지도가 높았던 감독 장진이 연출을 맡았기 때문이다. 대극장은 대형 수입 라이선스 뮤지컬들로 장악되다시피 해 ‘재주는 곰이 피우고 돈은 주인이 챙겨가는’ 시장 구조의 왜곡이 심각한 문제점으로 대두된 우리 뮤지컬 산업에서 대형 창작 뮤지컬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반가움의 대상이었다. ‘고스트’ ‘위키드’ ‘맨 오브 라만차’ 등 유수의 해외 유명 뮤지컬과의 경쟁에서 당당하게 자리매김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국가대표가 출전하는 스포츠 경기를 응원하는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만족보다 아쉬움이 앞선다. 뮤지컬이라는 장르 특성을 살리지 못한 프로덕션의 완성도 탓이다. 장면이나 이야기, 대사에는 수많은 여타 뮤지컬 작품들의 정서와 구조가 엿보인다. 학생 운동에 몰두하던 여주인공이 죽음으로 내몰리는 모습은 ‘광화문 연가’와 닿아 있고, 꿈을 노래하는 연습생들의 노래에는 ‘페임’이 묻어 있다. 환생한 듯 닮은 외모의 여주인공을 만난 남주인공의 대사 “나는 알아보겠는데 넌 왜 날 모르니?”라는 절규는 영화와 뮤지컬로 여러 차례 리메이크 됐던 ‘번지 점프를 하다’와 똑같다. 하지만 ‘디셈버’를 패러디 뮤지컬이라 부르기엔 위트도 부족하고 유머러스함도 찾기 힘들다. 솔직히 당황스럽다.
큰 무대에 대한 경험이나 이해 부족도 엿보인다. 예를 들면 합창에서 노래 부르는 출연자의 모습을 찾기 힘들다. 조명도, 공간 분할도 빠진 채 무리에 섞여 있는 누군가가 그것도 무대 뒤쪽에서 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생각하고 노랫말을 감상하기보다 배우 찾기에 정신을 뺏기게 된다. ‘월리’를 찾아내는 순간, 그러나 노래는 이미 끝나가고 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점은 ‘김광석’을 만나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짜깁기 식 이야기에 맞춰 편곡을 시도하다 보니 원래의 정서나 선율을 발견하기 어렵다. 노래 제목은 극 도중 앞자리 객석 모니터에 눈에 거슬릴 정도로 자주 등장하며 이야기의 몰입을 방해하지만(심지어 모니터를 끌 수조차 없다!) 그나마 덕분에 김광석의 음악으로 꾸민 주크박스 뮤지컬이라는 느낌이 남아있다. 뮤지컬 무대에서도, 뮤지컬 영화에서도 접하기 힘든 희한한 방식을 굳이 왜 시도하고 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주크박스 뮤지컬은 ‘귀’가 즐거워야 하는 장르다. 음악의 힘이 작품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특성이 있다. 기존의 뮤지컬 관객뿐 아니라 그 음악을 즐기고 사랑했던 해당 뮤지션 팬들도 객석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이 장점이자 매력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우리나라 주크박스 뮤지컬들은 ‘맘마미아!’의 형식적 답습이라는 ‘저주’ 속에서 쳇바퀴만 돌고 있다. ‘음악’보다 ‘이야기’에 집착하는 모순이다. 하지만 이래서는 굳이 주크박스 뮤지컬을 만들 이유도 흐릿해질 수밖에 없다. 쓴 지적이겠지만 곱씹어보길 바란다.
글 원종원(뮤지컬 평론가·순천향대 교수) 사진 N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