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국립국악원장 김해숙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2월 1일 12:00 오전

국립국악원을 저 멀리 두고 바라보기만 하는 우리 국민에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듯하다.
이곳은 여러분, 바로 ‘당신’의 국악원이라고. 여성 최초이자 연주자 출신 신임 국립국악원장 김해숙을 만났다

국립국악원 예악당과 우면당 사이에 위치한 사무동 3층의 원장실. 취임 축하 메시지가 담긴 화환들이 싱싱하다. 김해숙 원장의 내정이 확정되었던 1월, ‘첫 여성 국립국악원장’이라는 소식이 세상에 나돌았다. 심지어 어느 포털 사이트의 ‘핫 토픽’을 장식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여러 음반과 서적에서 그의 이름과 마주했다. 실내악단 어울림과 서울새울 가야금 3중주단의 음반 표지에서, ‘산조연구’ ‘전통음악개론’과 같은 연구 서적과 가야금 연습곡집 ‘청흥둥당’ ‘법고창신’ 등.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가 예술가와 이론가, 그리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부지런히 끌고 온 내력이 배어 있는 것들이었다.
촬영을 위해 원장실에서 풍류사랑방으로 이동하는 길. 2005년부터 2006년까지 국악원 연구실장을 지낸 바 있지만 연결 통로의 문을 밀어야 할지 당겨야 할지, 그이는 아직 국악원의 구석구석이 낯설고 생소하기만 하다. 아무리 인터뷰라고 하지만 어제 온 이에게 국악원의 앞날을 묻는 것은 우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국악원의 미래와 국악의 미래는 떼려야 뗄 수 없다”라는 그의 명료한 한 마디가 내가 준비해간 질문지를 폐기하게 했다. 오히려 잘 된 일 같았다. 표피적인 정보로 꾸려간 질문지, 비서를 통해 채워진 답변보다 오히려 김해숙 원장이 지닌 의식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뜻이 분명하기에 의지의 무늬는 단단해보였다. 이제 김해숙 원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가야금 연주자 김해숙의 이야기
취임이 확정된 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원장이 되었다고 많이들 이야기해요. 저는 그런 타이틀보다는 ‘가야금 연주자 김해숙’을 내세우고 싶습니다. 역대로 보면 이주환(1대)·성경린(2대)·김기수(3대) 선생님 등이 연주자 출신이었어요. 그 계보에서 저를 봐주십시오. 어차피 세상이 여자 반, 남자 반인데.
그래도 누군가는 “강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라며 묻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여성만의 용감함과 대담함이 나올 때가 있죠. 아직까지 한국은 남성이 가정을 부양해야 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여성과 남성을 가르는 것이 좀 그렇기는 하지만 굳이 이야기하자면 여성에게는 세심함과 포용력,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인류적인 강점이 있는 거 같아요. 그것이 알게 모르게 국악원을 이끌어가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봅니다.

실(實)한 전통을 위해
국악원은 많은 일들을 합니다. 그중 80퍼센트가 공연이에요. 그간 많이 성장한 것도 사실이지만 딱히 내세울 만한 공연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에요. 선뜻 답이 없는 것도 현실이고요.
중요한 것은 판을 벌릴 때, 음악에 관한 배경과 미적 감각·정체성·철학을 가지고 판을 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국악원이 이러한 부분에 좀 소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대부분의 공연이 원형적인 것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저는 이 부분을 강조할 예정이에요. 즉 학예실과 무대가 잘 결부되도록 하는 것이죠.
사실 무대와 학예실의 관계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경험을 말씀 드리죠. 제가 연구실 실장으로 있던 때였어요. 당시 국립국악원의 정악단을 통해 전승되는 종묘제례악이 원형이 아니라는 논쟁이 일었습니다. 일제 때, 종묘제례악이 음악을 포함해서 노랫말·복식·의물이 일본을 상징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요. 저는 그럼 무엇이 원형이냐고 끊임없이 물었죠. 동시에 ‘대악후보’(1759)에는 훼손되기 전 악보가 있으니 그것을 토대로 현행 연주와 훼손되기 전 연주를 동시에 올려보기도 했죠. 종묘제례악은 임진왜란(1592) 당시 많이 훼손되었고 악사들도 전국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래서 실록에 보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상소문이 많이 올라오죠. 아무튼 갑론을박 속에서 연구해보니 당시 악사들은 악보를 지금의 연주자처럼 취급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으로 익힌 것을 몸으로 전승한 셈이죠. 악보가 있다고 해도 지금 우리가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만큼 크게 의존하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저는 ‘연주전통’이라는 말로 대응했습니다. 정악단 편을 들었다기보다는 연주자들이 전승한 ‘연주전통’도 중요한 것이다, 그걸 무시하면 안 된다로 대응했습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이러한 것들을 뒷받침하는 학예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러한 연구 성과를 실제 연주에 반영해서 합당하다면 과감히 바꾸고, 변화하는 오늘의 시간만큼 매번 변화를 주려 합니다. 이러한 과정 또한 정리하고 연구물로 축적하는 업무도 동시에 진행하고요.
앞서 ‘실제 연주’라 했죠? 제게 이 ‘실제’의 느낌은 굉장히 중요해요. 이론이나 연구도 ‘실제’의 공연을 위한 ‘실제’의 이론이어야 합니다. 국립국악원에는 부설 악기연구소가 있습니다. 2006년 개관 당시 업무는 ‘실제’ 음악에 도움을 주기 위한 악기 개발이었습니다. 공학적인 접근으로 음향을 개선하려 했고, 경제적인 접근을 통해 악기 값이 비싸지는 것에 대한 대안의 재료를 개발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연구실장으로서 임기를 마치고 외부인이 되었습니다. 밖에서 보니 연구소의 방향은 ‘실제’의 음악을 향해 있지 않았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곳으로 흘렀습니다. 안타까웠습니다. 한편으로는 국민의 세금이 생각나기도 했고요.

골고루 뿌리고 올바르게 심기
저는 서양음악 전공자들과 함께 많은 무대에 서봤습니다. 그때마다 서양음악 종사자들과 달리 국악인들은 어떤 강요를 받았어요. “너만 알아듣는 음악을 하고 있어.” “잘 모르겠네.” “어려워.” 개선을 위한 주문이었죠. 하지만 묻고 싶었어요. “당신은 국악에 대해 얼마나 공부를 하고, 애정을 갖고 이해하기 위해 에너지를 투여해봤나요?”라고. 훈련! 듣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국악과 양악을 동시대에 놓고 비교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살펴보면 국악의 자원들은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사극에는 가야금이 나오죠. 하지만 연주법이 틀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국악의 저변을 넓히기 위한 이미지 메이킹이 손해로 돌아올 때도 있죠. 사람들이, 국악이 어떤 음악이다라고 생각하게 하는 정체성 확보가 중요하다고 봐요. 더불어 국악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문제 제기와 올바른 교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국립국악원은 오래전부터 대민사업으로 다양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앞으로도 강화시켜나갈 예정입니다.
그리고 외국인들에게 “이것이 한국음악이군!”이라는 놀라움을 선사하는 것도 국립국악원의 업무 중 하나입니다. 국제교류에도 더욱 힘쓸 예정입니다. 저도 가야금을 들고 외국 공연을 갈 때 그쪽 주최 측으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을 때가 가장 좋았습니다. ‘악기가 자기 몸의 일부인 양 연주력이 타고난 연주자여야 한다.’ ‘한국의 전통적인 색채를 바탕으로 하되 연주자 자신이 음악을 만들어내야 한다’ 등이요. 이러한 생각이 있는 곳으로 국립국악원을 보낼 예정입니다. 존중받는 곳에서 한국음악의 씨가 더 잘 뿌려지고 잘 자랄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금으로 만든 음악, 금(金) 같은 음악이 되도록
어린 시절부터 국악원이 한국의 국악을 대표하는 기관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솔직히 몇 해 동안 그간 쌓아온 위상에 못 미쳤던 적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 사이 국립국악관현악단 등 몇몇 단체들이 기획이나 대중과 만나는 것에 있어 더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국립국악원은 가진 것이 많은 기관입니다. 국가에서 내려오는 예산이 있고, 정악단과 민속악단, 무용단 그리고 창작악단, 네 개의 예술단체가 있죠. 하지만 부족한 것도 많습니다. 원장 공모에 지원할 때 국립국악원의 한계들을 지원서에 피력했어요. 공연에 관한 전략, 프로그래밍, 홍보와 마케팅… 이에 관한 전문인력이 부족하다고요. 이것들은 공연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것들입니다. 이제 차차 개선해나갈 예정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품’이에요. 이것을 위해 최대한 노력할 예정입니다. 지난해 6월에 소리극 ‘아리랑’이 오른 적이 있어요. 이와 비슷한 성격의 작품을 올 연말에 올릴 겁니다. 공연 전문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듣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작품만 만들면 뭐 하나요? 지난 작품도 재공연을 통해 관객과 부지런히 만나게 할 예정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은 손님을 내쫓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있는 안목으로 새 옷을 입혀 올리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봅니다.
제가 가야금을 시작했던 중학교 시절에 비하면 예술을 둘러싼 사회적인 분위기는 훨씬 좋아졌어요. 이제는 우리의 문화예술에 대해 공부하고 애정을 쏟으면서 경제·사회·정치 등이 동반 성장을 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 문화정체성을 가다듬는 시점이 온 것 같습니다. 제대로, 똑바로 쳐다보면서 애정을 쏟아야 할 단계죠.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서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계획되고 굳어진 것에서 조금씩 고쳐나갈 예정입니다. 성급히 성과를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 그리고 국민의 세금을 가지고 우리음악을 어떻게 가져갈지를 생각하려 합니다. 이건 정말이지 국립국악원이 지닌 소박하면서 변할 수 없는 명제라는 생각이 드네요.

김해숙 원장님께 드리는 부탁의 말씀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 중 제가 앉았던 자리는 2011년 12월 이동복 전 원장님과 인터뷰를 하면서 앉았던 자리였습니다. 그로부터 2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간 공연장의 환경은 물론 관객들의 발걸음 또한 많이, 빠르게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국악원은 ‘한결’ 같았습니다. ‘한결같다’는 표현··· 변치 않는 존재의 미덕을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만, 이 문맥에서는 좀 씁쓸하게 느껴집니다.
그동안 저를 비롯해 전통예술을 좇는 이들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저와 그들의 발걸음은 남산으로, 혹은 서울시 곳곳의 소극장을 향했습니다. 매우 기대되는 젊은 국악인들의 공연 소식을 접할 때 국악원의 단어를 찾아볼 수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간혹 국악원으로 발걸음을 옮긴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원장님의 표현대로 ‘세금’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던 적도 많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 국민은 수시로, 암묵적으로 국립국악원에 입장료를 틈틈이 지불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만약 고지서 항목에 국악원에 해당되는 항목을 조절할 수 있었다면 국악원으로 저의 세금이 나가지 않도록 했을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기대를 걸어봅니다. 원장님과 함께 한 자리는 몇 번 없지만 제가 기억하는 원장님만의 독특한 어법이 있습니다. 긴 이야기 끝에 “여기까지는 저의 생각이에요. 다음 본인의 생각을 말해봐요”였습니다. 이 말투를 국립국악원을 찾는 시민들부터 전공자들 모두에게 들려주시기를 바랍니다. 국립국악원은 원장님의 표현대로 ‘국민의 세금과 관심을 먹고 사는’ 곳이니까요.
끝으로, 이 글은 수장의 취임에 맞춘 일반적인 인터뷰가 아닙니다. ‘객석’이 보관할 원장님의 기획안입니다. 임기가 다할 때는 약속이 이행되었는가를 비교할 수 있는 평가지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를 위해 ‘객석’과 독자들이 보관하고 있을 예정입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황금’ 같은 작품과 금은보화의 찬란함을 맛볼 수 있는 작품, 젊은 국악인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발자국을 남기는 국립국악원을 만드시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박진호(studio BoB)


▲ 김해숙 1954년생. 국립국악고 졸업, 서울대 음악대학 국악과 및 동대학원 음악학 석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학박사. 5.16 민족상 가야금부문 대통령상(1972),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1998~2013),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장(2005~2006), 현 서울시 문화재 전문위원(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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