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창극단 ‘숙영낭자전’

조선의 핑크빛 선녀를 만나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3월 1일 12:00 오전

하늘에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온 선녀를 만났다.
국립창극단 연습실에서!

북을 메고 손에 책과 지팡이를 든 한 여인이 무대 위로 등장한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린 책을 관객에게 읽어주겠노라며 책을 활짝 펼친다. 펼쳐진 책은 조선시대 연애소설 ‘숙영낭자전’이다.
국립창극단의 새해 첫 작품 ‘숙영낭자전’이 지난 2월 19일부터 23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 올랐다. 9개월간의 구조 변경 공사를 끝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의 첫 재개관 작품이자, 지난해 연극 ‘숙영낭자전을 읽다’를 초연했던 작가 김정숙·연출가 권호성이 국립창극단과 함께 한 공연이다.
지난해 극단 ‘모시는 사람들’의 연극이 조선시대 연애소설 ‘숙영낭자전’을 서로 돌려가며 읽던 조선시대 규방 여인들이 이야기를 다뤘다면, 국립창극단은 천상계와 인간계를 넘나들며 이어지는 ‘숙영낭자전’ 이야기 그 자체를 보여주고 들려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럼에도 연극과 창극의 공통적인 부분은 ‘책 읽는 여인’이다. 이번 무대에서 소리를 하면서 이름처럼 책도 읽어주는 이 여인은 관객을 극으로 이끄는 안내자이자 극중 인물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존재다.
‘숙영낭자전’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양반가 외아들로 태어난 선군은 선녀인 숙영이 나온 꿈을 꾼 뒤로 부모가 정한 배필을 거부한 채 신선이 산다는 옥연동까지 찾아가 숙영을 만난다. 3년만 기다려달라는 숙영의 말에도 불구하고 선군은 숙영과 부부의 연을 맺는다. 하지만 선군의 부모는 두 사람의 결혼을 못마땅해 한다. 시간이 흘러 숙영이 자식 둘을 낳는 동안에도 애정이 식지 않는 선군은 숙영과 함께하려는 핑계로 글공부를 게을리하며 과거시험도 차일피일 미룬다. 한편 두 사람 사이를 질투한 하녀 매월은 숙영이 외간남자와 동침한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상심한 숙영은 자결을 택한다.

고증과 상상력으로 활짝 핀 ‘숙영낭자전’ 무대
창극 ‘숙영낭자전’ 공연을 열흘 가량 앞두고 분주하게 준비 중인 국립창극단을 찾았다. 이른 아침 찾아간 국립창극단 연습실에는 의상 피팅을 위해 형형색색의 옷들을 입은 배우들과 음악을 맡은 연주자들의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묘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배우들은 서로의 의상을 살펴주고, 무용수들은 움직임에 불편한 부분은 없는지, 안무를 연습하며 꼼꼼히 살피는 모습이었다.
의상 디자이너 유미양이 ‘숙영낭자전’을 위해 새로 제작한 옷은 서른다섯 벌 가량. 그 외에는 국립창극단의 기존 의상을 크고 작게 활용했다. 유미양은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의 의상 색이나 세세한 부분에서 감성적인 느낌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숙영의 의상은 고전적인 한복 디자인보다는 허리 라인을 살리고 핑크색을 가미해 전형적인 선녀의 느낌을 살려냈다. 여기에 관객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신경 쓴 세세한 장식들은 숙영에게 정체성을 더하는 요소들이다.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책 읽는 여인의 의상은 숙영의 그것과 연장선에 놓여 있다. 책 읽는 여인이 입은 옷을 자세히 보면 옆주름이나 솔기, 원단 등이 숙영의 옷과 비슷하다. 그녀가 전생에 숙영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상상력이 반영된 결과다.
하녀 매월이 입는 의상에는 열정·복수·한이 상징적으로 담겼다. 선군의 사랑을 원했으나 결국 이뤄지지 못해 비뚤어진 매월의 가슴을 가로지르는 검정·빨강 띠는 그녀의 속내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매월의 의상은 개화기 시대의 한복 같은 느낌이 강한데, 특히 2막에서는 드라마적인 요소를 가미해 속살이 훤히 비치는 검정 상의를 입고 등장한다. 현실적으로 하인이 입을 수 있는 소재는 아니지만, 매월의 욕망과 욕심을 표현하는 장치로 특별히 사용했다.
창극 ‘숙영낭자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 중 하나는 선군이 꿈속에서 만난 숙영 때문에 상사병으로 앓아누워 마치 사경을 헤매는, 몽환적인 순간을 화전놀이로 연출한 것이다. 본래 화전놀이하는 여인들은 색색의 알록달록한 한복을 입지만 작품 속 화전놀이가 벌어지는 곳을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신령한 공간으로 설정해, 무대 위에는 흰 저고리와 치마에 꽃이며 색색의 새끼줄이 장식된 옷을 입은 여인들이 등장한다.
창극 ‘숙영낭자전’ 무대와 소품은 고증을 기본으로 하되 천상계와 인간계를 오가는 이야기 흐름에 맞게 디자이너들의 상상력이 더해져 완성된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가장 인상적인 무대장치는 책과 산맥이 어우러진 프리 세트(pre set)다. 무대디자이너 이인애는 극의 시작과 동시에 관객들이 ‘숙영낭자전’ 책 속으로 함께 들어가 이야기 속 배우들에게 공감하게 만드는 데 중점을 뒀다. 그래서 달오름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관객들은 ‘숙영낭자전’의 낡은 책표지를 마주하게 되는데, 책이 마치 산맥처럼 굴곡 치듯 위아래로 열리고 그 가운데로 인물이 등장하면서 극이 시작된다. 주 무대는 정선의 옛 그림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세 개의 산줄기 모양의 막을 중심으로 숙영이 살았던 천상의 공간과 동별당으로 대표되는 지상의 공간으로 나눠진다.
의상이나 무대만큼 눈에 띄게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무대 위 다양한 요소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면서 시너지 효과를 내는 데에는 소품의 역할이 중요하다. ‘숙영낭자전’ 속 소품들은 천상계와 인간계가 혼재된 작품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상징과 아이디어를 담아냈다. 그중 책 읽는 여인이 책을 짊어지고 등장할 때 한 손에 들린 지팡이는 흔한 남성용 지팡이와 사뭇 다른 느낌인데, 소품디자이너 김기향이 여인들이 쓰는 비녀의 형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의상뿐 아니라 소품에서도 여러 장면에 걸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색상은 분홍·연보라·살구색이다. 먼저 여덟 명의 선녀들이 들고 등장하는 부채에서도 분홍색을 볼 수 있는데, 천상을 상징하는 은색을 함께 혼합해 신비로운 느낌을 완성했다. 로맨스를 부르는(?) 색상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소품은 성군과 숙영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 등장하는 이불이다. 형형색색의 천들로 이어진 조각보 형태에 가로·세로 길이가 6×8미터에 달하는 대형 이불이 두 사람 곁에 펼쳐지는데, 이때 선녀들이 이불의 귀퉁이를 맞잡고 물결치듯 흔들어댄다. 상상 속에서만 가능했을 법한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 이 장면은, 의상·무대·소품이 가장 극적으로 결합해 보여준 환상적인 순간이었다.

글 김선영(sykim@gaeksuk.com) 사진 심규태


▲ 허리 라인을 살려 여성적인 느낌을 보여주는 숙영낭자 의상


▲ 붉은 새끼줄과 꽃으로 장식된 의상은 화전놀이 장면에 등장한다


▲ 고전적인 스타일로 남성적인 면모를 강조한 성군의 옷


▲ 네 종류의 망사를 겹겹이 사용한 선녀옷


▲ 대형 조각보 이불 곁에서 사랑을 나누는 성군과 숙영


▲ ‘숙영낭자전’의 책이 열리면서 창극이 시작된다


▲ 붉은 색으로 채색 중인 동별당의 사각등


▲ 부여 여인의 머리 장식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선녀의 부채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