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독일과 오스트리아 투어를 앞두고 말러 1번으로 파리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했던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과 정명훈이 지난 4월 11일, 다시 살 플레옐에 말러 2번을 들고 왔다. 라디오 프랑스 필의 스튜디오에서 열린 7일 첫 리허설에서 정명훈은 구체적으로 악상 기호들을 잡아나갔다.
“이건 아주 엄청난 크레셴도예요. 하지만 지금은 너무 과도합니다. 피아노지만 너무 사그라드는 무의미한 소리는 아닙니다. 악센트를 지나치게 줘서는 안 됩니다.”
그가 원하는 깊고 묵직한 포르테를 지닌 피아니시모를 위해 정명훈은 원하는 소리를 직접 선보였다. 거기에 손짓과 발짓을 더해 소리의 이미지를 단원들의 눈앞에 펼쳐보였다. 악장 아모리 코이토와 첼로 수석 에리크 레비오누아, 비올라 수석 마르크 데몬스는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에도 정명훈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휘자와 함께 소리에 대한 이미지를 더해나가는 과정은 집중으로 가득했다. 아직 많은 연습이 필요한 듯했으나 라디오 프랑스 필 단원들은 직관이 뛰어나고 반응이 빠른 오케스트라답게 다층적인 말러의 소리를 차근히 쌓아나갔다.
공연 당일 아침, 총리허설은 흠잡을 데 없었지만 어딘가 너무 단정하고 신중한 연주였다. 무난하게 흘러갔으나 무엇인가가 부족했다. 말러 특유의 고뇌, 이방인의 오갈 곳 없는 마음, 두 번째 교향곡을 위해 쏟아 부은 그의 노력과 7년이라는 세월 동안 겪은 좌절과 혼란, 주저함의 그늘을 담아내기에는 100퍼센트가 아닌 듯한 연주였다. 다만 라디오 프랑스 합창단, 소프라노 크리스티나 란트샤머와 함께 한 콘트랄토 마리 니콜 르미외는 깊고 묵직한 발성으로 4악장의 ‘근원의 빛’부터 자신의 존재를 강력히 알렸다.
공연 당일 저녁, 살 플레옐은 정명훈이 이끄는 공연답게 한 틈의 빈 곳도 없이 들어찼고 생방송 중계를 위한 카메라들이 오케스트라를 둘러쌌다. 포디엄에 오른 정명훈은 연주 시작을 앞두고 잠시 호흡을 골랐다. 대장정을 시작하기 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적 침묵이었을 것이다. 느린 템포로 묵직하게 걸어가는 1악장에는 말러 특유의 비탄에 찬 애수, 단 한 번뿐인 생에 대한 고뇌와 번민, 오갈 데 없는 영혼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깊고 묵직한 포르테와 함께 터져 나오는 금관의 강렬함, 깊숙이 들어와 내면을 건드리는 현의 멜로디에는 말러의 영혼이 묻어 있었다. 정명훈은 그가 말한 대로 말러를 지휘하기 위해 지휘자의 길을 선택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야노프스키 시절부터 정명훈까지 30년간 라디오 프랑스 필에 몸담은 첼로 수석 에리크 레비오누아는 정명훈과 함께할 때 가능한 정신의 모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단순히 ‘좋은 연주’에 그치지 않고 늘 무엇인가를 통해 음악의 혼을 현현시켜 초월적인 경험을 가능케 하는 것이 정명훈이 지닌 차별성이라고 말했다. 단원들은 그와 함께할 때 지금까지 그들이 한 번도 도달해보지 못했던 지점에 닿았다고 말했다. 정명훈은 서울시향 실황 음반에 비해 한층 더 느려진 템포를 통해 마치 조각가가 끌로 형상을 새겨내듯 음악을 빚어나갔다. 한 시간 반이 넘어가는 대장정이 끝나자 뜨거운 박수와 “브라보” 소리가 살 플레옐을 가득 메웠다.
글 김나희(파리 통신원) 사진 Jean-Franҫois Leclerc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