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12월 31일
남산골한옥마을 서울남산국악당
국악계의 연간 통계를 봤을 때, 공연 횟수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상설 공연이다. 살펴보면 삼청각의 ‘자미(滋味)’와 정동극장의 ‘미소-배비장전’은 재미 중심이고, 국립국악원의 ‘토요명품공연’은 전통음악 소개 중심이라 볼 수 있다. ‘평롱(平弄): 그 평안한 떨림(이하 ‘평롱’)’은 올해 남산골한옥마을과 서울남산국악당이 통합·운영하며 내건 상설 공연이다. 보통 상설 공연이 ‘쉽고’ ‘재밌게’를 내건 반면, 정가악회가 무대를 채우는 ‘평롱’은 ‘의미’의 무게가 만만치 않은 작품이었다.
먼저 몇 개의 장면을 살펴보자. 첫 곡 ‘아침을 여는 노래’. 11명의 연주자들은 관·현악 반주가 대동되는 ‘종묘제례악’의 악장(樂章)을 중심박을 치는 타악기 반주만을 대동하여 합창한다. 중세 수도사의 복장을 연상케 하는 그들의 의상과 목소리는 마치 고딕 성당에서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는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사이로 무대 뒤에 펼쳐지는 영상이 눈에 들어온다. 화면에는 종묘제례를 행하는 종묘의 정전(正殿)이 보이고, 악장의 가사를 번역한 한글과 중국어, 일본어와 영어가 동시에 흐른다. 남산한옥마을을 찾는 해외 관광객들의 관람 가능성을 염두에 둔 설정이었다.
두 번째 곡은 ‘나는 걷는다’. 정가악회는 남산골한옥마을·서울남산국악당의 운영 주체가 되기 전 ‘아리랑’ 시리즈를 선보인 적이 있는데, 그중 한 곡이던 ‘긴 아리랑’을 각색한 곡이다. 영상은 어느덧 조선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 서울의 분주한 모습을 담았다. 촘촘히 엮인 선율과 긴박감 있게 흐르는 구음(口音)이 역동적인 서울의 모습을 담은 영상과 자연스럽게 포개졌다.
세 번째 곡은 ‘나는 그립다’. 정가악회는 궁중음악인 ‘정읍사’를 연주하고, 춤사위를 흘리는 무용수의 모습은 무대 위가 아닌 영상 속에 펼쳐진다. 궁중정재를 연행하는 무용수는 화면 속에서 분할·복제되며 독무와 군무를 이룬다. 관객은 ‘1인’의 무용수가 펼쳐내는 영상미에 시선을 빼앗긴다. 무대는 이후 네 개의 곡을 더 선보였다.
세 개의 곡을 놓고 보자면 ‘평롱’은 한마디로 음악과 영상이 어우러진 작품이라 생각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상설 공연이 챙겨야 할 대중 취향에 더 부합하기 위해 영상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게다가 스태프 또한 음악보다 영상과 시각적 장치에 더 많이 투입된 듯 하다(영상감독 장승주·무대 디자인 손호성·조명 디자인 로버트 핸더슨 등).
하지만 ‘평롱’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영상보다는 음악이고, 음악보다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작품에 내재된 문학성이다(정가악회는 음악과 이야기 ‘사이’를 동시에 챙기는 데에 도가 튼 음악그룹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주목’보다 ‘고도의 집중’이 필요하다. 그들의 이야기, 음악은 쉽지 않은 수사와 문법으로 조선과 오늘, 서울과 현해탄을 탐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주는 대로 받아먹는 상설 공연이라기보다는 천천히 씹으며 음미해야 하는 상설 공연이다. 개인적으로 이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대중화’와 ‘쉬움’이 미덕이던 상설 공연의 좌표계에 밑줄 긋고 음미하며 읽어야 할, 의미의 무게를 탑재한 상설 공연이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평롱’이 상설 공연사(史)의 새로운 분기점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사진 남산골한옥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