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이영조와 김택수,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야 ‘내 곡’이 된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7월 1일 12:00 오전

마주한 노장과 청년. 살아온 시대와 살아내는 시대는 각기 다르지만 둘 앞에는 텅 빈 오선보가,

그리고 ‘써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가 공통으로 놓여 있다

두 작곡가는 묘할 정도로 닮은 점이 많았다. 하나, 자신의 곡이 추상(抽象)에 속하는 음악이라 할지라도 본인들의 일기장에는 그 음악과 발표 현장에 대해 구체(具體)적으로 기록해놓았고 그것을 언제든지 공유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또 다른 하나, 곡이란 시장통과 같은 인간사의 현장에서 나온다는 믿음으로 부지런히 현장을 오고 가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 논의하고 수정하고 재설계한다. 그래서 일흔이 넘은 이영조는 늘 바쁘고, 올해부터 코리안심포니 상주작곡가(위촉)로 활동하고 있는 김택수의 발자국 또한 코리안심포니 연습실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듯했다.

들려줄 것이 많은 노장의 작곡가와 질문하고 듣고 싶은 게 많은 청년 작곡가의 만남. 이번 호에는 나의 질문을 최소화하고 둘의 사이로 모든 시간을 맡겨보았다. 이제 둘의 대화 속으로 들어 가보자.

 

오선보에 내 인생을 담기까지

송현민 안녕하세요. 두 분이 초면인데 서로 숨을 고르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으로 이번 대화의 막을 열어볼까 합니다.

이영조 요새 젊은 작곡가들의 실력이 아주 출중하다고 봐요. 세계의 문화와 한국의 문화를 잘 융합하며 그 세대만의 새로운 소리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세대라고 봐요. 그런 점에서 난 택수의 세대가 굉장히 중요한 시점에 서 있다고 생각해요. 택수의 경력을 보니 굉장하더라고. 위촉도 많이 받고 당선도 많이 되고.

김택수 감사합니다(웃음).

이영조 그럼 교만하지 않는 한에서 본인 자랑 좀 해봐요(웃음). 사이트에 나와 있는 자신의 소개를 보니 작곡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기 전에 전공도 남달랐고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서 음악을 자연스레 접한 거 같기도 하고.

김택수 네. 어렸을 적부터 교회에서 음악을 접했어요.

이영조 나도 기독교 가정에 자랐어. 우리 아버지(작곡가 이흥렬)가 음악을 하신 것도 교회의 영향이 적지 않았지.

김택수 제 청소년기에 교회음악의 폭이 넓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기존의 찬송가 외에 가스펠 음악이나 CCM 등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은 교회음악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고요. 저도 거기서부터 음악에 대한 흥미가 생겼어요. 차차 실용음악에 빠지기도 했죠. 그러던 중 기초부터 시작해보자는 생각에 대학에서 작곡 수업을 듣던 것이 인연이 되어서 이 자리까지 왔네요.

이영조 그럼 음악대학에 다시 진학하기 전까지는 무엇을 공부했나?

김택수 화학을 전공했어요. 그전부터 피아노를 좀 쳤고. 사실 화학과 다니면서는 부끄럽지만 학과 공부보다는 밴드 활동을 더 많이 했어요.

이영조 음악하고 바람났던 거네(웃음). 나도 고등학교 때는 이과 공부했어. 의대 가려고. 그런데 음악을 들으면서 공부하니까 공부가 잘 될 리가 없잖아(웃음). 그럼 화학과를 졸업하고 새로 입학을 한 건가?

김택수 3학년으로 학사편입을 했어요. 화학과 다닐 적에 1·2학년 과정은 미리 수강했죠. 사실 이런 진로를 결정하는 데 오랜 고민이 있었어요. 하고 싶었던 거지만 실제로 해보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경우도 있잖아요. 그때는 선교사가 될까 하는 고민도 있었고요.

이영조 난 서양음악을 공부하던 중 큰 전환이 있었어. 연세대 재학 중에 입대했는데 정말 우연한 기회에 국악과 접하게 됐지. 그래서 졸업하고 서울대 국악과로 학사편입을 하고 싶었는데 당시엔 그런 제도가 없었어. 내가 연세대 61학번이야. 아주 먼 이야기 같지? 용산 미8군 사령관실 통역사병으로 근무했는데 하루는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령관이 우리나라 음악에 대해 소개해달라는 거야. 그래서 시립교향악단을 권했는데 그런 거 말고 전통음악을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

김택수 외국 사령관이요?

이영조 그래. 본스틸 대장이었어. 당시에 그런 사람이 국립국악원에 간다니깐 국악원에 비상이 걸린 거지. 우리 아버지는 국악원에 연락을 돌렸고 당시 국악원의 큰 어른들이던 김기수·이주환·장사훈 선생님 같으신 분들이 다 마중을 나오신 거야. 그리고 안내에 따라 악기들을 소개하고 단원들이 연주를 들려줬지. 그런데 그 사령관이 “이 악기들은 당(唐)나라 악기 같은 거 같은데··· 음악 또한 그런 것 아닌가?”라는 거야. 조선시대의 궁중음악이었으니 중국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거지. 당시 당나라나 송나라에서 수입한 것이 많았잖아. 나도 뭔가 자존심 상했었어. 무엇보다 속상한 것은 외국인보다 내가 우리 음악을 더 모른다는 것. 국악을 배워야겠다는 오기도 생겼고. 하지만 나조차도 가야금·거문고가 몇 줄인 줄도 모를 때였으니··· 그리고 그 분과 국악원 마당을 걸어 다니는데 건물 속에서 들려 나오는 국악기와 여창소리가 내 귀를 잡아끄는 거야. 박절과 건축물 같은 화성에 길들여진 나에게 그 소리는 천상의 소리더라고. 그때를 계기로 정재국 선생한테 정식으로 향피리를 배웠지. 단소도 배우고. 그것이 지금 내 음악의 씨앗이 된 거지.

김택수 저도 아악·산조·사물놀이 등 국악을 공부할 필요에 대해서 절실히 느껴서 고민과 연구를 했는데, 막상 어떻게 접근해야하는 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이영조 자네가 그런 것에 대해 경험해보고 고민하고 있다는 생각 자체가 너무 훌륭한데! 한국의 음악은 이론만으로는 배울 수 없어. 내 세대의 불행 중 하나가 국악과 서양을 나눠서 교육시켰다는 거야. 너무 흑백논리였지. 솔직히 말하면 나는 국악이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어. ‘음악’이라 하면 ‘바이올린’ ‘피아노’만 떠올렸지. 나중에 국악 공부를 할수록 그 정적인 느낌이 너무 좋아졌어. 예를 들어 ‘새야새야’ 같은 곡. 이 노래를 불어보면 특유의 호흡과 흐느낌이 느껴져. 굉장히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그 원시성만으로도 현대적인 것을 빚어낼 수 있잖아.

 


▲ 이영조 1943년 출생. 연세대 음악대학 작곡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 뮌헨국립음악대학을 거쳐 미국 아메리칸 콘서바토리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연세대, 아메리칸 콘서바토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원장을 역임한 그는 국내 음악교육의 선진화를 위해 교육 관련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해왔다. 대한민국 화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현재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www.youngjolee.com

나를 담은, 나를 닮은, 나의 곡

송현민 자, 두 분의 소개에 이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시죠. 만나기 전에 두 분 모두 상대방의 곡을 꼼꼼히 들어보고 성향을 파악하신 거 같던데···

이영조 중요한 질문 하나를 해야겠네. 택수야. 신이 어느 날 자네한테 이렇게 말하는 거야. “네 곡을 다 뺏어갈 건데 딱 두 곡만 남겨주겠다!”라고. 그럼 자넨 어떤 곡을 꼽을 거야?

김택수 (웃음) 아··· 굉장히 어려운 질문인데요.

이영조 그래서 한 곡이 아니라 두 곡이라고 했잖아(웃음).

김택수 하나는 지금 쓰고 있는 비올라 협주곡이요. 내년에 코리안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초연해요. 지금은 스케치 단계예요. 앞서 선생님과 나눈 이야기와 관련된 건데, 한국음악의 느낌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작품이에요. 그래서 의미가 있다고 봐요. 무반주 합창곡 ‘찹쌀떡’(2013) 같은 것도 써본 거고.

이영조 아! 나도 그거 들어봤어. 아주 유머와 해학이 깃든 합창곡이던데! 배경의 허밍 속에 자네 특유의 색깔과 화음이 있어서 좋더라고.

김택수 감사합니다. 비올라 협주곡도 비슷하게 접근하고 있어요. 한국의 자장가가 주요 모티프예요. 중요 소재가 되기에 앞으로 자장가를 더 열심히 분석하고 연구하고 있어요. 어떤 분들께서는 “그게 뭐 공부할게 있냐” 하시겠지만요(웃음).

이영조 아니야. 그렇게 오랜 동안 구전으로 내려온 것은 다 이유가 있지. 그래서 작곡가는 늘 분석을 해야 해. 브람스가 10년 넘게 교향곡 1번을 썼다고 하잖아. 긴 시간 동안 베토벤의 어깨 위에 올라타서 끝내 자신의 날개를 펼친 거지.

김택수 그런데 그 ‘한국적’이라는 게 저희 세대에게는 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도 해요. 세계와 한국의 문화가 뒤섞여 있는 것도 ‘한국적’이 될 수 있거든요. 제가 한국적인 음악을 고민하면서 동시에 여러 음악을 같이 할 수 있는 것도 이런 환경에서 음악을 듣고 자란 세대이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팝·록·재즈도 한국 문화의 하나가 된 시대잖아요. 그래서 이런 감수성을 가감 없이 보여줄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영조 내가 예전에 ‘음악교육신문’의 칼럼을 통해, 요약하자면 “구태여 한국적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라는 주장을 한 적이 있어. “그냥 본인이 쓰고 싶은 대로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가 말하는 한국적인 것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다”라고. 그것이 자네 세대는 좀 자연스러울 거야. 러시아 곡에서 러시아 냄새가 나고 독일 곡에서는 독일의 냄새가 나지? 그런데 그들은 “독일적으로 쓰자” “러시아적으로 쓰자”하면서 쓰지는 않았다고. 때로는 택수가 ‘그냥’ 쓴 곡 안에 ‘택수적인 것’이 있고 더불어 ‘한국적인 것’이 들어가 있기 마련이야. 그런 것을 외부자들이 볼 때, “아, 이 곡 안에는 한국적인 것이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런데 자네가 비올라 협주곡을 말해서인지 나도 내 곡 중에 한 곡이 떠오르는데!

김택수 어떤 곡인가요?

이영조 첼로·대금·타악기를 위한 ‘모리’(2013)라는 곡이야. 작년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 정명화 선생이 초연했고 타악기로는 소리북을 썼어. ‘모리’는 한국 음악 장단에 사용되는 ‘중모리’ ‘자진모리’ 등에서 따온 말이야. 첼로 주자에게 요구한 게 많은 곡이었거든. 예를 들어 첼로에서 해금 소리 같은 것을 내라는 등.

김택수 악보에 직접 그렇게 쓰셨어요?

이영조 응. 활을 브리지에 가까이 대고 “깽깽”하는 콧소리를 내시더라고. 아! 자네 비올라 콘체르토 쓸 때 너무 ‘한국적인 것’만 강조하면 안 돼. 그럼 종족음악이나 민속음악 같은 지역사회의 음악으로 돼버린다고. 난 작곡가의 시대적 감각이 입혀진 중용의 도가 있어야 한다고 봐. 그럼 두 곡을 물어봤으니 나머지 한 곡도 말해주게.

김택수 이번 달에 미국에서 초연 예정인 ‘바운스!!’(2014)라는 곡이고, 체임버 규모로 생각하시면 돼요.

이영조 바운스? 타악기를 많이 쓴 느낌인데?

김택수 타악기도 좀 썼어요.

이영조 어떤 계기로 쓰게 된 건가?

김택수 학교 운동장에 운동하러 갈 때마다 농구공 튕기는 소리가 가장 먼저 들렸어요. 그래서 그걸 이용해 곡을 써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쓰게 됐어요.

이영조 하하. 재밌는 영감을 얻었네.

김택수 그러니까요. 저는 소재를 멀리서 찾기보다는 주변에서 찾는 스타일이에요.

이영조 작곡가는 심오하고 릴렉스 한 것 사이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해. 나는 작곡가는 양복장이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 만약 한쪽 팔 없는 사람이 와서 양복 제작을 의뢰하면 팔이 없는 대로 만들어줘야 하잖아. 지금은 자네가 공부하면서 자신의 음악과 스타일을 찾아가는 과정이지만, 40세 즈음이 되면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이 있고, 그것도 잘 살펴야 해.

김택수 사실 저도 그런 부분에 대해 선생님께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저는 실용음악도 했고, 편곡작업도 많이 하면서 여러 장르의 음악을 접해봤어요. 그러면서 저의 장점이 다양한 음악의 스타일과 특징을 빠르게 파악하는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요새는 거꾸로 ‘너의 정체성이 뭐냐’ ‘스타일이 뭐냐’라는 질문 앞에 놓이게 될 때가 굉장히 많아요.

이영조 그렇지! 미술에서 기초색인 무지개의 일곱 색은 음악의 계이름 일곱 개와도 같아. 일곱 개의 색을 다 섞으면 까만색이 되듯 현대음악도 조성을 다 섞어버리니 조성이 없어진 듯한 무(無)조성이 되는 거거든. 내가 봤을 땐 택수가 그런 환경 가운데서도 자기 감각을 잘 찾으며 헤쳐 나가는 젊은 친구라는 것이 느껴지더라고.

김택수 감사합니다. 다양한 곡을 접하며 여러 스타일에 대해 공부하다보면 ‘이런 필요와 이유에 의한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현대음악도 마찬가지죠. 난해하다고 평가되는 그 음악들도 어떤 흐름과 사조를 반영하고 있잖아요. 한국적인 것도 그렇고요. 일전에 국악 연주자들과 공동작업 할 기회가 생겨서 한국 곡 중에 아악(雅樂)과 같은 전통음악에 영향을 받은 곡들을 찾아봤어요. 이런 과정이 정체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이영조 현대 음악이 어렵다고들 하는데··· 그럼 18세기 바흐의 음악은 쉬운가? 음악이란 다양한 경로와 교육을 통해 발전·성장 하는건데 본인들이 좋아하고 알고 있는 그 한계에만 머물러 있어서 그렇지. 그리고 요새 젊은 작곡가들이 “21세기인데 구태여 ‘한국적’인 게 별 거 있나요?”라고 하지만 해외로 나가보면 한국적인 것에 대한 요청을 많이 받아. 나 또한 한국의 민속에 관심을 가졌고 그러한 것들을 어떻게 현대화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내 자신에게 강조하면서 합창곡 ‘경(經)’(1975)을 쓰기도 했고. 자네 세대는 세계화가 가속화될수록 이런 자세가 더 필요하게 될 거야.


▲ 김택수 1980년 출생. 서울과학고와 서울대 화학과 졸업 후 서울대 작곡과에 편입하여 본격적으로 작곡을 공부했고, 현재는 인디애나 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중앙음악콩쿠르 작곡 부문 1위,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 중앙일보 특별상을 수상한 그는 2011년 ‘객석’의 유망주로 선정된 바 있으며 현재 코리안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주작곡가(위촉)로 활동 중이다.
www.texukim.com

다른 세대, 통하는 마음

송현민 두 분의 만남이 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웃음). 두 분은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연배 차이가 납니다. 이영조 선생님의 세대는 해외 유학도 어려웠고 귀국 후에는 우리 악단(樂壇)의 발전을 위해 선진국의 음악문화를 들여오는 데에 노력해야 했고, 무엇보다도 창작이라는 풍토 자체가 조성되어 있지 않았던 시기였잖아요. 김택수 씨가 바라보는 이영조 선생님의 세대에 대한 인상은 어떠한가요?

이영조 우리 세대를 잠깐 말해야겠네. 1943년생인 나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한참 위로 강석희(1934~), 백병동(1936~) 선생님이 계시고 아래로는 이만방(1945~), 이건용(1947~) 선생이, 그 한참 아래로 구본우(1958~) 등이 있어. 사실 우리 세대는 작품을 연주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에 택수 세대가 잘 들어보지 못했을 거야.

김택수 그래도 선생님의 음악은 꽤 들었어요, 신기하게도(웃음). 사실 선생님 세대에 대해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한국의 음악적 환경이 탄탄하지 않았던 때인 건 확실하기에 ‘굉장히 고생하면서 공부하셨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우리 세대는 모든 자료가 다 있거든요. 그러나 선생님 세대는 정보에 있어 물리적 제한을 받은 아날로그 세대잖아요.

이영조 맞아. 방향도 혼란스러웠고. 내 아버지 세대는 ‘자동차’를 얘기해야 하는데 ‘자전거’밖에 없었던 세대였고, 내 세대는 ‘오토바이’라도 있던 세대였지. 자네 세대는 자동차가 아니라 우주선을 말하는 세대 아닌가?

김택수 네. 선생님 세대의 특징은 각자가 작곡가로서 강한 철학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점이 작곡가로 버티는 데 큰 다는 생각하고요.

이영조 맞아. 내가 택수처럼 공부할 때는 참 힘들었어. 그 당시는 이걸 해보려면 여기를 가야 하고, 저것을 해보려면 저길 가야 했지. 사례와 정보가 없으니 낭비되는 시간도 많았고.

김택수 그런데 선생님의 근작들을 들어보면 어떤 여유가 느껴지는 것도 재밌어요.

이영조 택수는 나랑 세대도 다르지만 스타일도 다른 거 같아. 택수의 곡은 새파란 불꽃같고 날카로운 면이 있어. 그래서 나한테는 좀…(웃음) 언제부터인지 베베른이나 쇤베르크 같은 스타일이 신경질적으로 느껴지더라고. 나는 퍼진 음악이 좋아! 달라서 나쁘다는 게 아니라 작곡가라면 캐릭터가 있어야 하고 또 다 달라야 한다는 말!

송현민 한국에서 작곡가로 산다는 것에 대해 물어보려고 합니다. 아, 이렇게 질문하면 작곡가와 작곡계의 현실이 나올 거 같은데요. 곡을 쓰면서 힘든 점?

이영조 택수의 세대는 작곡에 준하는 ‘자본’이 생기는 시대야. 사실 우리 세대는 지금이야 작곡료를 당당히 받지만 과거에는 작곡료라는 개념이 없었어. 근래에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창작산실 지원사업’도 실행하고 있지 않나? 내 나이 쉰만 됐어도 그 기금 열심히 받으며 곡 쓸 텐데, 지금은 후배들 챙겨줘야지.(웃음)

김택수 사실 공부를 마친 후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는데, 감사하게도 지금은 국내에 작곡가를 지원하는 여러 방법이 많아지고 있는 추세예요. 제게 기회가 주어진 ‘코리안심포니 전속작곡가 지원사업’도 여기에 포함되죠. 이런 지원제도와 기회는 선진국이라 생각하는 미국에서도 극히 드문 경우고요.

이영조 지금 해외 유학생들과 젊은 연주자들이 차이콥스키 콩쿠르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같은 세계 유수의 콩쿠르를 휩쓸고 있잖아. 2012년에 벨기에 공영방송 RTBF에서 이런 한국음악가들이 저력이 궁금해서 그걸 분석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적이 있어. 제목이 ‘한국 클래식의 수수께끼(Le Mystere Musical Coreen)’인데, 우리식으로 말하면 한국 클래식계를 대상으로 ‘그것이 알고 싶다’를 찍은 거지. ‘어떻게 1,500년의 역사를 가진 음악의 본 고장을 제치고 음악을 수용하고 받아 들인지 150년밖에 안 되는 한국이 어떻게 그걸 석권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분석을 하는 다큐멘터리야. 그러고 보니 택수 자네도 거기서 취재를 해야 했단 생각이 드는데! (웃음) 그 때 한국에 취재 나온 그 프로듀서가 나보고 이런 말을 하더라고. “한국 음악가들, 연주가들은 이제 테크닉은 최고입니다. 테크닉에 밀리던 표현력도 최고에 이르렀고요. 그런데 앞으로 이 젊은 연주자들이 모차르트·베토벤 말고 ‘당신들의 음악’을 다뤄야 정말 최고 아닌가요?”라고. 그게 바로 작곡가한테 하는 말인 거잖아? 사실 연주자들을 만나보면 그들 또한 “우리도 좋은 우리 곡 있으면 스스로 찾아서 합니다”라고 해. 결국 시대와 그 문화를 대표하고 책임지는 좋은 곡이 없는 거지. 이제 ‘김택수’와 자네 세대가 그런 걸 써야 하는 거라 생각해. 큰 책임이 있는 세대야. 나는 그렇게 믿어! 꼭 그런 곡을 쓰기를!

사진 심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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