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

로미오를 이끄는 줄리엣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0월 1일 12:00 오전


▲ 일러스트 김윤명

줄리엣. 사실 그녀는 로미오의 줄리엣이 아니다. 사랑의 열병을 앓던 소년을 구한 구원자이자 시대가 만든 영원불멸한 사랑의 히로인이다

“대체 몬태규가 뭔가요? 손도 발도 아니고, 팔도 얼굴도 사람의 몸 어느 부분도 아니잖아요. 오, 다른 이름이 되어주세요. 이름이 대체 뭐란 말인가요? 우리가 장미라고 부르는 꽃은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역시 향기로울 거예요… 로미오, 그 이름을 버리고, 당신의 몸과는 아무 상관없는 그 이름 대신 제 몸을 고스란히 가져가세요.”

무도회에서 우연히 만나 불같은 사랑에 빠진 밤, 줄리엣은 로미오가 숨어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 발코니에서 이렇게 독백한다. 로미오는 그 말을 받아, 자기 이름을 바꾸겠다고 호언하며 줄리엣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부터 둘 사이에 현란한 말솜씨의 대화가 오고 가는데, 로미오가 하는 말은 그저 사랑에 빠진 남자의 들뜬 감정 표현일 뿐이지만 줄리엣은 그의 말을 가로채고 수정해가며 체계적으로 결혼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향해 대화를 주도해간다.

사랑에 취해 “꿈이냐, 생시냐”를 외치고 있는 로미오에게 줄리엣은 “당신의 애정이 진정이고 나와 결혼할 생각이 있다면 내일 사람을 보내겠으니 언제 어디서 결혼식을 올릴 건지 알려주세요”라고 단번에 쐐기를 박는다. 결혼을 주도한 것도 줄리엣이었고, 로미오가 추방된 뒤 자신이 원치 않는 패리스 백작과의 결혼을 피하려고 목숨을 걸고 약을 먹은 것도 줄리엣이었다. 여성으로서 부모의 정혼을 무시하고 사랑을 관철하기 위해 자신이 정한 남자에게 맹세와 결혼을 요구하는 줄리엣의 대담함은 셰익스피어 자신이 살아가던 르네상스 시대의 활력과 생동감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의 에필로그에서 ‘줄리엣과 그의 로미오 이야기’라는 표현을 썼다. ‘로미오와 그의 줄리엣’이 아니라.

사실 줄리엣은 로미오의 첫사랑이 아니었다. 로미오는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로절린이라는 도도한 처녀에게 깊이 빠져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고통에 신음하고 있던 중 줄리엣을 만났고, 첫눈에 줄리엣에게 빠져드는 순간 로절린에 대한 그의 집착은 명왕성 너머로 날아간다. 그러니 만일 줄리엣이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다면 로미오는 이후 또 다른 처녀에게 반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이들의 관계가 ‘불멸의 사랑’이 된 것은 운명의 장난으로 결혼하자마자 함께 죽었기 때문일 뿐, 이들의 사랑이 절대적이어서는 아니었던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이 초기 비극의 주제는 오히려 ‘젊음의 열정이 얼마나 무모하고 변하기 쉬운 것인가’ 또는 ‘권태와 열정은 동전의 양면’임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삶이 그처럼 한가롭지 않았더라면, 예를 들어 현재 대한민국 청소년의 삶을 살았더라면 서로에게 그렇게 쉽게 빠져들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희곡의 첫 출판은 1597년이지만 집필 연대는 1595년으로 추정된다. 셰익스피어가 몇 년의 습작기를 거쳐 본격적인 작품을 쓰기 시작한 시기일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원수 가문 사이의 사랑 이야기’와 ‘수면제로 결혼을 회피하는 이야기’라는 두 편의 분리된 이야기가 존재했다. 1530년에 이탈리아 작가 반델로가 이를 하나로 결합했고, 이 작품이 인기를 끌어 당시 다양한 번안이 등장했다. 셰익스피어는 영국 작가 아서 브룩의 운문 번역 ‘로메우스와 줄리엣의 비극적인 이야기’(1562)를 참고로 해 ‘로미오와 줄리엣’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 반델로의 원작에서는 전체 스토리 진행에 9개월이 걸리지만 셰익스피어는 이를 5일 동안 일어난 일로 축약해 극적 긴장감을 높였다. 대사 안에 요일에 대한 언급을 넣어 더욱 현실감을 강조하기도 했고, 유모와 머큐쇼, 티볼트 등의 성격 묘사 역시 이미 셰익스피어가 탁월한 경지에 도달한 극작가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이 로미오를 이끄는 줄리엣 이야기인 만큼, 구노의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의 여주인공이 1막의 아리아 ‘꿈속에 살고 싶어’나 로미오와 주고받는 마드리갈 ‘고귀한 천사여’에서 지극히 대담하고 도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해도 놀랄 것은 없다. 줄리엣은 극 속에서 열네 살도 채 안 됐지만 수많은 비극 속의 청순가련형 처녀들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구노는 셰익스피어 원작에 없는 줄리엣과 패리스의 결혼식 장면을 오페라에 삽입하고, 원작에 들어 있던 줄리엣 무덤가에서 벌어지는 로미오와 패리스의 결투 장면을 없앴다. 원작과 달리 오페라에서는 줄리엣이 깨어난 뒤 이미 독약이 몸에 퍼진 로미오와 함께 사랑의 이중창을 오래도록 부르고 나서 신의 용서를 구하며 함께 죽는다. 오페라에서는 원작의 유머와 해학을 덜어내고 낭만주의 특유의 절실하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강조해 극적 몰입도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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