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보 예르비
그 남자의 지휘봉
그는 음악으로든 아니든 사람을 잡아당긴다. 그 자기장에 신시내티 심포니가 끌려가 ‘뉴 빅 5’ 오케스트라가 됐고, NHK 심포니는 수석 지휘자 자리를 만들어 그를 잡았다. 올해로 5년째 한국을 찾는 파보 예르비는 12월, 도이치 카머필하모니와 브람스 사이클을 갖는다. 그는 내년, 내후년에도 한국 팬과 만나고 싶어 한다
‘마에스트로’ 대신 ‘파보’로 불러라!
예전에 ‘객석’에 다닐 땐 12월호를 준비할 때가 좋았다. ‘올해의 음반’ 설문조사를 위해 한 트랙씩이지만 앨범을 무더기로 들을 수 있어서였다. 12년 전 이맘때가 그랬다. 당시 편집장과 선임 기자는 테이블에 놓인 ‘똥판’을 걸러내며 암호 같은 대화를 이어갔다.
“파보 예르비 버진(Virgin Classics) 어때?”
“선배, 요즘은 텔락(Telarc)이 좋아요. 아버지 거랑 달라요.”
레퍼토리를 생략하고 레이블로 음반이 어땠는지 논하는 그들을 통해 처음 ‘파보 예르비’라는 이름을 접했다.
2008년 공연 기획사에 들어가니 대표가 도쿄에 사는 동안 어느 공연이 좋았느냐고 물었다. 2007년 일본에서 본 인상적인 공연은 파보 예르비와 도이치 카머필하모니의 베토벤 시리즈였다. 그해 여름, 대표 역시 예르비/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의 브람스를 보러 요코하마로 갔다. 공연 시간이 2시간이 채 안 됐는데 사인회는 한 시간이 넘었다. 지난해 본 관객을 또 만나 웃고 떠들며 사인하다가 한 잔씩 맥주를 들이켜는 모습에 대표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때 한국에선 생소한 신시내티 심포니 내한 공연을 추진하기로 했다.
2009년 신시내티 심포니는 악단의 재정 문제로 내한을 취소했다. 이듬해가 돼서야 예르비가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을 이끌고 처음 한국 땅을 밟았고, 웰컴 리셉션을 위해 나는 김해공항에서 부산으로 그를 태워 가는 운전사가 됐다. 이름을 알게 된 지 8년 만에 처음 대화를 나누게 됐다. 뒷좌석에 앉은 그는 선글라스를 낀 채 “한국 관객은 브루크너를 안 좋아하느냐”고 퉁명스레 물었다. 말투엔 곡목을 ‘로컬’의 요구로 브루크너에서 드보르자크로 바꾼 것에 대한 불만이 배어 있었다. 나는 “한국 관객도 브루크너를 좋아한다”고 둘러댔다. ‘블라디미르 푸틴’, 그게 예르비를 직접 대한 첫인상이었다.
부산에서 계속 그를 수행했다. 냉면을 먹을 땐 가위로 내가 그의 것을 잘라주었다. APEC 누리마루에서 열린 리셉션을 가보니 그곳은 또 하나의 콘서트였다. 예르비가 흥겹게 술을 마시는 동안 단원, 악단 매니저, 투어 에이전트가 술잔을 들고 그에게 향했다. 그리고 민원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민원은 얼굴을 보고 이야기해야 잘 풀리는 것들이었다. 농담처럼 앙코르에서 누구를 일어나라고 하는지 분명히 지목해 달라는 단원, 투어하는 도시에 지휘자가 좋아하는 체인 호텔이 꽉 차서 다른 5성급도 괜찮으냐는 매니저의 양해까지.
나는 그를 호텔로 데려가야 하니 술도 안 먹고 네 시간을 기다렸다. 돌아가는 차에서 예르비는 ‘마에스트로’ 대신 ‘파보’라고 부르라 했다. 그냥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말 한마디, 그 말 하나에 서운함이 다 녹았다. 나도 그의 충직한 부하가 된 것 같았다.
그는 음악으로든 아니든 사람을 잡아당긴다. 그 자기장에 신시내티 심포니가 끌려가 ‘뉴 빅 5’ 오케스트라가 됐고, NHK 심포니는 수석 지휘자 자리를 만들어 그를 잡았다. 이제 파보 예르비는 5년 연속 한국을 방문한다. 12월 1·2·4일, 대구와 서울에서 도이치 카머필하모니와 브람스 연주를 갖는다. 그는 2015·2016년에 이어 2018·2020년까지 한국 팬과 만나고 싶어 한다. 그에게 한국은 무엇인가? 12월 내한 공연을 한 달여 앞두고, 필하모니아 공연을 준비하는 그를 런던에서 만났다.
아시아 시장과 파보 예르비의 상관관계
지난 11월 11일 오후 7시, 템스 강 근처의 헨리우드홀. 필하모니아에는 예르비와 첼리스트 스티븐 이설리스의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2층에서 혼자 리허설을 바라보는 여인이 보였다. 파보 예르비의 소속사 해리슨 패럿(Harrison Parrott)의 담당 매니저였다.
매니지먼트사의 수입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악단에 아티스트를 공급하고 얻는 수익이고, 또 하나는 악단을 대신해 각지의 프로모터들과 투어 조건을 협의하고 거래가 성사되면 개런티 일부를 수익으로 가져간다. 런던 심포니는 아스코나스 홀트(Askonas Holt), 런던 필은 IMG 런던, 필하모니아는 해리슨 패럿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2016년 여름, 파리 오케스트라에서 물러나는 예르비의 행보를 점치려면 거론되는 악단과 해리슨 패럿의 친밀도를 봐두는 게 좋다. 해리슨 패럿에게 파보 예르비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한국과 일본, 중국 시장이 그를 좋아한다는 걸 잘 안다.
아시아에서 파보 예르비를 먼저 알아본 건 일본이었다. 1990년대 도쿄 심포니가 객원 지휘자로 그를 불렀고, 2000년대 들어 재팬 아츠와 가지모토 콘서트 매니지먼트가 예르비와 함께하는 오케스트라들의 일본 공연권을 번갈아 가져갔다. 요코하마 미나토 미라이홀과 도쿄 오페라시티 콘서트홀 역시 예르비가 지휘하는 베토벤·브람스·슈만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열고 있다. 흥행과 비평이 모두 호조를 보이니 도쿄에선 한 달에 두 오케스트라로 번갈아 예르비를 만나기도 한다.
NHK 심포니는 BBC 프롬스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그와 공연했지만 재초청을 성사시킬 악단의 구심점이 없는 것을 아쉬워했다. 현재 물밑에서 예르비의 이름으로 유럽 투어 작업을 진행 중이고 NHK 심포니도 중국·한국 투어에서 반일 감정을 누그러뜨릴 카드로 예르비만 한 지휘자를 찾기 어렵다. 예르비에게 서울은 몇 년에 한 번 찾아와 눈도장을 찍는 곳이 아니라 매 시즌 자신의 현재를 가감 없이 나누는 중요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리허설을 마치고 예르비가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예르비는 ‘객석’을 잘 안다. 두 차례, 프랑크푸르트로 자신을 찾아온 기자들의 인상착의도 기억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마에스트로 무비’에도 그가 표지로 실린 ‘객석’ 2010년 5월호가 등장한다.
여느 때처럼 대기실은 문이 열려 있었고 예르비가 보였다. 2013년 12월 내한 공연 당시 도이치 카머필하모니 단원들이 뒤풀이에서 ‘강남 스타일’에 맞춰 말춤을 추는 걸 보고, “이것이 우리의 스피릿(spirit)”이라고 하던 그와 1년 만에 만났다. 이하 파보 예르비와의 일문일답.
여러 악단의 감독인데, 객원으로 다른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건 당신에게 어떤 혜택이 있나.
감독을 맡은 오케스트라에서 한발 떨어져 스스로를 돌아보고 객관화할 수 있다. 런던 소재 오케스트라를 오래전부터 지휘했지만 친밀한 관계를 맺은 곳은 여러 투어를 함께한 필하모니아가 제일이다.
2014/2015 시즌 필하모니아와의 두 차례 프로그램은 하이든 교향곡 82·88번,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과 피아노 협주곡 5번, 그리고 닐센 교향곡 1·4번으로 짜여 있다. 무엇보다 하이든 교향곡이 눈에 띈다.
언제나 나는 하이든을 사랑했다. 어릴 때부터 가장 좋아한 작곡가라 말할 수 있다. 아버지(네메 예르비) 옆에 앉아 하이든 교향곡을 네 손을 위한 피아노 편곡 버전으로 치면서 자랐다. 하이든을 지휘하면 어릴 때 생각이 많이 난다. 필하모니아와 닐센 시리즈를 논의하면서 하이든을 첫 곡으로 넣자고 제안했다. 나는 하이든이 더 자주 연주되고 알려져야 한다고 믿는다. 닐센 교향곡을 들어보지도 않고 어렵다는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다가가기 위해 하이든은 썩 잘 어울리는 첫 곡이다.
다른 곳에선 첫 곡으로 아르보 패르트나 에르키 스벤 튀르의 곡을 택한 경우도 있었다.
하이든은 닐센을 잘 연주하기 위해 취한 전략적 선택이다. 하이든을 연습하다 보면 오케스트라가 훈련된다. 닐센을 위해 필요한 합주력을 끌어올리는 지렛대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이든이 연주되면 예민한 관객은 평소엔 들리지 않던 걸 잡아낸다. 보통은 관객들이 이때 상상력을 사용하는데, 그 원리대로 닐센의 소리를 잡아내길 바란다. 하이든과 닐센 모두 ‘드러내는’ 음악이다. 공유하지 못한 무언가를 숨기는(hide) 게 하이든(Haydn)에선 어렵다.
2015년 가을, NHK 심포니 수석 지휘자로 취임한 후 R. 슈트라우스와 닐센 프로젝트를 할 예정인데.
닐센은 이 시대 주목받아 마땅한 위대한 관현악 작곡가다. 2015년이 닐센 탄생 150주년이니 어디서든 더 자주 연주돼야겠지만 나는 NHK 심포니에 부임하고 2년쯤 지나 닐센 교향곡을 조명하려 한다. 2015년 2월부터는 ‘영웅의 생애’를 시작으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NHK 심포니는 독일 레퍼토리에 강하다. 아버지는 ‘아시아의 베를린 필’이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다. 녹음 작업이 병행될 것이다. 닐센과 슈트라우스는 기념 연도와 상관없이 자주 연주할 생각이다.
아버지인 네메 예르비도 R. 슈트라우스 작품을 오래 지휘했다. 슈트라우스를 지휘할 때 부친의 가르침을 상기하나.
언제나 아버지 영향을 받았다.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집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연습하던 게 생각난다. 에스토니아 오페라하우스에서 ‘장미의 기사’를 리허설하던 모습도 생생하다. 아버지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전곡에 능한 분이다. 그런 기억을 갖고 있는 게 축복이다.
NHK 심포니와는 2002·2005년 단 두 차례 연주했는데 수석 지휘자가 됐다. 어떤 인연이 있었나.
투어 형태였기에 그들과 오래할 수 있었다. 음악적으로 서로 만족하는 크기가 컸다. 여러 사조를 함께하면서 내 장점을 보였고, 투어를 다니는 중에 그들이 누군지 알게 됐다. 이들과 말러·브루크너·쇼스타코비치와 프랑스 레퍼토리를 어떻게 가져갈까 기대하고 있다. 기존에 알던 NHK 심포니는 강력하고 기계 같은데, 지휘를 하면서 이 오케스트라에서 거친 독일 지휘자들의 자취를 느낀다. 결국에는 브루크너에서 우리의 뜻이 맞지 않을까 싶다.
한때는 동시에 파리 오케스트라·도이치 카머필하모니·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의 수장을 맡았는데 이젠 줄이기로 한 것인가.
가급적 도이치 카머필하모니와 NHK 심포니에 집중하려 한다. 대부분의 지휘자가 한 곳의 감독을 맡지만, 나는 두 곳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스케줄을 조절하는 기준은 레퍼토리다. 어느 작품을 어느 오케스트라와 할지를 기준으로 삼기에 여행이 많다는 걱정은 고맙지만 충고는 사양한다. 가령 그리그 교향곡을 어디서 할 것인지의 이슈를 두고 본다면 함께 연주 여행이 가능한 에스토니아 내셔널 심포니를 택할 수 있다.
한국 팬 입장에선 일본과 가까운 한국 오케스트라도 가끔 지휘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정명훈이 서울시향과 함께하고 있다. 한국 오케스트라가 한국 지휘자와 함께 성장하는 것이 더 훌륭한 일이다.
우리는 록 밴드 정신을 따라간다!
데이비드 코널리 감독은 당신을 두고 음악 다큐멘터리 ‘마에스트로 무비’를 만들었다. 위기에 처한 미국의 클래식 음악을 다룬 걸로 알려졌는데, 어떻게 함께 작업했는지.
신시내티에서 코널리와 나는 같은 빌딩에 집이 있었다. 그가 한 번도 클래식 공연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길래 내가 끈질기게 오라고 해서 결국 신시내티 심포니 공연을 봤다. 그는 이렇게 좋은 걸 처음 알았다고 했다. 그러곤 미국 청년들이 왜 클래식 음악 공연에 가지 않는지 조명하기 위해 투어에 동행하면서 연주회장 뒤 풍경을 찍었다. 코널리는 미국 내 예술 분야 공교육의 부실함이 원인이라고 결론지었다. 동감이다. 한국에 올 때마다 놀라운 점이 이것이다. 어떻게 젊은이들이 클래식 음악에 집중하는지 말이다. 일본이나 중국과는 또 다르다. 내가 한국을 사랑하는 첫째 이유다. 지난해 도이치 카머필하모니 공연 후 반응은 록 콘서트를 방불케 했다. 나와 도이치 카머필하모니도 역시 록 밴드의 정신을 지향하는데 그것이 맞아떨어졌다.
도이치 카머필하모니와는 밴드를 함께하는 심정인 건가.
지난 20년간 도이치 카머필하모니와 함께했다. 이들과 함께 나이 드는 걸 즐긴다. 나이가 들수록 더 잘하는 밴드가 되고 싶다. 우리는 서로 뭘 원하는지 말을 안 해도 아는 사이다.
12월 한국에서 브람스 시리즈를 함께하는 협연자는 어떻게 정했나.
백건우는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다. 크리스티안(바이올린)과 타냐 테츨라프(첼로) 남매는 그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봐온 연주자다. 문자 그대로 혈육이어서 가능한 음악을 선보인다. 나 역시 유명 연주자들과 브람스 이중 협주곡을 해봤다. 그들과 서로 잘 섞이려고 노력했지만 이 가족의 연주는 차원이 다르다. 같은 집에서 자란 힘이다. 이들 남매의 협주곡을 들으면 이것이 실내악이란 걸 알게 된다. 메커니즘 면에서 우리와 잘 맞는다.
브람스 협주곡에서 솔로 악기를 대하는 관점은 어떠한가.
브람스 협주곡은 작품의 길이나 오케스트레이션, 협연자와 오케스트라의 상호작용을 교향곡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차이콥스키와 같은 솔로와 투티(합주)의 교환이 아니라 투티와 투티의 연속이다. 솔로 주자들이 협연자가 아니다. 피아노 협주곡의 피아노도 오케스트라의 일부다.
2008년엔 브람스 사이클을 대편성인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과 함께했다. 도이치 카머필하모니의 브람스와 어떤 차이가 있나.
프랑크푸르트의 어택은 규모가 크고 전통적이다. 도이치 카머필하모니의 접근은 작지만 도전적이다. 밸런스도 다르고 템포의 유연성은 배가된다. 브람스 교향곡은 절대음악인 동시에 말을 걸어온다. 도이치 카머필하모니는 40명 규모로, 브람스가 극단을 취하면서 전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가볍지만 절도 있게 전달할 수 있다. 기성 연주는 브람스를 무겁게 다뤘다. ‘절도’, 모데라토를 보는 관점이 조금씩 다르다.
브람스가 작곡한 교향곡들 사이의 발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하다.
교향곡 1번에선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에 대한 부담이 역력하다. 2번에선 전원풍의 신실하고 솔직한 브람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3번에선 온갖 종류의 향수와 사랑에 대한 번민이 흠씬 풍긴다. 4번에선 파사칼리아와 베리에이션을 통해 상념들을 종합한 만년의 브람스가 있다. 가장 지적이면서 해석이 어려운 게 4번이다.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서로 다른 네 자식 같은 존재들이다. 유사점도 있지만 차이점이 더 많다. 그는 낭만주의를 살았지만 중세 바로크에 명석했다. 예를 들면 교향곡 4번 4악장 트롬본 코랄에선 바로크와 교회음악의 흔적이 보인다. 옛것과 새것의 융합이 브람스 교향곡을 이해하는 열쇠다.
원전이나 역사주의 방식, 시대악기적 접근으로 브람스 교향곡을 볼 때의 한계는 무엇일까.
우리 목표는 브람스 당대에 어떻게 연주되었는지에 대한 역사 연구가 아니다. 도이치 카머필하모니를 벗어나면 나도 브람스에서 관악기 편성을 늘려 볼륨을 시험하기도 한다. 작곡 당시 악기가 어떤 기술적 제약을 갖고 있었는지, 내가 지휘할 오케스트라는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고려해 해석을 얼마든지 달리한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브람스라고 하면 대가의 이미지로 그들을 포장해 작곡가들의 인간적인 경험들을 간과한다. 난 초상화에서 담배를 문 브람스나 큰곰처럼 무뚝뚝한 이미지로 브람스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지우고 싶다.
브람스 교향곡에서 구조를 만드는 것과 스토리를 말하는 것 사이의 균형은 어떻게 가져가는가.
브람스의 천재성은 곡을 구조적으로 쓴 것이다. 빛나는 재능이며 업적이다. 구조를 만드는 것 자체가 브람스에선 하나의 예술이 됐다. 그러나 구조에 매혹되어 작품 해석의 중심을 한쪽으로 몰아선 안 된다. 음악이 스스로 이야기를 노래할 수 있게 구조를 조금씩 풀어야 하는데 그 점이 가장 어렵다. 구조에 함몰되면 실황 연주에서 우연성을 기대하기 어렵고 그저 지적으로만 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연이 끝나고 누군가가 “오늘 구조가 잘 보였어요”라고 말하면 그 공연은 망쳤다고 생각한다.
2015년 말에는 슈만 프로젝트로 한국을 찾는다.
슈만은 인생이 불행했고 브람스와 비교되는 가여운 존재, 형식미는 없고 울림은 애매한 교향곡 따위로 오해받는 작곡가다. 하지만 그는 진정한 천재다. 슈만 교향곡도 마찬가지로 오래된 먼지를 털어낼 그림으로 본다. 그동안 많은 오케스트라가 슈만을 브람스처럼 바라보며 연주했다. 브람스 교향곡은 기쁨과 슬픔의 표현이 분명하다는 면에서 외향적이다. 반면, 슈만은 교향곡에서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감정을 과장하는 그만의 방식이 있다. 슈만의 다성음악은 중세 교회음악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문헌에서 확인되는 시적 감성들과 슈만식 멜랑콜리는 거기에서 출발한다. 교향곡 4번 마지막 악장을 보자. 조울에 이은 느닷없는 변심 같은 특유의 표현이 나오는데 그 감정의 낙차를 분명한 윤곽과 운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연주다.
인터뷰를 마치고 헨리우드홀 매니저와 예르비의 사진 촬영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관 시간이 지나서 조바심을 냈는데 홀 매니저는 마음 놓고 진행하란다.
“파보는 참 좋은 사람이죠? 제가 홀 관리자이지만 여기 리허설 오는 지휘자와 직접 이야기할 기회는 잘 없어요. 파보는 여기 올 때마다 먼저 안부를 물어봐요.”
그 역시 ‘마에스트로’ 대신 ‘파보’라 부를 수 있는 관계자였다. 오케스트라가 자발적으로 충성하듯 그 역시 퇴근 시간을 늦추며 예르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언젠가 사인회를 기다리며 들떴던 서울의 관객처럼.
글 한정호(런던 통신원) 사진 박용빈
파보 예르비/도이치 카머필하모니의 브람스 사이클
12월 1일 오후 7시 30분 대구 수성아트피아 용지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Op.77(크리스티안 테츨라프 협연), 교향곡 4번
12월 2·4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2일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백건우 협연), 교향곡 1번
4일 브람스 교향곡 3번, 이중 협주곡(크리스티안 테츨라프·타냐 테츨라프 협연),
교향곡 2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