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지앵의 가슴 울린 런던 심포니 연주회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선보인 러시아 음악의 진수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4월 1일 12:00 오전

흔히 ‘클래식 시크’라는 말로 환유(換喩)되는 파리지앵. 이 깐깐하고 감성 충만한 파리지앵의 발길을 잡아끄는 곳이라면 그야말로 ‘핫’한 공간일 것이다. 올 1월에 문을 연 라빌레트 공원 앞 필하모니 홀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건축가 장 누벨이 설계한 데다 특별한 어쿠스틱으로 이미 화제가 됐다. 지난 2월 22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회 역시 파리지앵의 감성을 한껏 자극했다. 2400석이 매진된 것은 물론, 연주회 당일까지 빈자리를 구해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유례없는 객석 점유율을 보인 데는 최첨단 연주 홀에 대한 호기심도 있겠지만, 음악적 자산이 깊고 풍부한 러시아 클래식 음악에 대한 끌림도 컸으리라.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곡으로만 구성한 레퍼토리에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솔리스트 데니스 마추예프 역시 라흐마니노프와 같은 러시아 출신이니, 영리한 파리지앵이 연금술처럼 빛나는 조합을 놓칠 리 없다.

필하모니 홀은 연주를 다각도에서 들을 수 있도록 무대를 가운데에 설치했는데, 어쿠스틱이 가장 좋은 자리는 이 중 오케스트라를 정면으로 볼 수 있는 1층 발코니다. 명당에 앉아 마추예프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중 1악장의 첫 주제를 감상했다. 라흐마니노프는 종소리를 좋아해 첫 주제를 마치 저음의 카리용(많은 종을 음계 순서대로 달아놓고 치는 악기) 소리처럼 표현했는데, 연주의 바이브레이션이 이미지를 뛰어넘어 종의 공명음까지 섬세하게 빚어내 청중의 감탄을 자아냈다. 홀 천장의 나무 공명판과 벽을 장식한 들쑥날쑥한 모티프 역시 어쿠스틱 효과를 극대화했다.


▲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발레리 게르기예프 ⓒJulien Mignot

그중에서도 조화로운 감흥을 흔든 것은, 일명 거칠게 ‘때려 치는’ 스타일로 유명한 마추예프의 개성이었다. 센세이션한 어쿠스틱 때문인지 그의 피아니시모는 마이크를 사용한 것처럼 포르테에 가까웠고, 그 결과 오케스트라가 마추예프의 연주에 완전히 묻혀버렸다. 아카데믹하게 인 템포로 차곡차곡 연주한 1악장은 무미건조했고, 시리도록 아련한 것으로 유명한 2악장은 시적인 정감이 기대보다 덜했다. 3악장에서 비로소 마추예프와 오케스트라는 음영의 대비 같은 피아니시모와 포르테의 유희를 구축하며 비교적 흥미로운 조화를 선사했고, 마추예프는 홀이 떠나갈 듯한 갈채를 받았다.

이어진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1번은 여러모로 논쟁 감이었다. 게르기예프는 자신의 에고를 완전히 절제한 채 라흐마니노프적 에스프리에 충실한 연주를 선사했다. 표제 음악은 아니지만 환희·절망·기쁨·죽음 등의 이야기를 담은 발레 음악처럼 매우 서술적이었다. 일부 비평가들은 ‘뜬금없이 웬 영화음악이냐!’며 비꼬았지만 관객은 최첨단 돌비 스테레오를 설치한 핫 플레이스에서 한 편의 감동적인 영화를 보는 듯 묘한 즐거움을 맛보았다.

중요한 것은, 비평가들의 볼멘소리를 잠재울 만큼 우아하면서 선명한 감동의 창출이 아니었을까. 마치 조각의 돋을새김처럼 말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게르기예프는 앙코르곡으로 차이콥스키 ‘예브게니 오네긴’ 중 3악장에 나오는 폴로네즈를 연주했다. 러시아풍의 이 폴로네즈는 마치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1번의 5악장처럼 또 한 번 파리지앵의 심장을 ‘쿵’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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