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이모젠 쿠퍼

침묵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6월 1일 12:00 오전

‘살아있는 피아노의 전설’로 불리는 그녀가 예순여섯에 드디어 한국 땅을 밟는다

2015년 ‘영국을 대표하는 여류 피아니스트’라고 하면 1948년생 우치다 미쓰코와 이듬해 태어난 이모젠 쿠퍼(Imogen Cooper)를 들 수 있다. 각각 귀부인 작위(dame)와 대영제국 훈작(CBE)을 받았으니 대내적으론 자격이 충분하지만, 두 사람 모두 예순이 넘도록 한국에 온 적은 없다. 기악 연주자는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청중과 만나는 게 부담스럽다. 쿠퍼가 예순여섯에 드디어 한국 땅을 밟는다. 6월 21일 LG아트센터 리사이틀이 첫 내한이다.

런던에서 음악 학자인 아버지와 아마추어 가수 경력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쿠퍼는 열두 살에 혼자 파리로 건너갔고, 6년을 살면서 파리 음악원 이본 르페뷔르 문하에서 음악만 했다. 쿠퍼는 그 당시를 “또래 친구도 없고 클럽에 가는 건 재미없던 시절”이라 ‘가디언’지에 이야기했다. ‘가디언’지는 청소년기의 독특한 경험이 음악에서 서서히 달아오르는 지금의 쿠퍼를 만들었다고 풀이했다. 이 시절, 쿠퍼의 멘토였던 알프레트 브렌델은 빈에서 같이 음악을 하자고 제안했고 모차르트 피아노를 위한 2대, 3대 협주곡을 함께 녹음하면서 쿠퍼를 제자가 아닌 동료로 대우했다. 쿠퍼가 외르크 데무스와 바두라 스코다를 만난 빈에서의 경험은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빈으로 건너온 우치다가 함양한 그것과 유사하다.

이모젠 쿠퍼는 1984년 쿠르트 잔덜링 지휘로 LA 필하모닉,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와 협연하면서 미국에 데뷔했고, 모스틀리 모차르트 페스티벌에서 네빌 매리너와 출연하면서 국제적 명성을 쌓았다. 1985년 런던과 유럽 주요 도시에서 슈베르트 건반 치클루스(연속 연주회)를 선보이면서 비로소 쿠퍼의 이름과 함께 모차르트와 슈베르트, 슈만 해석의 찬사가 뒤따랐다. 40대에 접어들면서 토머스 아데스류의 현대음악과 조응했고, 독일 가곡에도 관심을 보이게 됐다. 볼프강 홀츠마이어와는 음반과 실연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 했는데, 2013년 홀츠마이어 은퇴 실황은 위그모어 라이브 레이블로 기록됐다. 2010년대 다시 독일 음악 전문가로 돌아온 그녀는 2012년 런던 킹스 플레이스에서 슈베르트 탄생 215주년을 맞이해 열린 슈베르트 마라톤 콘서트를 음악 인생의 정점으로 꼽는다.

지난 4월 28일, 그녀가 사는 북런던 애비로드 근처 카페에서 쿠퍼를 만났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큰 키에 날렵한 몸매가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녀와 악수를 나눌 때 전해지는 은은한 향수와 앨범 재킷에서 보던 귀부인의 자태가 공감각적으로 전해졌다.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하다가 핵심을 짚을 땐 힘주어 설명하는 담화 방식은 선명한 강약 대비와 명징한 악센트로 슈베르트를 유영하는 포지션처럼, 그야말로 ‘이모젠 쿠퍼식’이었다.


▲ ©Benjamin Ealovega

일본은 여러 차례 다녀갔지만, 한국은 이번이 첫 방문이다.

30년 전부터 NHK 심포니와 모차르트 협주곡을 계속했다. 한국은 왜 이렇게 늦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가장 나중에 온다고 했다. 쇼팽·슈베르트·슈만을 고른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은 무엇보다 홀의 컨디션이 궁금하다.

한 해에 50~60회 정도 공연한다. 건강상 괜찮은 스케줄인가.

정신 건강을 위해 이 정도가 이상적이다. 레퍼토리를 바꾸는 작업이 피아니스트의 일인데, 여기에서 더 바빠지면 스트레스가 심해진다. 여섯 개 협주곡, 두 개의 리사이틀 프로그램, 몇 개의 실내악과 리트로 이번 시즌을 꾸린 것 같다. 프랑스 프로방스와 스페인 지중해 인근의 피아노가 있는 집에서 재충전을 하곤 한다. 걷고 산책하고 수영하면서 피로를 푸는 편이다.

2008년 도쿄 토판홀에서 패드모어와 연주할 때, 척추를 곧추세우고 상체에 힘을 실은 채 그 무게를 건반에 그대로 옮기는 힘이 상당해 보였다.

피아니스트가 무게중심을 의식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강하게 근육을 사용하는 편이고, 그래서 긴장을 푸는 게 절실하다. 어릴 땐 그 누구도 피로 푸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지금은 스트레칭을 하고 두 달에 한 번 정도 전신 마사지를 한다. 젊은 남자 연주자라면 체육관에 가야겠지만, 나는 푹 자고 물을 마시며 몸 관리를 해야 할 나이다. 젊은이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내면의 혼돈이 사라졌다는 부분이다. 수많은 자아가 서로 싸우던 시절은 이제 지났다.

체중을 팔로 전하는 과정이 과장되면 음악도 그만큼 멀어지진 않나.

브람스와 슈만 협주곡의 클라이맥스에서 상체가 가만히 있으면 그 에너지를 어떻게 주체하겠는가. 피아니스트의 신체는 곡의 메아리를 반영하는 또 다른 도구다. 또 소리가 어떻게 더 좋아질 수 있는지, 그 과정에 대한 한 방법이다. 음악과 멀어져 몸만 흔드는 연주자를 구별하는 건 교육자나 관객에게나 어렵지 않은 일이다.

벤저민 그로브너의 경우, 상체는 굽혀 있고 눈은 건반을 향하는데.

관객이 곡을 공유할 여지를 열어놓는 걸 고려하면 자세를 한번 바꿔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에너지가 교환되는 출발점은 건반이고 객석이 반응하기까지 피아니스트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한다면 각자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음악가를 과장하는 수사를 싫어한다고 들었다. 미디어가 슈베르트나 슈만 스페셜리스트라고 칭할 때도 그런가.

음악 비즈니스의 일면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평론가들도, 연주자의 소리뿐 아니라 글로 전하는 자신의 소리가 무엇인지 파악하길 바란다. 하나의 작곡가에게 다가가는 수많은 연주자들이 있고, 다양한 접근법이 있으며, 나 스스로도 늘 변화하는 걸 느끼는데 누구의 스페셜리스트로 묶는다니… 레드 오션에 모두를 던질 뿐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매니저가 내 곁에서 그 위치들을 정확히 봤을 거다.

리트 가수는 독일어로 부르는데, 리허설 중에는 당신과 영어로 이야기를 나눈다. 언어 해석의 차이가 발생하지는 않나.

리트 가사는 철학을 일반인의 쉬운 단어로 전달한다. 홀츠마이어는 독일어의 내용이 무엇인지 세심하게 영어로 이야기해 그 뉘앙스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줬다. 그가 이르길, 리트는 “단어가 음악을 지배한다”고 했다. 아름다운 사운드보다 전달하는 이야기가 비중 있다는 것이다. 한번은 비행기가 연착해 리허설을 갖지 못하고 평소에 서로를 알던 기준으로 공연을 했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공연 직전 대담하게 하자며 술 한 잔 마시고 무대에 올랐다. 그와 함께할 땐 언제나 자신감을 안고 무대에 올랐다. 참 좋았던 시절이다.

알프레트 브렌델은 독일의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슈베르트를 연주할 때 자신의 감정만으로 곡이 꽉 채워진다고 했다. 여기에서 작곡가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브렌델이 그렇게 말하는 걸 이해한다. 슈베르트 자체가 완벽한 인간, 휴머니티를 갖춘 인물이었다. 누구든 들을 수 있고 다가갈 요소가 슈베르트 음악에 있고, 연주자는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느낌으로 채울 수 있다. ‘무언가’를 예로 들면, 천천히 이어지다 종국에 멈추는 패시지나 수많은 음표로 악보가 까만 부분이나 슈베르트의 꿈틀거리는 감정들이 연주자를 자극한다. 연주자의 정체성이 쌓이면서 슈베르트 텍스트는 튼튼해진다.

슈베르트 소나타에서도 작곡가의 인간적 면모는 같은 수위로 노출되는가.

모든 역경으로부터 치유되는 인간 슈베르트가 보인다. 슈베르트의 단독자로서 고독을 피아니스트가 공감하는 건 쉽다. 피아니스트도 혼자다. 나는 연주 중 몸을 많이 쓰고, 수줍지 않다. 그렇게 슈베르트 소나타를 마주한다.

슈베르트 해석에서 언제 스스로 발전하고 있음을 자각하는가.

걸을 때 느낀다. 상념이 사라지고 슈베르트만이 남는다. 요즘 들어서는 슈베르트 해석에 추가의 인위적인 노력을 들이지 않는다. 슈베르트는 보행자였다. 걸어서 산에 올라가던 이였다. 그의 심박은 보행자의 그것이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템포는 그렇게 연원했다. 젊은 연주자들이 슈베르트가 어렵다고 느낀다면, 될 수 있는 한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서 한 번도 가지 않은 곳에 내려 걸어보길 바란다. 침묵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면 길이 보인다.

인터뷰를 마치고 다음 약속을 위해 세인트존스우드 역으로 향하는 쿠퍼를 보고 있으니 ‘20세기 피아노의 여왕’ 알리시아 데 라로차의 모습이 겹쳤다. 우아함과 기품 있는 피아니스트를 만나는 건 연주자와 관객 모두 행운과 노력이 필요하다. 다음은 라로차가 1995년 마지막 내한 공연 즈음에 한 말이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난 뒤 사람들이 나의 연주를 들으며 얼마간의 즐거움을 얻고 인간적으로도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주었으면 하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다.”

그리고 이제, 쿠퍼의 내한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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