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베로니카 에베를레

당신과 우리가 가진 공명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7월 1일 12:00 오전

침착함에 내포된 힘으로 차세대 여류 바이올리니스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에베를레.

첫 내한 공연을 앞둔 그녀를 런던에서 만났다

2010년, 중앙일보 김호정 기자는 사라 장(1980년생)의 라이벌로 힐러리 한(1979년생), 율리아 피셔(1983년생), 야니너 얀선(1978년생)을 ‘트로이카’로 지목한 바 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나고 세계 음악계를 움직이는 여류 바이올리니스트의 서열이 조금씩 바뀌었다. 런던에서는 니컬라 베네데티(1987년생)를 필두로 리사 바티아슈빌리(1979년생), 알리나 이브라기모바(1985년생), 아라벨라 슈타인바허(1981년생)에게 많은 공연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음악은 경쟁이 아니지만 오케스트라들은 티켓 판매 다툼을 벌여야 한다. 악단들은 늘 젊은 여류 주자를 찾고, 재원들은 샘처럼 솟아난다.

7월 17일 서울시향과 쇼스타코비치 협주곡 1번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하는 베로니카 에베를레. 1988년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 도나우뵈르트 태생의 그녀도 2010~2013년 BBC 뉴 제너레이션 아티스트로 지명됐지만, 지난해 6월 바비컨 센터에서 래틀/런던 심포니와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런던 관객과 더 친밀해졌다. 아직 단독 음반이 없어 한국에선 생소하지만, 에베를레의 이름이 유럽에 알려진 건 꽤 오래전이다. 2006년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에서 래틀은 베로니카를 불러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함께 연주했다. 그들의 인연은 베를린의 어느 작은 음악회에서 시작됐다. 열세 살 어린이가 리사이틀을 마치고 리셉션에서 만난 사람은 베를린 필에서 퇴단한 노 첼리스트였다. 신사는 “베를린 필에서 언젠가 연주해보지 않겠느냐”물었고, 에베를레는 으레 공연 뒤에 나누는 인사로 알고 살짝 웃은 게 전부였다. 3년 뒤, 그동안 연락이 없던 그가 자신을 기억하느냐는 전화와 함께 래틀과의 협연을 부탁했다. 그 후 흔히 ‘세계 메이저 오케스트라’라 칭하는 곳에서 에베를레에게 연주를 청하고 있다.

그동안 그녀가 대지휘자의 명성에만 의존했다면 신동으로 주목받다 시야에서 사라진 여러 영재의 전철을 밟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경력 관리에서 에베를레는 이상적인 20대를 보내고 있다. 우선 교육의 토대가 좋다. 10대 초반에는 크리스토프 포펜에게 개인 레슨을 받았고, 2001년부터 뮌헨 음대에서 율리아 피셔·리사 바티아슈빌리·아라벨라 슈타인바허를 배출한 아나 추마헨코 문하에 있었다. 뮌헨 음대가 ‘추마헨코의 제자들’로 제작한 음반에서 그녀는 선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뒤에는 든든한 매니지먼트가 있다. 아스코나스 홀트에서 언드라시 시프와 김선욱을 담당하는 매니저는 지난 10년간의 에베를레를 꿰고 있다. 에베를레는 6월 18일 세인트 루크스 성당에서 BBC 런치타임 콘서트에 올랐다. 잠시 여유가 생긴 매니저에게 그녀의 장점을 물으니, ‘침착’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유럽에서 두 차례 듀오 투어 공연을 함께한 김선욱은 ‘힘이 좋은 독일 바이올리니스트’라 했다. 에베를레를 직접 보니, 체구는 아담하지만 홀터넥 뒤로 보이는 떡 벌어진 등 근육이 모종의 ‘파워’를 시각화했다.

무엇보다 소리의 울림이 묵직했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3번과 슈만 바이올린 소나타 2번으로 채워진 이날 공연에서 에베를레의 접근은 ‘올드 패션’이었다. 서정과 장엄을 오가는 세부는 거칠지만, 투박하지 않았다. 태연자약한 비브라토나 깔끔한 보잉 대신 선율미와 구조를 보여주는 자신만의 톤이 존재했다. 육중한 무게감으로 악보를 짚어가는 모습에서 독일 전차의 이미지가 느껴졌다. 인터뷰를 위해 신록이 우거진 성당 밖 정원 벤치에 앉았다. 다음은 에베를레와의 일문일답.

그동안 일본 공연은 많았는데, 내한 공연은 처음이다.

2008년부터 NHK 심포니·요미우리 심포니와 거의 매년 협연하고 실내악 연주와 독주회를 선보여 일본은 친숙하지만, 한국은 첫 방문이다. 서울은 독일에서 만난 한국 친구들 때문에 가보고 싶었고, 서울시향도 함께 연주하고 싶은 오케스트라다.

며칠 전 이유라와 실내악을 함께한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다.

이유라·최예은·김수연 모두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연주자다. 노부스 콰르텟과도 협연했고, 윤홍천과도 연주한 적이 있다. 김선욱은 소리를 잘 들으며, 피아노로 바이올린을 감쌀 줄 아는 피아니스트다. 그가 어려서 바이올린을 배웠다고 말했을 땐 놀랐다.

지금 쓰는 바이올린을 일본음악재단에서 대여 중이다. 어떤 인연이 있었나.

예전 악기는 과다니니였는데, 일본 공연이 끝나고 재단 관계자들이 먼저 찾아와 악기 대여를 제안했다. 1700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드라고네티’로 알프레도 캄폴리가 쓰던 것이다. 바이올린을 받고 ‘그녀’(에베를레는 악기를 줄곧 ‘She’로 표현했다)를 알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 것 같다. 그녀는 변덕스럽진 않지만, 처음엔 내가 가진 고유의 공명과 맞지 않았다. 길들인다는 생각 대신 아낀다는 마음으로 오랫동안 함께하니 소리를 하나씩 허락했다.

당신이 가진 공명은 마음의 것인가, 변하는 것인가. 아니면 유형으로 존재하나.

분명히 존재하는 내 목소리다. 노래할 때 쓰는 목소리가 아니라 몸에서 진동하는 고유의 파동이다. 새 악기를 대하기 전 바이올리니스트는 최적화된 자신만의 톤을 가지고 있다. 그 느낌과 악기를 맞추는 대화를 오랫동안 가졌다. 일본음악재단이 아주 오랫동안 이 악기를 대여해주면 좋겠다.

콩쿠르 없이 지금의 자리까지 온 데는 래틀/베를린 필과의 협연 덕이 커 보인다.

그렇다. 래틀은 10대의 내게 “음악은 오랫동안 해야 하고, 그래서 모든 면을 장기적으로 보라”고 권했다. 이후 멘토에게 자문을 구하고 그 소리를 잘 듣고자 했다. 다음 연주를 부르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과 매니저가 할 일이 구분됐고, 순리를 따르려 노력했다. 코끼리처럼 큰 귀가 내 가슴 근처에 있다고 믿는다.

연주 작품은 어떻게 늘려왔나.

학창 시절, 배웠지만 연주에 옮기지 않은 곡부터 살폈다. 요즘은 연주하고 싶은 곡은 매니지먼트에 협연을 알아보도록 요청한다. 성악을 좋아해 내년 시즌에는 소프라노 아나 프로하스카와 함께 바로크 레퍼토리를 할 예정이다.

상대적으로 현대의 생존 작곡가 협주곡은 잘 연주하지 않았다.

현대음악에 거부감이 있는 건 아니지만, 고전 연구가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현대음악을 두드리는 건 아직 때가 아니다. 브리튼 협주곡을 내년 시즌에 시작할 텐데, 내가 생각하는 근현대 레퍼토리는 지금으로선 브리튼까지다.

서울에서 연주할 쇼스타코비치 협주곡 1번에 대한 이해는 어떠한가.

처음 익힌 건 20대 초반이다. 연주도 자주 했는데, 몇 년간 쉰 끝에 다시 연주하기로 마음먹은 곡이다. 어릴 땐 작곡가의 회고록 ‘증언’을 읽고 시대적 배경부터 익히고 악보를 봤는데, 이해가 제한적이었다. 오이스트라흐처럼 작곡가의 본뜻을 직접 들은 연주자들이 부러울 수밖에 없다.

냉전 시대 이후에 태어났거나 소련의 경험이 없으면 이해가 더 어려운 건가.

지휘자 미하엘 잔덜링이 아버지 쿠르트 잔덜링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을 때 실마리를 찾았다. 작곡가와 직접 교류한 쿠르트는 쇼스타코비치에게 바이올린 협주곡 1번 템포가 너무 빠른 거 아니냐고 물었단다. 작곡가는 일부러 연주하기 어렵도록 악보에 썼으니 그 템포를 모두 지키려 노력하기보다는 따라가려고 노력하면서 서로 웃어야 하는 상황을 이해하라고 답했다고 한다. 작곡가가 처한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나는 역사책을 읽고 스탈린 시대의 텍스트를 읽었지만, 미하엘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열쇠를 찾은 느낌이었다.

시대적 정황을 모르는 관객이라면 마지막 악장을 즐거운 춤곡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런 명랑함 속에는 민중의 고통을 강요하는 소련 정권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있음을 여러 문헌이 증명했다. 연주자의 목표는 격한 감정을 밝고 명랑한 음악으로 감추려던 작곡가의 의도를 예전보다 더 충실히 선보일 수 있느냐다.

바이올린으로 추구하는 가치를 영어와 독일어로 표현한다면, 영어로는 ‘Sound(소리)’, 독일어로는 ‘Klang(울림)’이다.

글 한정호(런던 통신원) 사진 Jan North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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