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빅토리아 뮬로바

따뜻한 숨을 품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0월 1일 12:00 오전

바로크 시대의 음악을 통해 부드러운 호흡을 갖게 된 뮬로바

그녀가 런던 자택에서 들려준 변화, 그리고 가치

BBC 필하모닉은 2015년 가을, 중국과 한국을 아우르는 아시아 투어를 앞두고 힐러리 한의 임신과 출산에 따라 협연자를 교체해야 했다. 곡절 끝에 대체한 바이올리니스트는 빅토리아 뮬로바(Viktoria Mullova). 연주곡은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뮬로바는 세 번의 독주회(1984·1987·1996), 한 번의 크로스오버 연주회(2001), 두 번의 내한 협연-계몽 시대 오케스트라(2003)와 바젤 체임버(2012)-을 펼쳤지만, 세계 음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만큼 국내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적이 별로 없다. 그러나 드문드문 열린 내한 무대에서 뮬로바가 평단과 관계자, 청중을 실망시킨 적도 거의 없다. 완전무결한 테크닉에선 러시안 스쿨을 떠올리게 하다가 21세기 들어 본격적인 탐구에 들어간 고음악에선 심오한 지성의 깊이를 드러낸다. 현시점에서 시장을 주름잡는 현역 바이올리니스트 가운데 뮬로바만큼 독특한 방식으로 ‘정체성’을 강화한 연주자도 드물다.

뮬로바가 세계 언론의 주목을 끈 건 냉전 분위기가 절정을 치닫던 1980년대 초반이다. 1980년 시벨리우스 콩쿠르와 1982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인지도를 쌓았고, 1983년 핀란드 연주 도중 당시 연인이던 바흐탕 조르다니아와 함께 스웨덴으로 건너가 망명을 시도하면서 세계적인 명사가 됐다. 탈출을 기획하기까지 일 년을 공들인 점이나, 연인과의 탈출을 위해 엉성한 피아노 실력으로 반주에 나선 지휘자 조르다니아의 순정, 스웨덴 경찰로부터 망명 요청을 보류당하고 주말 동안 가명으로 호텔에 머물다 자신들의 얼굴이 실린 신문을 받아들었을 때의 당황스러움, 미 대사관의 도움으로 워싱턴으로 넘어가기까지 정보요원을 따돌리는 추격전 등 매 순간이 첩보 영화였다. 수백만 달러 상당의 스트라디바리우스를 호텔에 두고 도망칠 순 없으리라 오판한 KGB의 무능이 두고두고 서방 언론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삶의 굴곡이 예사롭지 않은 건 서방으로 건너간 다음도 마찬가지였다. 탈출 직후 미국에 머물다 유럽으로 건너온 뮬로바를 아낀 건 클라우디오 아바도였다. 둘이 연인 사이라는 것이 아시아에도 알려진 건 1988년 3월 아바도/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일본 공연 때였다. 나고야 공연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오는 신칸센에 아바도와의 투어 연주가 아예 없던 뮬로바가 동승했을 때, 저명한 사진작가 키노시타 아키라가 우연히 옆자리에 앉았고 인물들의 동의 아래 촬영한 사진이 음악 전문지 ‘온가쿠노도모’(音樂之友)에 실리면서 열도의 팬들은 정식으로 뮬로바와 아바도의 협연을 청했다. 1992년 아바도는 뮬로바를 베를린 필 일본 공연의 협연자로 세웠고, 이들이 1월 26일 산토리홀에서 함께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의 NHK 실황은 일본 음악 팬들이 아끼는 대표적인 기록물이다. 뮬로바는 빈에서 아바도와 5년 동안 함께 살았고, 이때에 낳은 아들 미샤 뮬로브 아바도는 재즈 더블베이시스트가 되어 뮬로바의 전속 레이블 오닉스에서 지난 8월 앨범을 냈다. 아바도와 헤어진 다음에도 그녀는 여러 경로를 통해 아바도의 건강을 염려했고, 아바도의 부고에 가슴 아파 한 소식 역시 런던 음악계에 널리 알려졌다.

1991년부터 런던에 살면서 지금의 남편인 첼리스트 매슈 발리, 발리와 낳은 딸 나디아와 함께 지내는 동안 뮬로바의 음악 세계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2001년 당시 ‘객석’ 런던 통신원이던 이현정 런던 정경대 교수가 지적한 대로 뮬로바는 발리와 함께한 크로스오버 프로젝트 ‘스루 더 루킹 글라스’를 통해 ‘얼음 아가씨’라는 꼬리표를 떼어냈다. 다문화 분석 전문가인 이현정 교수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들어 소련을 등진 아티스트들과 달리 뮬로바를 ‘서방의 풍요를 동경’하여 모스크바를 등진 ‘망명 신세대’로 규정한다. 뮬로바는 쇄도하는 연주 요청도 마다하고 1995년 BBC 프롬스를 끝으로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의 공식 연주를 중단했다. ‘들인 노력에 비해 얻는 게 없는 곡’이란 게 1982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가 밝힌 이유다. 그녀를 거장 코간의 제자로 분류하는 언론을 상대로 ‘주로 그의 조수에게 기초를 배웠다’고 밝힌 것도 이즈음이다.

200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거트현을 사용하는 바로크 해석에 심취하면서 연주 스타일에 일대 변혁을 이뤘다. 시대악기-절충주의 해석을 받아들였고 가드너/혁명과 낭만 오케스트라와 멘델스존 협주곡을 녹음했으며, 오닉스 레이블에서 오타비오 단토네, 크리스티안 베자위던하우트와 각각 함께한 바흐 소나타집, 베토벤 소나타집을 선보이며 뚜렷한 고음악 전문가의 자산을 축적하고 있다. 평소에는 1723년산 쥘 포크 스트라디바리우스를, 고음악에는 1750년산 조반니 바티스타 과다니니를 쓴다.

연주자에게 고유한 것을 요구하며 ‘정체성’을 찾으려는 외부의 시선에, 정형화된 틀에 갇히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스타일에 도전하고 응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온 것이 뮬로바의 방식이다. 내한을 앞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지난 8월 4일, 런던 자택을 찾아갔다.

 


▲ ©Haris Mpilios

이제 런던이 당신 생애에서 가장 오래 머무른 도시가 됐다.

아바도의 아이 미샤를 임신하고 이곳에 온 다음 그와 헤어졌다. 올 때는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들었는데 여기 사람들의 유머가 힘이 되었다. 러시아어 외에 영어를 그래도 좀 할 줄 아는구나 하는 것을 그때 느꼈다. 홀랜드 파크에 정주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는데, 조용하면서도 문화의 중심이니 여기가 이제 내 고향이다 싶다.

BBC 필하모닉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보통 맨체스터에선 할레 오케스트라와 많이 했다. 늘 BBC 산하의 여러 오케스트라가 혼동이 된다. 지휘자 후안호 메나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는데, 이번 아시아 투어에서 처음 만난다.

2014/15 시즌에선 어떤 공연이 가장 흡족했나?

파보 예르비/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이 아주 좋았다.

가령 예르비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은 도이치 카머필하모니에서는 시대악기적으로, 필하모니아에서는 모던 방식이 주를 이루는데, 당신도 그에 따라 악기 선택과 주법에 변화를 가하는가?

예르비와 나는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은 무엇보다 사운드 면에서 원형을 최선의 가치로 추구한다는 것이 공통된 생각이다. 필하모니아와 리허설 때는 나는 협연자, 예르비는 객원 지휘자이니 우리의 사상을 악단과 공유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같은 곡을 다른 악단, 지휘자와 공연할 때 중심을 어떻게 맞추나?

아주 작게나마 변화를 주긴 하지만 악단이 바뀐다고 내 무드나 스타일을 많이 바꾸는 편은 아니다. 스타일을 고수하면서도 오케스트라의 서포트를 들으면 내 안에 새로운 것이 일렁인다.

리허설에 공유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실연에서 갑자기 실현하면 악단은 당황할 수도 있다.

리허설이 끝나도 지휘자와 쉬지 않고 이야기하고 교감하면서 상대가 어떤 마음인지 알고 무대에 오른다.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의 관현악적 언어를 통달한 지휘자는 약속되지 않은 순간 진가를 발휘한다.

사조에 따라 어떻게 악기 선택을 달리하는가?

비발디·바흐·텔레만의 초기 바로크 음악에서는 바로크 활을 쓰고, 거트현을 사용한 과다니니를 연주한다. 베토벤·브람스 협주곡에서는 거트현의 과다니니를 쓰지만 클래식 활을 사용한다. 낭만 이후로는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쓴다. 한국에선 시벨리우스를 하니 스트라디바리우스를 가져갈 것이다. 바로크 활의 경우, 시즌마다 연주하는 횟수가 다르기 때문에 일 년에 한 번 이상 이탈리아에 가서 수선을 맡긴다. 처음엔 어떤 소리가 이상적인 소리인지도 잘 몰랐다.

필립스에서의 데뷔 앨범을 시벨리우스와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선곡한 건 누구의 생각인가?

내 아이디어다. 두 대회를 우승했으니 이렇게 만들면 괜찮겠지 싶던 시절이다. 동영상으로 1980년 시벨리우스 콩쿠르 때 모습을 봤다. 30여 년 전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은 것이 변했다. 이완을 모르던 시절의 내가 거기 있었다. 바로크를 공부하면서 유연해진 것 같다.

바흐 독주 앨범의 부드러운 호흡도 그 시절에 만들어진 것인가?

프레이징과 호흡이 바로크를 공부하기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바뀌었다. 바흐 독주곡이 기준점이다. 바흐의 프레이즈 사이의 침묵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전엔 잘 몰랐다. 그걸 알게 되니 호흡이 편해졌다.

1980년대에는 시벨리우스를 연주하면 지독하게도 ‘얼음 아가씨’라는 소리를 들었다. 행복했나?

그 고통스러운 소리가 내 커리어를 만들어줬다. 1980년대에는 여자가 바이올린을 잘해봐야 얼마나 잘하겠느냐는 시선이 있었다. 그런 별명이 사람들을 공연장으로 오게 했고, 나는 그들에게 나를 증명해야 했다. 그때 모인 관객이 자산이 되어 음악 인생을 함께하니 기분 좋지 않은 별명이었어도 나에겐 결과적으로 도움이 된 거다. 이제는 ‘얼음 아가씨가 완전히 녹았다’가 내가 읽고 싶은 문장이다.

어린 시절엔 무대에 나가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공포였다 했는데, 언제부터 극복했나?

지금도 불안함을 내 몸에서 완전히 벗겨내진 못했다. 내 콩쿠르 영상을 본다면 거기엔 공포에 떨고 있는 한 여성 참가자가 우승을 하고도 얼어 있는 것을 볼 것이다. ‘뮬로바는 차갑다’는 소리에 초연해질 즈음부터 고통도 서서히 없어졌던 것 같다.

음악 이외에 가장 행복한 일상은 언제인가?

막내딸 나디아가 발레를 한다. 로열 발레 아카데미에 있는데 로열 발레로 올라갔으면 참 좋겠다. 내 딸이 발레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빈에서 살 땐 오페라 보는 게 별로 즐겁지 않았는데, 지금은 딸이 발레를 하니 발레가 좋다.

나디아가 엄마 몸을 닮은 건가?

나보다 훨씬 훌륭한 몸이다.

글 한정호(런던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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