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피아니스트 3인의 무한한 상상력을 담은 쇼팽 24개의 프렐류드 신보가 출시됐다
겨울이 찾아왔고, 어김없이 또 입시의 계절이다. 실기 연주로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음악 전공생들은 자신을 압박하는 마음의 추위와 자꾸만 손을 얼게 만드는 찬 바람을 견디며, 오랫동안 준비한 짤막한 시험곡들을 단 한 번의 기회로 성공시켜야 한다. 대학입시의 실기 시험 시스템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10분이 되지 않는 연주로 한 학생의 음악성과 그간 기울인 노력을 모두 알 수 있느냐고 의아함을 표시하기도 한다.
필자의 대답은 긍정과 부정이 모두 담긴 것이다. 한 사람의 총체적 실력을 가늠하기에 너무 짧은 시간임은 분명하지만, 타고난 기질과 연주의 집중도, 작품 스타일에 대한 파악 능력 등은 사실 단시간에 결판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위해 효과적인 과제곡이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알려진 대로 쇼팽의 에튀드는 피아노 전공생들의 기능적 완성도와 테크닉을 음악 속에 녹여 결합하는 능력을 심사하는 데 매우 적합하여 실기곡으로 많이 선택된다. 1~2분 정도의 연주 시간 안에 작곡가가 상상한 판타지를 농축하여 풀어놓은 24개의 프렐류드 중에도 시험곡으로 인기 있는 작품들이 있다. 학생이 지닌 음악적 아이디어를 ‘피아노’라는 수단을 통해 표현해내는 능력을 보는 데 이 작품들만큼 적당한 곡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물론 입시용으로 한두 곡을 연주하는 것과 40여 분의 시간이 요구되는 전곡을 연주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쇼팽이 지녔던 감수성과 다채로운 상상력, 천재적 영감을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샅샅이 그려내고 묘사한 이 스물네 곡. 그래서 작품을 무대에 올리거나 음반으로 내놓는 모든 피아니스트를 마치 입시 경연장에 들어가는 기분으로 만들기도 한다.
국제적 낭보를 전한 조성진의 쇼팽 콩쿠르 실황 음반과 함께 쇼팽 해석의 권위를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자타 공인 젊은 실력파들이 쇼팽의 프렐류드가 담긴 신보를 출시했다. 입시나 콩쿠르 같은 경쟁이 아니니, 감상자의 입장도 심사위원의 긴장된 마음이 아닐 수 있어서 편안하다.
임동혁, 사려 깊은 균형감
전반적으로 편안한 템포감각 속에 낙천적인 기분이 느껴진다. 은근한 자신감과 당당함이 묻어나는데, 무엇보다 작곡가에 대한 산전수전을 겪어봐야 나올 수 있는 결과물이란 생각이다. 기본적으로 직설적이지 않고 은유적인 자세가 두드러진다. 쇼팽의 핵심이라 할 만한 템포 루바토(해석에 있어 자유로운 시간 조절)도 절제돼 있는데, 내공이 동반된 컨트롤이라서 단단함과 견고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이에 따른 페달링도 특별히 적다고 할 수 없으나, 조심스레 나눠 밟는 사려 깊음에 호감이 간다.
재능 있는 연주자라면 누구나 많이 갖고 있는 템페라멘트를 나타내는 것도 자제돼 있다.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작곡가에 대한 관점이 자칫 멋대로일 수 있는 템페라멘트를 다스리고 채워야 함은 당연하지만, 임동혁의 경우는 ‘선천적-후전척’으로 만들어진 스타일에 대한 균형이 잘 맞춰져 있다. 20대의 임동혁이 그려냈던 호기의 쇼팽과는 사뭇 다르다.
이런 해석에 따라 텍스트를 구현하는 정확도는 매우 훌륭하지만, 작품의 굴곡을 위해 다이내믹을 포함한 악상의 극단적인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요컨대 은근하면서도 상징적인 표현으로 여백을 두어, 그 공간에 듣는 이들의 상상력을 채우게 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조성진, 꼼꼼한 설득력
실황 연주로서 긴장감이 최대 매력이다. 빚어내는 음색도 깔끔하지만, 손끝에서 모으는 음의 모양은 밀도가 매우 짙다. 콩쿠르 녹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듣는 이들도 조금 예민해지기 마련인데, 연주자가 만든 프레이징 사이를 잇고 끊는 파우제(쉼)의 연출은 편안하고 여유롭다. 아울러 곡과 곡의 간격도 많이 떨어져 있다. 콩쿠르에서 안정된 연주를 위해 설정한 것이며, 조성진이 작품의 스케일을 넉넉하고 크게 본다는 증거도 된다.
음량의 표현은 극적인 성격과 서정적인 성격의 곡을 구분하여 세심하게 조절하는 모습이다. 전반적으로 극단적인 차이를 두지는 않지만, 악상의 극명한 구분은 세심하게 이뤄져 작은 작품들의 윤곽을 선명하게 만드는 데 성공을 거둔다.
유튜브로 나온 동영상이나 그 외의 실황을 들은 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바, 그의 표현은 매우 설명적이며 설득력이 강하다. 자신이 의도한 악상의 전부를 감상자에게 전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데, 연주자가 전달하려는 악상이나 작품의 규모가 크고 굵다는 느낌이다. 부분적으로 재치 있는 위트나 반전이 나타나곤 하는데, 이렇게 작은 부분도 듣는 이가 모두 알아챌 수 있게 설정한다는 것 자체가 조성진의 연주력을 나타내주는 부분이다.
윤디, 직선적 강렬함
5년 만의 쇼팽 앨범으로 많은 기대감을 준다. 많지 않은 나이지만 누구보다 쇼팽에 대한 경험이 많다는 면에서 난곡인 프렐류드를 선택했다는 점이 더욱 주목된다. 접근하는 방법은 매우 직선적이고, 강렬함이 두드러진다. 한껏 ‘업’된 분위기와, 빠르게 설정한 템포가 가세하여 흥분된 분위기가 느껴진다. 때로는 그 결이 곱지 않고 거칠게 나타나기도 한다. 쇼팽의 음악에서 공격적인 표현과 다듬어지지 않은 음상은 다소 이례적이다. 그간 겪어 온 수많은 쇼팽의 작품들에서 경험한 끝에 나온 하드보일드적 정서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다이내믹의 표현은 전반적으로 정갈하고 군더더기가 없어 개운한 뉘앙스를 불러일으킨다.
한 곡, 한 곡마다 다른 색깔로 표현하기보다 프렐류드들의 연속성을 통해 다른 이들과 차별되는 ‘큰 그림’을 의도했다. 스튜디오 녹음이지만 거의 ‘원 테이크’로 만들어졌다는 후문으로 보아 이런 시간적 연출은 다분히 의도적인데, 곡과 곡 사이의 파우제를 지극히 짧게 조절해 이어지는 구성이 독특하면서도 응집력 있다.
하나로 이어지는 거대한 ‘쇼팽 화첩’을 구성하려는 의도였는지 모르나, 유명한 15번의 ‘빗방울’과 16번이 지나고 후반부의 여덟 곡은 앞의 작품들에 비해 비교적 온건하고 차분한 음상이 느껴진다. 자신에게 침잠한 모습과 작곡가의 충동적인 기질 등 다양한 모습을 한 곡에서 모두 경험할 수 있는 해석을 구상하여 더욱 흥미롭다.
사진 워너 클래식스·유니버설 뮤직·마스트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