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24일~12월 31일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가능성 확장의 모범적 사례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한 편이 오르는 데에는 5년 남짓한 기간이 걸린다. 아이디어를 얻어 초기 개발을 하고, 독회나 트라이아웃을 거치고, 투자자를 모아 검증하는 테스트에 걸리는 시간이다.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뮤지컬이라는 브랜드 가치는 이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작품을 기획해 검증하고 완성도를 높이는 각 단계가 필요한 것은 비단 그들만의 사정이 아니다. 우리나라 창작 뮤지컬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시장’은 커지고 있지만, 콘텐츠를 테스트하고 숙성시키는 ‘산업’으로서 환경은 나아진 바가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작품이 브랜드 가치를 갖도록 담금질해야 하는데, 실제는 그리 녹록지 않다. 수입 뮤지컬 일변도의 시장 환경이 만들어진 이유다.
새로운 창작 뮤지컬을 발굴하고 육성하려는 일련의 정책들은 그래서 소중하고 의미가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 산실이나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의 창작 뮤지컬 지원 프로그램 등이 대표적이다. 초기 개발 단계에 있는 양질의 작품을 선별해 브랜드 파워를 키우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큰 의의이자 매력이다.
대학로에 새롭게 등장한 뮤지컬 ‘지구멸망 30일 전’은 그래서 더욱 기대되는 작품이다. ‘뮤직 인 마이 하트’ ‘카페인’ 등 다수의 로맨틱 코미디물로 인기를 누리던 연출가 성재준이 드라마 음악감독으로 활동해온 박성일 작곡가와 호흡을 맞췄다. 대중의 취향과 감각을 잘 읽어낼 줄 아는 이들의 만남이다.
초연은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에서 이루어졌다. 2015년 6월, 이 작품은 50여 편의 출품작 중 당당히 최우수 창작뮤지컬상을 거머쥐었다. 거대한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게 돼 인류 멸망이 30여 일밖에 남지 않자 때 아닌 결혼 열풍이 불어닥친다는, 황당하고도 배꼽 잡는 내용이다. 죽어서 몽달귀신이 되기보다 결혼이라도 해보고 죽자는 결혼정보회사 직원의 설득이 계기가 되어 벌어진 해프닝이다. 경제적 조건만 따지던 여자들과 외모에 대해 떠들던 남자들이 오직 사랑만 생각하고 남은 며칠을 함께할 이성을 찾는다는 전개는 쌉싸래한 현실 풍자의 재미를 준다. 물론 결혼의 전제 조건은 학벌도, 외모도, 경제적 조건이나 금전적 여유도 아닌 바로 ‘사랑’이라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흔히 무시되는 우리네 세상살이가 풍자의 대상이다. 공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반전은 객석의 탄성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 작품에는 요즘 한국 뮤지컬계에서 ‘발에 치일’ 정도로 흔하다는 스타 캐스팅이 없다. 대신 연기 좀 하고 노래도 잘한다는 감칠맛 낼 줄 아는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특히 비범한 외모를 지닌 유머러스한 김동현이나 허당 섹시 이미지의 하현지, 일인다역의 주민진은 꽤나 만족스럽다. 온전히 작품만으로 관객과 소통하려는 시도가 반갑다. 극 전개의 완급만 조금 더 노련하게 다듬는다면 금상첨화 아닐까 싶다.
역시 제일 좋은 것은 연말 공연가의 수많은 수입 대작 뮤지컬의 틈바구니에서 만나는 참신한 창작 뮤지컬의 신선함이다. 기름지고 느끼한 서양식 메뉴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담백한 뒷맛이 객석을 즐겁게 한다. 한참 웃다 보면 가버린 해의 아쉬움도 잊힐 것 같다. 주변에 추천하고픈 좋은 소극장 뮤지컬이다.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