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벨리우스의 150번째 생일을 린투와 래틀은 지나치지 않고, 그의 교향곡 전곡(7곡)을 전집에 담아 세상에 내놓았다
2015년은 시벨리우스와 카를 닐센이 탄생한 지 150주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연초에 시벨리우스의 레퍼토리를 다른 해에 비해 많이 접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가졌다. 하지만 김대진/수원시향이 서울과 수원을 오고가며 선보인 교향곡 전곡 연주회와 몇몇 악단이 간헐적으로 선보인 바이올린 협주곡 외에는 시벨리우스의 존재감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상대적으로 친숙하지 않은 닐센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한누 린투/핀란드 방송교향악단과 사이먼 래틀/베를린 필하모닉의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집은 이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진다. 기념비의 성격을 띤 전집이지만 두 박스물의 구성과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린투의 백과전서, 래틀의 전문연구서
한누 린투(Hannu Lintu)는 2011년에 서울시향과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을 선보인 적이 있다. 선율선이 굵은 연주였는데, 공연 뒤에 쏟아진 장대비가 그 연주에 대한 기분을 잘 대변하는 것 같았다. 당시 린투는 탐페레 필하모니아의 예술감독 및 상임지휘자로 재직 중이었고, 이 전집은 그가 핀란드 방송교향악단으로 옮긴 후 2013/2014 시즌부터 선보인 연주 실황을 담고 있다. 블루레이(3장)와 DVD(5장) 버전으로 아트하우스가 출시한 이 전집에는 부클릿(영어·독일어·프랑스어)과 아트하우스 2015/2016 시즌 카탈로그, 보너스로 다큐멘터리 ‘시벨리우스의 유형(Sort of Sibelius)’이 수록되었다. 모든 영상은 영어·독일어·프랑스어·일본어·한국어 자막을 갖췄다. 헬싱키음악센터 실황인데, 공연 일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핀란드 방송교향악단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린투 지휘로 시벨리우스 교향곡이 수없이 올라가는 라인업에 놀라지만, 어느 공연인지 알 수 없어 아쉽다.
사이먼 래틀/베를린 필의 전집은 상대적으로 단출하다. 7곡의 교향곡은 4장의 CD, 1장의 블루레이 오디오와 1장의 블루레이 타이틀에 담겼다. 래틀은 베를린 필에 취임한 후 2009/2010 시즌, 2014/2015 시즌에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곡 연주를 가졌는데, 본 전집에는 후자가 담겼다.
공연 실황으로 들어가기 전, 린투는 시벨리우스 생존 당시의 역사와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고, 작곡가 오스모 타피오 레이헬레와 각곡의 테마를 미리 들려주고 설명한다. 이러한 구성은 매 곡이 연주되기 전에 25~30분 분량으로 진행된다.
보너스 트랙에 담긴 다큐멘터리 ‘시벨리우스의 유형’은 이 전집의 별미 중 별미다. 70분 분량의 페이크 다큐멘터리로 ‘용모와 인간성’ ‘천재성과 자연’ ‘건강과 신경과민’ ‘돈과 쾌락’ ‘아버지와 가족’ ‘작품과 영감’ ‘아이노와 얀네’(아이노는 시벨리우스의 아내, 얀네는 시벨리우스의 애칭이다) ‘중단의 어려움’ 여덟 개의 챕터로 구성되었다. 작곡가, 문화사가, 의사, 필체감정가, 술 연구자 등이 생존 당시 시벨리우스의 미시사는 어떠했는가를 분석하고 증언한다. 라우라 요우치 감독의 미장센은 삽입된 시벨리우스의 음악들에 비해 경쾌하다. 찰리 채플린을 연상케 하는 시벨리우스 역의 배우는 피아노에 샴페인을 붓거나, 애인의 목욕 장면을 상상하며 악보를 찢어 먹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린투의 전집에 수록된 보너스 트랙이지만 삽입된 음악의 크레디트에선 사카리 오라모, 사라스테는 물론 파보 베리룬드(1929~2012)의 이름까지 보인다. 시벨리우스판 ‘그것이 알고 싶다’라고 생각하면 된다.
린투의 전집이 이것저것 들춰보게 하는 백과전서 같은 맛이라면, 래틀의 전집은 음악에만 집중하게 하는 전문연구서 같다. 블루레이 오디오에 보너스로 담긴 래틀의 인터뷰 영상(‘Lost in the Forest of Fear’)은 래틀이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어떻게 ‘래틀화’했는지를 들려준다. 53분 분량, 자막은 독일어뿐이다.
영상을 보다 보니 래틀의 전집이 남다르게 느껴진다. 관악기들을 꼼꼼히 활용한 시벨리우스의 음악적 기법 때문인지 화면에는 관악주자들의 얼굴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반가운 얼굴이 보이기 때문이다. 오보에 수석 알브레히트 마이어나 조너선 켈리와 함께 하는 함경이다. 전곡 모두 세컨드 연주자로 참여했다(2014/2015 시즌에 베를린 필 아카데미에서 활동하던 그는 현재 하노버 슈타츠오퍼 수석으로 활동 중이다. 베를린 필 아카데미는 1972년 카라얀이 만든 일종의 인턴십 프로그램이다. 2년간 수석들에게 교육 받고 객원단원 활동 기회가 주어진다. 현재 단원들 가운데 60퍼센트가 이 아카데미 출신이다). 이 전집은 고급스런 외양의 케이스와 부클릿(영어·독일어)이 한데 묶여 있는데, CD 케이스를 들추니 오디오 다운로드 이용권과 디지털 콘서트홀 7일 이용권이 나온다.
두 전집의 공연 영상도 지휘자의 출신과 색채만큼이나 다르다. 린투의 영상은 음악에 따라 독특한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갑작스런 포르티시모로 솟구칠 때, 합창석 방향에서 린투를 주목하던 카메라는 1·2층의 객석을 순식간에 잡아 린투를 작은 점으로 만드는 과감한 카메라 워킹도 구현한다. 이에 비해 베를린 필은 래틀에 초점을 두며, 각 단원들의 솔로 장면을 샅샅이 훑는다.
핀란드의 후예인가, 시벨리우스 전문가인가
래틀은 1980년 버밍엄 심포니 오케스트라 취임 후, 1983/1984 시즌에 워릭 아트센터에서 한 주에 걸쳐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곡을 선보였다. EMI에서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곡을 당초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녹음하려던 계획 대신에 버밍엄 심포니와 하기로 결정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나는 시벨리우스를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에 대해 강한 주관을 갖게 됐다. 나는 그가 응당 받아야 할 평가를 일반적으로 받지 못했다고 느꼈다. 연주하고 악보를 들여다보면서 커다란 불일치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 아주 작은 단위로부터 모든 것이 생겨나는 세세한 과정을 보여주기보다는, 디테일이 흐릿해지거나 배경의 잡음으로 인식되곤 했다.”
래틀은 베리룬드의 본머스 심포니 재직 시절에 시벨리우스의 멜로디들이 핀란드어의 발음 및 리듬과 연관 있다는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래틀/버밍엄 심포니의 음반이 템포의 낙차와 진폭을 크게 가져가고, 뚜렷한 셈여림의 대비를 통해 통쾌하고도 긴장을 서리게 했다면, 베를린 필과는 장중한 속도감을 택한 듯싶다. 바이올린의 고음역이 빚어내는 피아니시모 트레몰로로 직조된 단락과 현악 파트의 세련미도 큰 즐거움을 준다. 버밍엄 심포니와의 열정을 추억하되 베를린 필 특유의 정밀함이 배가된 맛이다. 사라스테와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집을 두 차례(RCA, Warner)나 녹음한 핀란드 방송교향악단은 린투의 지휘봉에 유연성과 노련함을 더해준다. 린투가 연출하는 북유럽 특유의 두터운 맛은 이러한 악단의 역사와 내력에 빚져 있다.
서예에 비유하면 린투의 연주는 농묵(濃墨)이 살아 있는 묵직한 궁서체를, 래틀의 연주는 비백(飛白, 획이 나는 듯한 서체)이 살아 있는 초서체를 연상케 한다. 특히 래틀보다 린투에게서 무게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느슨히 조절한 템포감에 있다. 가장 많이 연주되는 교향곡 2번은 둘 다 템포에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관객들이 그리고 있는 교향곡 2번을 이들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교향곡 3번 3악장에선 9분 47초(린투)와 8분 43초(래틀), 교향곡 4번 1악장은 11분 39초와 10분 23초, 2악장은 5분 34초와 4분 43초, 교향곡 5번 1악장은 14분 37초와 13분 8초, 3악장은 10분 30초와 9분 6초로 나뉜다.
지휘자의 전력도 7개의 보물을 각기 다르게 대하는 데 일조한다. 퍼커셔니스트 출신의 래틀은 리듬주의로 채색하고, 첼로를 공부한 린투는 현악기 중심의 선율주의로 채색한다. 어쨌건 농묵의 무게인가, 비백의 속도감이냐는 듣는 이의 취향이 선택할 문제다.
린투는 올해 내한하여 서울시향과 그의 주특기인 시벨리우스 교향곡 5번을 선보인다(6월 2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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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누 린투/핀란드 방송교향악단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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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먼 래틀/베를린 필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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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아울로스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