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 어느 날,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무대에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이하 RCO)가 섰다.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이 홀에서 RCO의 사운드가 어떻게 울려 퍼질지 궁금했다. 당시 연주곡목이던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은 그의 호기심을 시험해보기에 완벽한 선곡이었다. 그는 악장에게 지휘봉을 맡기고 객석에서 소리를 들어볼 참이었다. 서른네 살의 악장은 젊었지만, 16년 차 베테랑이었다.
악장은 처음에 번스타인의 청을 거절했다. 연주를 수십 번 했다고 해서 지휘를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아무런 준비도 없이 동료들 앞에 서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번스타인은 떠밀 듯 그에게 지휘를 맡기고 홀 뒤쪽으로 걸어갔다. 첫 번째 지휘 연습을 말러 교향곡 1번으로 하다니… 정신없는 1악장의 15분이 지나갔다. 결과는 참담했다. 그러나 다시 무대로 돌아온 번스타인은 의외로 그에게 뭔가 특별한 부분이 있다며 지휘를 공부해볼 것을 권유했다. 1년 후, 그는 바이올린을 그만두고 지휘자의 길로 들어서리라 선언했다. 그가 바로 야프 판 즈베던(Jaap van Zweden)이다.
즈베던은 피아니스트인 아버지의 권유로 5세에 바이올린을 시작하고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영국의 오픈 마이크 UK가 주최하는 음악 콘테스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아들의 가능성을 확인한 부모의 도움으로 뉴욕 유학길에 올라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도러시 딜레이의 지도를 받았다. 미국 생활 3년 차가 되었을 때 베르나르트 하이팅크가 그를 찾았다. 당시 RCO의 음악감독이던 그는 19세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악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야말로 파격이자 모험이었다. 즈베던은 그로부터 17년 간 악장으로 활동했다.
지난 1월 27일, 즈베던이 2017년 가을부터 뉴욕 필하모닉의 26번째 음악감독으로 취임한다는 깜짝 뉴스가 발표되어 세계 음악계를 뒤흔들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2008년 댈러스 심포니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하기까지 미국에서 그의 존재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댈러스 심포니가 지명도 없는 유럽 출신 지휘자에게 2006년 단 한 번의 객원지휘를 계기로 음악감독직을 제안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12년에는 홍콩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으로 입성한다는 소식까지 날아들었다.
그는 현대음악 레퍼토리의 비중과 투어 공연을 늘리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오케스트라를 혹독하게 조련했다. 댈러스 심포니의 악장 앨릭스 커는 즈베던을 가리켜 “악장만이 할 수 있는 기술적 디테일까지 꿰뚫고 있어 오케스트라를 완전히 장악한 지휘자”라고 평가했고, 홍콩 필하모닉의 수석 비올리스트 앤드루 링은 “그의 깐깐하고 철두철미한 성격 덕에 모든 단원이 리허설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본인이 에너지를 쏟아내는 만큼 연주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요구하는 것이 그의 철학”이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그의 강직함은 종종 불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댈러스의 한 언론은 그와 일부 댈러스 심포니 단원들 사이에 불거진 갈등에 대해, ‘그럼에도 이전에는 들을 수 없던 사운드가 만들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며 즈베던의 손을 들어줬다.
네덜란드의 작은 오케스트라에서 시작해 전 유럽과 뉴욕까지 영역을 확장한 즈베던이 마치 칭기즈칸 같은 저돌적인 야심가처럼 보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성공을 경계하며, 세상의 다른 면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다. ‘가지지 못한 것을 따라가다 보니 결국 불행해지더라’는 그의 말이 공감되는 이유다. 그의 철학이 뉴욕에서 어떤 모습으로 실현될지 무척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