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펠리에 오페라의 ‘투란도트’

한국인 ‘칼라프’ 박지응, 유럽을 열광시키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4월 1일 12:00 오전

성공리에 막을 내린 야니스 코코스 연출의 푸치니 ‘투란도트’ 의 성공 뒤에는 한국인 테너 박지응의 호연이 있었다

성공리에 막을 내린 야니스 코코스 연출의 푸치니 ‘투란도트’ 의 성공 뒤에는 한국인 테너 박지응의 호연이 있었다


▲ 거대한 투란도트의 성을 미니멀하게 형상화한 몽펠리에 오페라의 무대 ©Marc Ginot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가 몽펠리에의 오페라 베를리오즈 무대에 올랐다. 그리스 출신 연출가 야니스 코코스(Yannis Kokos)가 진두지휘한 이번 공연은 메트 오페라와 로렌 오페라의 공동제작으로 2013년 뉴욕과 낭시에서 각각 초연된 후 2년 반 만의 리바이벌 무대다.

2월 7~11일 3일간 몽펠리에 청중의 주목을 받으며 성공리에 막을 내린 ‘투란도트’. 작품의 흥행 비결은 명확한 코코스의 연출 덕도 있지만, 두 한국인 성악가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2013년 초연에도 이번 무대와 각각 같은 배역으로 호평을 받은 바 있는 칼라프 역의 테너 박지응과 핑 역의 바리톤 임창한이 그 주인공이다.

연출과 캐스팅의 성공적인 조합

2월 11일 2000석이 넘는 오페라 베를리오즈는 만원이었다. 코코스의 미니멀한 무대장치와 이에 대비되는 세심한 디테일의 연출은 청중의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거대한 투란도트의 성을 형상화한 단일 세트는 둥근 달과 그 앞을 가리는 검은 구름 등을 통해 다양한 느낌으로 변형됐다. 투란도트가 제시한 수수께끼를 맞히지 못한 왕자들이 처형되는 그로테스크한 집행장이나 일렬로 움직이는 궁중 관리들의 동선은 시선을 자극할 만큼 이국적이었고, 한 편의 경극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노란색과 검정색이 대비된 비단 드레스를 입은 투란도트 역의 소프라노 카트린 카플루슈(Katrin Kapplusch)는 차갑고 도도한 공주로서의 자만심을 잘 드러냈다. 투란도트의 거창한 드레스만큼이나 큰 몸집을 지닌 칼라프 역의 박지응은 남루한 남색 의상에 머리를 늘어뜨린 채 등장했다. 소프라노 카플루슈가 강렬한 비브라토와 귀에 거슬릴 정도의 고음으로 투란도트를 커버했다면, 박지응은 탄탄한 흉성을 바탕으로 하이 C(가온 C로부터 3옥타브 위의 C로, 성악가의 역량을 상징)를 수려하게 뽑아내며 자신이 뛰어난 드라마틱 테너임을 입증했다.

불꽃 튀는 두 주인공의 대립 가운데 인간미를 부여한 것은 투란도트의 신하 핑·퐁·팡의 퍼포먼스였다. 2막 초, 그들은 나라를 돌보는 수상에서 투란도트의 자존심을 보호하기 위해 왕자들을 처형하는 사형수로 전락한 신세를 토로한다. 핑 역의 바리톤 임창한이 부른 아리아 ‘나는 호난에 집이 있어’는 압권이었다. 프랑스와 런던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임창한은 유럽 무대에서 잘 알려진 중견 바리톤이다. 그의 뛰어난 가창력과 전문성을 높이 산 야니스 코코스는 이번 공연에서 대본상 핑에게 없는 여러 동선을 창안해 그에게 할당했다. 앞으로도 임창한은 코코스와 여러 작품을 함께 할 계획이다.


▲ 류 역의 마리안젤라 시칠리아 ©Marc Ginot

몽펠리에 랑그도크루시용 오케스트라·합창단을 지휘한 미카엘 쇤반트와 류 역의 이탈리아 소프라노 마리안젤라 시칠리아 역시 남다른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박지응에게 쏟아진 환호는 현재 정상의 칼라프로 군림 중인 테너에게 보내는 헌정 그 자체였다.

현재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프랑스·그리스 등지에서 ‘루디 박’으로 활발하게 커리어를 쌓고 있는 박지응을 2월 11일 오페라 베를리오즈 대기실에서 만났다. 파바로티 같은 풍채에 어린 아이 같은 미소를 지닌 박지응은 천의 얼굴을 지닌 테너였다. 인터뷰는 이번 공연의 핵심인 칼라프 역과, 드라마틱(극적이고 영웅적인 소리)부터 리릭 스핀토(날카롭고 통쾌한 소리)까지 방대한 테너 레퍼토리를 넘나드는 그의 커리어 중심으로 이뤄졌다.

요즘 정상의 칼라프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칼라프는 저의 목소리와 잘 어울리는 역입니다. 이제는 익숙해져서인지 편하게 부르게 됐지요. 2007년 칼라프 데뷔 당시에는 공연이 끝나고 나면 목이 쉬어 말도 못할 정도였는데, 14~15개의 프로덕션을 거친 지금은 완성 단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올해 40세로 데뷔 9년 차지만 아직도 신인의 마음가짐으로 무대에 임합니다. 아직은 유명세보다 경력을 쌓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앞으로 5년 정도 여러 극장에서 다양한 역할을 경험하다 보면 45세쯤 알찬 소리를 내는 테너로서 전성기를 맞이하지 않을까요.

이번 리바이벌 공연에서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지요?

기존의 칼라프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데 비해, 야니스 코코스의 연출에서는 좀 더 절제된 내면세계를 가집니다. 그래서 저도 심오한 내면의 표현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더욱이 이번 연출은 낭시 초연 후 두 번째 무대라 작품에 대한 해석을 충분히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청중에게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연기했던 초연에 비해, 이번 무대는 어둡고 내밀한 삶 위에 사랑과 희망을 살짝 얹어내며 투란도트의 마음을 사로잡는 칼라프 캐릭터 자체에 집중했습니다.

칼라프 역에서 자신의 모델이 된 성악가가 있다면?

스승이었던 니콜라 마르티누치입니다. 젊은 시절 그의 화려하던 칼라프는 존경할 수밖에 없는 레퍼런스입니다. 드라마틱한 연기로 전 세계를 누빈 테너 주세페 자코미니도 있습니다. 제가 과연 그 뒤를 이을 수 있을까 종종 생각합니다.

아네모스 콩쿠르·마리오 란자 콩쿠르·투란도트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주목받았습니다. 콩쿠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경험이 많은 편은 아닙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콩쿠르에 의존해서 시간과 힘을 낭비한다. 그 시간에 기초를 더 튼튼히 하고 오페라 공부에 전념한다면 좋겠다’는 서울대 음대 박세원 교수의 글을 본 후로 콩쿠르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또 테너 프랑코 코렐리를 존경하는데, 국제도 아닌 국내 콩쿠르에 출전해 우승한 후 별다른 이력 없이도 줄곧 오페라 무대에서 인정받은 그의 커리어를 보며 그 다짐이 확고해졌죠.

콩쿠르에서 얻은 교훈이 있다면요.

진짜 실력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통해 청중의 마음을 울릴 수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라도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베로나 아레나에서 열렸던 투란도트 콩쿠르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중국 프로젝트를 후원하고 중국인 성악가를 우승시키는 콩쿠르였는데 제가 그 사이에 끼어들어 우승한 거죠. 값진 성공이었습니다. 이날 연미복을 입으며 고민 끝에 베로나 아레나의 스타로 군림하던 테너 니콜라 마르티누치 분장을 했습니다. 그의 정기를 받고 싶기도 했고, 묘하게 행운이 따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준비한 검정 펜으로 눈썹과 수염을 그리고 열심히 노래했습니다. 그 덕인지는 몰라도 귀한 상을 받게 됐습니다.

본명은 박지응인데 유럽에서는 ‘루디 박’으로 불립니다.

2002년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이탈리아 테너 만리오 로키의 가르침 아래 유학을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테크닉을 배우자마자 미완성 같았던 하이C를 정통 벨칸토 발성으로 능숙히 소화하게 됐습니다. 푸치니 ‘라 보엠’ 중 로돌포의 아리아 ‘그대의 찬 손’을 배우는 중이었기에 로키는 저를 ‘로돌포’라 불렀고, 더 친숙하고 기억하기 쉬운 약자 ‘루디’를 사용하게 됐습니다. 본명인 박지응은 ‘뜻에 응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 대가 사이에서 동양인의 몸으로 당당하게 주역에 도전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얻는 것과 잃는 것을 반복하는 이 도전들이 ‘큰 뜻에 응하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양인으로서 핸디캡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혹여 표현에 부족함이 있을까 싶어 끊임없이 연습했습니다. 동료 성악가들이 종종 웃으며 이야기합니다. “루디, 자네 뭘 그리 연습해? 지금은 쉬는 시간이니 쉬라구!” 이때 저는 웃으며 대답하죠. “너희들한테 있지만 난 없는 게 많아. 그래서 이 시간에 하나라도 더 해보고 싶어.” 그렇게 연습한 후 오른 무대는 늘 제게 자신감을 안겨줬습니다. 연습할 때 단순한 반복이 아닌 깊은 의미를 생각하며 연습하곤 합니다. 특히 연출가의 의도가 무엇일까에 초점을 맞춥니다. 음악을 시작했을 때, 이렇게 많은 작품을 소화해낼 수 있는 가수로 성장할 것이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플라시도 도밍고가 소화한 작품 수에 놀라며 그중 몇 작품만 잘해내도 최선일 거라는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여러 작품 세계를 맛볼 수 있는 능력과 행운을 얻게 돼 감사할 따름입니다.


▲ 칼라프 역의 테너 박지응과 투란도트 역의 소프라노 카트린 카플루슈 ©Marc Ginot

박지응의 빛나는 레퍼토리

베르디·푸치니·레온 카발로 같은 벨칸토와 베리스모 레퍼토리를 섭렵 중입니다. 무대 경험에 비춰볼 때 이들의 본질이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베리스모 오페라를 공연할 때 시대적 배경에서 오는 과거와 무대 위의 현재, 그리고 미래 세 가지 차원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를 고민합니다. 차원을 관통하는 본질이 바로 작품 속의 ‘사랑’입니다. 무대에서 이를 체험한 순간순간은 기막히게 멋진 소설 같습니다. 오페라라는 장르 안에 내재된 드라마틱한 이미지들은 ‘음악을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승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줍니다.

본인이 연기한 배역들을 분석해본다면?

베르디 ‘에르나니’ ‘리골레토’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 ‘일 트로바토레’, 푸치니 ‘토스카’ ‘투란도트’ ‘아이다’ 등 그동안의 작품에서 느낀 것은 주인공이 누군가의 ‘조력자’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극을 이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오텔로’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주인공이 서슴없이 작품을 쥐었다 놓았다 하며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청중, 즉 해석자 관점의 극단적인 흑백논리를 이용해 광기로까지 치닫는 오텔로는 내면의 감정을 세세하게 관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배역입니다.

베리스모 오페라 중에서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나요?

레온 카발로의 ‘팔리아치’와 마스카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입니다. 매번 ‘팔리아치’를 부르면서 베르디 ‘오텔로’를 뛰어넘는 희열을 느낍니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비겁하고 거친 한 남자를 그 어떤 성악가들의 음색보다 더 비열하고 추악한 인간으로 그려낸다” “루디 박의 투리두는 시칠리아노(‘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배경이 된 시칠리아 섬의 주민)의 삶을 대변해주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는 평을 들으며 개인적으로도 만족했던 작품입니다.

도전하고 싶은 프랑스 오페라 레퍼토리는 무엇인가요?

올해 예정되었던 생상스 ‘삼손과 데릴라’가 갑작스런 극장 측의 사정으로 연기됐습니다. 테러의 여파가 아닐까 하는데, 다행히 내년에 그대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이후 참여하고 싶은 오페라는 비제 ‘카르멘’입니다. 갑작스런 허리 수술로 인해 취소할 수밖에 없었던 작품인데, 회복 후에도 연이 닿지 않아 아직 불러보지 못했습니다. 우선 ‘삼손과 데릴라’를 잘 마쳐야겠죠.

앞으로 일정이 궁금합니다.

‘삼손과 데릴라’ 대신 베르디 ‘운명의 힘’을 공연하게 됐습니다. 많은 분들이 ‘운명의 힘’의 주인공인 알바로 역에 리릭 스핀토보다 가벼운 테너를 선호합니다. 하지만 저는 알바로가 그야말로 최고의 드라마틱 배역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좀 더 나이가 들면 도전해야지’라 생각하던 와중에 불쑥 기회가 생겨 열심히 악보를 보고 있습니다. 테크닉적으로는 문제가 없는데 그 깊이를 깨우치기에 부족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또 하나의 새로운 도전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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