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오페라 발레 예술감독 사임한 뱅자맹 밀피에

의욕 넘치는 젊은 반항아, 전통의 벽에 부딪히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4월 1일 12:00 오전


▲ 뱅자맹 밀피에, 오렐리 뒤퐁, 스테판 리스너 ©Jean Christophe Marmara

지난 2월 4일의 톱뉴스는 파리 오페라 발레의 예술감독 뱅자맹 밀피에(Benjamin Millepied)의 사임이었다. 프랑스 언론들은 오전부터 가르니에 극장 앞에 진을 치며 오후 3시에 예정된 공식 기자회견을 기다렸다. 기자회견장에는 뱅자맹 밀피에와 파리 오페라의 극장장인 스테판 리스너, 그리고 최근 파리 오페라 발레의 에투알에서 물러난 오렐리 뒤퐁이 모습을 드러냈다. 밀피에는 사임 이유를 개인 사정이라 밝히며 “자신의 예술적 이상은 행정적 절차보다 안무에 더 가깝다”고 덧붙였다. 이날 스테판 리스너는 오렐리 뒤퐁을 밀피에의 후임자로 공표했다.

프랑스 보르도 출신인 뱅자맹 밀피에는 2001년 뉴욕 시티 발레의 에투알에 임명되며 발레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2011년 뉴욕 시티 발레를 떠나 이듬해 자신의 컴퍼니인 LA 댄스 프로젝트를 창단했고, 2014년 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 파리 오페라 발레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했다. 젊고 잘생긴 발레 스타의 취임은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밀피에가 안무한 작품들의 티켓 판매가 급증했고, 2015년 9월 밀피에 부부(그는 영화 ‘블랙 스완’에서 인연을 맺은 배우 내털리 포트먼과 결혼했다)가 참석한 파리 오페라 발레 시즌 오프닝 갈라는 수많은 메세나의 관심을 모으며 전례 없는 액수의 기부금을 유치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처럼 많은 이의 주목을 받은 밀피에가 취임 15개월 만에 물러난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적인 의견은 올해 38세인 그가 ‘지나치게 혁신적’이라는 것이다.

밀피에는 루이 14세 때부터 이어진 파리 오페라 발레의 전통을 거스른 ‘반항아’였다. 발레단 기존의 등급 시스템을 떠나 자격이 주어지지 않은 신예에게도 솔리스트 역을 주었고, 1713년 창단 후 처음으로 혼혈인을 주역으로 등용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무용은 환상적인 통합의 도구”라 표현하며 파리 오페라 발레가 이주민들이 자리 잡은 파리 근교에서도 공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밀피에의 혁신성은 해외 발레단의 무용수들을 주역으로 발탁한 점에서도 두드러진다. 다양한 발레단과의 교류가 파리 오페라 발레에 큰 영감을 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는 지난해 12월 “오늘날 전 세계를 통틀어 그 누구도 김기민처럼 ‘라 바야데르’를 소화하는 이는 없다”며 마린스키 발레의 수석무용수 김기민을 ‘라 바야데르’의 주역으로 세운 바 있다.


▲ ©Agathe Poupeney

창작 안무를 우선하는 성향 역시 눈에 띄었는데, 그는 파리 오페라 발레의 대표 레퍼토리인 누레예프 버전 ‘라 바야데르’를 예로 들며 “누레예프는 23년 전에 죽었다”며 이후의 창작 전통이 전승되지 않았음을 풍자하기도 했다. 이 발언은 “누레예프의 ‘라 바야데르’를 공연하지 않는 것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없애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단원들의 거부감을 자아냈다.

밀피에의 의욕적인 개혁은 결국 발레단과의 불화를 초래했다. 프랑스의 ‘마리안’지는 “154명의 단원 중 대다수가 그의 사임을 희소식으로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파리 오페라 발레의 전 예술감독 브리지트 르페브르는 ‘피가로’지를 통해 “애초부터 발레를 잘 아는 전문가를 임명했어야 했다. 뱅자맹은 대규모 무용단을 진두지휘할 그 어떤 경험도 지니지 않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오데트(발레 ‘백조의 호수’의 주인공)는 흑인일 수 없다’는 파리 오페라 발레의 19세기적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려 한 밀피에의 개혁은 결국 실패로 끝난 것일까?

밀피에와는 달리 “클래식 발레를 중심으로 컨템퍼러리 레퍼토리를 겸하는 파리 오페라 발레의 전통을 존중할 것”이라는 소감을 밝힌 오렐리 뒤퐁. 그녀는 ‘밀피에 방식’이라 명명된 혁신의 물결을 과거의 전통과 어떻게 공존시킬 것인가. 세계 무용계가 뒤퐁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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