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2일~7월 3일
충무아트홀 대극장
전형적인 결말을 보완하는 춤, 춤, 춤
지하철 안에서 신문배달부가 신문을 팔던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성행하기 이전 일이다. 석간신문도 꽤나 인기를 누렸다. 일부러 신문이 발행되는 시간에 맞춰 기자회견을 하는 풍경도 낯설지 않았다. 이른바 가판이 중요했던 시절이다.
우리만의 사정은 아니다. 대중신문의 역사 속에선 미국에서도 익숙하던 풍경이다. 특히 ‘일전신문’이 각광받던 1900년대 미국의 대도시 뉴욕에서는 일상이었다. 신문의 유통은 ‘뉴스보이 캡’이라 불리는 빵모자를 눌러쓰고 한쪽 어깨끈이 있는 천 가방에 신문을 담아 도시를 누비던 뉴스보이들의 몫이었다. 배달 소년들은 대부분 부랑자나 가난한 집 아이들로, 싼값에 신문을 사서 약간 덤을 얹어 이윤을 얻었다. 어느 날 신문 재벌이던 조지프 퓰리처는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배달 소년들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신문 값을 올리는데, 힘없어 보이던 아이들이 이에 대항해 신문 사상 최초의 파업을 벌인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보이던 이 사건은 그러나 스스로 파업 신문을 발행하는 등 조직적으로 저항하던 꼬마들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미국 신문 역사뿐 아니라 노동운동사에서도 큰 의미를 남긴 엄연한 실화다.
이 흥미로운 사건을 뮤지컬로 만든 작품이 ‘뉴시즈’다. 원래는 영화가 먼저 만들어졌고, 공연은 이 영상물을 무대용 콘텐츠로 재가공한 ‘무비컬’이다. 영화와 뮤지컬 모두 디즈니에서 제작했다. 덕분에 디즈니 특유의 ‘기-승-전-해피엔딩’식의 행복 바이러스가 넘치는, 전형적인 가족 오락물 형식을 띤다. 사실 디즈니가 만들면 인어공주도 결국 행복해지고, 아이다도 윤회로 라다메스와 재회한다. 이 뮤지컬도 마찬가지다. 파업을 주도하던 배달부 소년 잭이 퓰리처의 외동딸 캐서린과 연인이 된다는 스토리가 그렇다. 하지만 무대가 반드시 역사의 고증일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디즈니의 핑크빛 윤색은 귀여운 변신쯤으로 눈감고 넘어갈 수도 있다.
이 작품 최고의 볼거리는 역동적인 군무다. 어깨 한쪽에 신문 가방을 걸치고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모습은 어깨춤을 절로 추게 한다. 2013년 토니 어워즈 시상식 사회를 맡았던 닐 패트릭 해리스가 객석 통로로 춤추며 등장하는 ‘뉴시즈’의 출연자들을 보며 “마음에 드는 배달부 있으면 말해요. 집에 갈 때 선물로 줄게요”라는 성적 농담을 한 것도 이들의 이미지를 설명하는 사례가 된다. 원작이 올랐던 브로드웨이에서도 어디서 저런 꼬마 느낌의 배우들을 저토록 많이 찾아냈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번 국내 무대도 역동성이나 에너지로는 크게 뒤지지 않는 완성도를 보여줘 박수갈채를 이끌어낸다.
브로드웨이에서는 공연이 끝나도 단체 관람을 온 중·고교생 관객들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공연 관계자가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주는 교육 프로그램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업 당시에 만들었던 배달 소년들의 신문 복사본을 나누어 주며 역사를 들려주고, 이를 경청하던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문화가, 예술이, 그리고 뮤지컬 작품이 교육의 도구로까지 확장될 수 있음을 실감케 해준 경험이었다. 물론 우리식 벤치마킹의 가능성도 기대하게 하는 풍경이다. 우리 관객들도 한 번쯤 곱씹어가며 감상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사진 오디뮤지컬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