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푹 찌는 더위를 뚫고 연희동의 한 스튜디오로 두 명의 아리따운 여인이 들어왔다. 4일의 간격을 두고 만난 이들은 발레 무용수 강효정과 박윤수다. 일 년 중 열 달 반을 각각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와 함부르크에서 생활하다 비시즌인 7~8월에만 고국에 오는 그녀들을 살인적인 더위로 맞이하려니 괜스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남자친구와 동행한 강효정, 어머니와 함께 온 박윤수는 오랜만에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 행복해 보였다.
1985년생인 강효정은 2002년 로잔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슈투트가르트 발레 산하의 존 크랑코 발레학교에 입학했고, 2003/2004 시즌부터 슈투트가르트 발레에 합류했다. 코르 드 발레(군무)부터 차근차근 성장한 그녀는 2011년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을 마친 후 커튼콜 무대에서 예술감독 리드 앤더슨에게서 수석 무용수로 승급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지난해 11월과 올해 7월, 한국과 독일에서 각각 열린 슈투트가르트 발레의 선배 무용수 강수진의 은퇴 공연에 함께하며 많은 이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1989년에 태어난 박윤수는 2004년 로잔 콩쿠르에 출전한 것을 계기로 이듬해 함부르크 발레학교에 입학했고, 열여덟 살에 함부르크 발레에 유일한 한국인 무용수로 입단했다. 코르 드 발레로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존 노이마이어의 ‘베니스의 죽음’을 공연하기로 한 무용수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주역으로 설 기회를 얻었고, 불과 4시간의 연습만으로 성공적인 무대를 선보여 상임 안무가이자 디렉터인 존 노이마이어의 강한 신임을 얻었다. 지난 7월, 10년 만의 한국 공연인 ‘한국을 빛내는 해외 무용스타 초청 공연’을 통해 노이마이어와 함부르크 발레의 내한을 기다린 많은 팬들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장광열 춤비평가는 현재 해외 직업 무용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무용수가 200여 명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이들 중에는 콩쿠르를 통해 메이저 무용단에 입단해 단계별로 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최근에는 한국의 발레 수준이 높아지면서 국내 무용단에서 활동하다 클래스나 워크숍을 통해 해외 발레단에 주역으로 발탁되어 입단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강효정과 박윤수는 존 크랑코(1927~1973)와 존 노이마이어(1942~)라는 인물로 각각 대표되는 독일의 유서 깊은 두 발레단에서 10년 이상 차근차근 성장하고 있다.
두 발레단 역사의 시작은 4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는 발레닥시옹(하나의 스토리에 의한 극적 발레 형식)을 창시한 장 조르주 노베르(1727~1810)에 의해 설립되었고, 표현력이 강조된 드라마 발레를 오랜 세월 동안 견지했다. 1961년, 존 크랑코가 새로운 예술감독으로 부임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크랑코는 디베르티스망(스토리와 관계없는 춤의 향연)을 지우고 주인공의 심리 변화에 집중하는 등 고전주의에 기반을 둔 레퍼토리를 현대적 감각으로 강화시켰다. 순수한 움직임보다는 극적 표현을 강조하고, 날카로운 위트를 선보이며 발레를 대중의 중심에 가져다놓았다. 존 크랑코 발레학교를 설립한 것도 슈투트가르트 발레가 세계적인 무용단으로 도약하는 데 일조했다.
존 노이마이어는 로열 발레의 무용수로 활동하던 시절, 크랑코의 눈에 띄어 초청 무용수와 안무가로서 크랑코와 연을 맺었다. 노이마이어의 안무 재능을 발견한 크랑코는 그가 안무가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슈투트가르트 발레에서 안무 기초를 다진 노이마이어는 1973년 함부르크 발레의 상임 안무가이자 디렉터가 되었고, 올해로 43년째 단체를 이끄는 동안 위대한 업적을 쌓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소설, 그리스 신화를 재해석하기를 즐기는 노이마이어는 사랑의 감정, 아름다움의 몸짓을 통한 환상의 세계를 구현한다. 그동안 120편이 넘는 작품을 발표했으며, 1978년 함부르크 발레학교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1988년에는 시의 원조를 받아 함부르크 발레센터를, 2006년에는 존 노이마이어 재단을 설립해 발레 부흥에 힘쓰고 있다.
서른을 전후한 두 발레 무용수, 강효정과 박윤수는 아름답게 무르익은 모습이었다. 10년 간 한 일터에서 끈기 있게 버티며 흘린 그녀들의 땀은 ‘자부심’으로 빛났다. 화려한 무대에 오르기까지의 기다림, 한 순간의 희열이 아닌 만족스러운 삶을 위한 오랜 기다림을 견뎌낸 이들은,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박수의 무게를 잘 안다. 성숙함과 풋풋함을 동시에 품은 그녀들과의 만남을 지면에 전한다.
슈투트가르트 발레 강효정
2015/2016 시즌에는 몇 회 정도 무대에 섰나?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50회쯤 되는 것 같다. 무대에 오르는 횟수로 따지면 코르 드 발레(군무)일 때가 훨씬 많았다. 대신 지금은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이번 시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인가?
‘오네긴’을 통해 참 의미 있는 시간들을 보냈다. 2015년 10월에는 베를린 슈타츠발레의 초청을 받아 타티아나로서 미하일 카니스킨(오네긴), 이아나 살렌코(올가)와 호흡을 맞췄고, 11월과 올해 7월에는 각각 한국과 독일에서 강수진 선생님의 은퇴 공연에 함께해 올가 역을 연기했다. 지난해 11월 한국 공연 마치고 12월에 도쿄에서 다시 타티아나를 연기했는데, 정확히 10년 전 같은 장소에서 공연하던 기억이 떠오르더라. 그때는 군무로, 그것도 출연하기로 한 무용수가 부상을 당해 1막에만 잠깐 출연했는데, 어머니가 그 모습 보고 감동을 받아 편지를 남겨주셨다. 그 공연이 어머니가 본 내 마지막 모습이었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주역으로서 무대에 선 내 모습을 보고 좋아하셨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뭉클했다.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괜찮나?
오른쪽 발목의 아킬레스건이 찢어진 상태다. 작년 12월부터 통증이 있었는데, 늘 한두 군데는 아프니까 곧 괜찮아지겠지 했다. 그런데 올해 7월까지 나아지지 않았다. 강수진 선생님과의 공연도 못할 뻔했다. 의사가 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는데, 그 공연은 꼭 하고 싶어서 약 먹으며 꾹 참고 조심조심했다. 정밀검사를 해보니 부상 시점은 알 수 없고, 오랫동안 조금씩 찢어진 것 같다고 하더라. 3년 전에 큰 부상을 당한 이후 몸을 소중히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실천해왔는데 또 이런 일이 생겨버렸다.
그때는 골반에 문제가 있었던 걸로 안다.
맞다. 수석 무용수 되고 나서 일 년 정도 지난 때였다. 골반 근육이 파열되어 계단도 못 오를 정도였다. 의사로부터 수술이 필요하다고, 전문 무용수로서 삶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들었지만 재활센터에서 운동과 치료를 병행해 극복했다. 그전에는 정신적 의지로 육체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춤을 사랑하는 만큼 몸을 아껴야 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슈투트가르트 발레의 예술감독님 외에 많은 이가 신뢰와 지지를 보내주어 헛되지 않은, 성장의 발판으로 삼을 만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현재 예술감독인 리드 앤더슨은 존 크랑코의 정통을 그대로 이어가면서도 신진 안무가들을 발굴하는 데 힘쓰고 있다. 12년 간 발레단에서 춤을 춰보니 존 크랑코는 어떤 인물이라는 생각이 드나?
단연코 천재라고 생각한다. 일찍 생을 마감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크랑코의 작품은 춤과 연극의 요소가 완전히 결합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는 이렇게 테크닉을 취하고, 이 부분에서는 이러한 느낌으로 연기를 해야지’라는 생각을 할 필요 없이 작품에 완전히 녹아들면 모든 동작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같은 작품이라도 과거에 춤을 추었을 때와 나이를 좀 더 먹은 후 임할 때의 느낌이 전혀 다르다. 크랑코의 작품은 하면 할수록 작품과 무용수가 같이 성장하는 것 같다.
드라마 발레를 완벽하게 소화하기 위해 별도의 감정 연기 연습도 하나?
작품에 임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관련 자료를 전부 모으는 것이다. 원전이 있다면 공부하듯 읽고, 중요하게 느껴지는 대사가 있으면 기억해두었다가 무대에서 몸으로써 그 문장을 표현한다. 작품에 깊이 빠질수록 무대에서 진실한 연기를 할 수 있는 것 같다.
수석 무용수로서 슈투트가르트 발레의 특징과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일 년에 두 번씩 노베르 소사이어티가 후원하는, 신인 안무가들을 발굴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이 제도를 통해 세계적인 안무가가 된 분이 많다. 존 노이마이어, 윌리엄 포사이스도 우리 발레단 출신이다. 앤더슨은 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 외에도 신인 예술가를 찾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앤더슨은 예술감독으로는 드물게 안무가로서의 경력이 없는데, 그렇기 때문에 시야기 좁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작품까지 수용할 수 있는 것 같다. 앤더슨의 ‘선택’을 유럽에서 신뢰하고 있고, 덕분에 우리 발레단을 거친 안무가는 많은 기회를 얻는다. 정통성을 가지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게 가장 큰 장점 같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은퇴 공연에 함께했는데,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하며 어떤 기분이 들었나? 같은 발레단에서 그녀를 지켜보며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 같다.
50세를 앞둔 나이에 그렇게 훌륭하게 무대를 해냈다는 데 큰 감동을 받았다. ‘오네긴’ 3막을 춘다는 건 젊은 무용수들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온몸에 파스와 테이프를 붙이고 전막에 필요한 모든 연습을 하루도 빠짐없이 하시더라. 그 위치에 올라서도 열심히 하고 더 배우려는 모습이 존경스럽다. 내가 열여덟 나이에 발레단에 입단했을 때 선생님은 이미 수석 무용수였는데, 곁에서 참 많이 배웠다. 말로 조언을 해주기보단 ‘잘해, 수진 언니’라고 메모를 적은 초콜릿을 전해주는 등 따뜻한 응원을 보내주시곤 했다.
발레리나 강수진은 무용수로서 화려한 시기를 보낸 후 현재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으로 재직 중인데, 그녀를 보며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기도 할 것 같다.
아직 무용수로서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주역이 되었으니 다 이루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주역이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출 수 있는 작품이 많아지는 거니까. 안무에 대한 관심은 없는지 많은 분들이 물어보시는데, 가끔씩 아이디어가 스치긴 한다. 준비가 되고 용기가 생기면 내놓을 생각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잘할 수 있고 성취감이 느껴지는 건 가르치는 일이다. 수석 무용수가 되고 나니 나를 우러러보는 후배들이 생겼다. 후배 무용수들이 도움을 청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줄 때 느껴지는 또 다른 만족감이 있더라.
어렸을 때는 소극적인 성격이었다고 들었다. 한 방송사 다큐멘터리를 보니 사과 먹는 소리가 부끄러워 사과를 못 먹었다고 할머님이 말씀하시던데.(웃음) 소심한 어린이가 홀로 유럽행을 결심하고 수많은 사람 앞에서 춤을 추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 지금은 성격이 많이 바뀌었나?
비슷하다. 지금도 사과를 먹지 못한다.(웃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무대에 설 수 있던 건 오직 발레가 좋아서였기 때문이다. 늘 하고 있는 발레만 생각하니까 이겨낼 수 있던 것 같다. 조용한 성격은 여전한데, 주역이 된 이후 조금 바뀌었다. 수석 무용수로서 발레단의 본보기가 되어야 하고, 관객과 친밀하게 교류도 해야 하니 책임감이 느껴지더라. 적극성을 기르려고 노력하고 있다.
슈투트가르트로 돌아가기 전까지 무엇을 할 건가?
뉴질랜드 여행 계획이 있다. 완치를 서두르려면 부상에 대한 걱정을 잊고,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것 먹으면서 행복하게 지내야 할 것 같다. 곧 괜찮아질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함부르크 발레 박윤수
함부르크 발레는 이제껏 한 번도 내한 공연을 가진 적이 없는데, ‘한국을 빛내는 해외 무용스타 초청 공연’을 통해 발레단 소속 무용수 2인이 선보이는 존 노이마이어 작품을 볼 수 있어서 반가웠다. 말러 교향곡 5번의 4악장을 바탕으로 하는 ‘아다지에토’와 ‘신데렐라’의 파드되를 선보였는데, 노이마이어가 작품을 직접 골라주었다고 들었다.
맞다. 10년 만에 갖는 나의 한국 공연에 두 작품을 추천해주었다. 두 작품 모두 ‘사랑’을 주제로 한다. ‘신데렐라’는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신데렐라와 왕자의 풋풋함을, ‘아다지에토’는 이미 많은 시간을 보낸 남녀의 복잡한 심리 상태를 이야기한다. 노이마이어는 내가 무대에서 감정을 드러내며 연기하는 모습을 좋아하는데, 그런 면에서 한국 관객에게 나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더라.
이번 무대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노이마이어의 작품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매우 직선적인데 그게 단순하게 느껴지지 않고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이유가 뭘까? 10년 째 노이마이어가 안무한 춤을 추고 그에게 지도를 받고 있는데, 노이마이어는 어떤 예술가인 것 같나?
말로 설명하긴 어려운, 노이마이어의 능력인 것 같다. 또렷하게 드러내면서도 그 위에 얇은 천을 살짝 덮어놓은 듯 표현한다. 디렉터의 새로운 작품을 마주할 때 가끔씩 ‘이 부분은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관객들이 보기에 이해가 잘 안 될 것 같은데’라는 의심이 들 때가 있는데, 막상 리허설을 하고 나면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 퍼즐같이 촘촘히 디테일이 구성되어 있다.
노이마이어가 무용수들과 함께 작품을 완성해가는 과정은 어떤가?
작품을 구상하는 단계부터 연구를 무척 많이 하는데, 그걸 전부 무용수들과 공유한다. 파일로 만든 자료를 보여주면서 배경 지식, 영감을 받은 이유, 동작의 의미 등을 세세히 설명한다. 일방적으로 지시하기보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무용수들과 대화를 많이 나눈다. 안무가로서, 디렉터로서 이루고자 하는 바가 확고하기 때문에 오히려 무용수들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것 같다. 대신 합의된 것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웃음)
함부르크 발레의 모든 무용수와 스태프는 노이마이어의 철학과 예술관을 완전히 신뢰하는 것 같다. 마치 목적지가 같은 한 배에 탄 사람들처럼.
그렇다. 그게 우리 발레단의 가장 큰 장점이다.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발레단이 존재하기에 디렉터의 작업에도 날개가 달리는 거라 생각한다. 그가 매년 하는 말이 있다. ‘만약 우리가 기차를 타고 같은 목적지로 향한다면 누군가는 기차 안에서 문을 열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담배를 태울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잠을 잘 수도 있다. 무엇을 하든 다 괜찮다. 근데 목적지가 다르다면, 그 기차에서 내려야 한다.’ 노이마이어라는 수장을 따라 같은 예술적 성취를 바라면서도, 개인의 가치를 존중받을 수 있다는 점이 참 좋다.
아직 코르 드 발레에 속해 있는데, 정기적인 승급 심사가 따로 있나?
없다. 디렉터의 재량이다. 승급에 대한 아쉬움은 늘 있지만, 대신 우리 발레단은 직급에 상관없이 기회가 많다. 코르 드 발레라도 작품에 어울린다고 판단되면 주역으로 설 수 있다. 나 역시 ‘호두까기 인형’ ‘신데렐라’ ‘프렐류드 CV’ ‘메시아’ 등에서 주요 배역을 맡았다. 우리 발레단은 투어 공연이 무척 많은데, 어디로 공연을 가는지에 따라 승급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아무래도 그 나라의 무용수가 솔리스트로 있으면 다방면으로 도움이 되니까.
열여섯 나이에 함부르크 발레학교에 유일한 한국인 학생으로 들어가 열여덟 살에 발레단에 입단했는데, 새로운 환경에 마주하는 데 두려움은 없었나?
로잔 콩쿠르에 출전했을 때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유럽의 몇몇 학교에서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 로열 발레학교, 존 크랑코 발레학교 등에서 입학 제의를 해왔지만 한국인 학생이 한 명도 없는 함부르크 발레학교를 선택했다. 노이마이어가 함부르크 발레학교에 깊이 관여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공부하고 싶었고, 한국인이 없으니 오히려 더 잘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힘들었던 걸 제외하면 고생스러운 부분은 별로 없었다.
발레학교 시절, 직접 안무한 작품을 노이마이어에게 선보이기도 했다고 들었다. 안무가로서의 미래를 상상하기도 하나?
학생들이 안무한 작품 중 두 작품을 선발해 노이마이어에게 선보일 기회가 있었다. 그중 나의 작품을 마음에 들어 하셔서 6분 길이로 늘린 뒤 교회에서 공연했다. 그 이후로는 안무할 기회가 없어 잘 모르겠지만, 디렉터에게 많이 배우며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있다. 무용수 이후의 길은 완전히 열어두고 있다. 안무 표기법(choreology)도 연구해보고 싶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보람 있을 것 같다.
궁극적으로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 단지 춤을 추는 무용수가 아닌, 작품을 완전히 소화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의 모든 감각으로 뿜어낼 수 있는 진정한 예술가가 되고 싶다. 경험을 해본 적은 없지만, 비슷한 느낌을 받아본 적은 있다. 곧 만나게 될 순간이라고 믿는다.
사진 심규태(HAR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