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조르당/파리 국립오페라 오케스트라와 라파엘 프뤼베크 데 부르고스/덴마크 국립교향악단이 2012년부터 비슷한 시기에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감행하여 영상물로 출시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아닌 덴마크와 프랑스의 베토벤이라?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글로벌 시대에 아시아와 남미에서도 자주 연주되는 베토벤, 누가 하느냐는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다. 필리프 조르당의 파리 국립오페라 오케스트라와 라파엘 프뤼베크 드 부르고스의 덴마크 국립 교향악단(DNSO)이 2012년부터 비슷한 시기에 베토벤 교향곡 전곡 사이클을 악단 사상 최초로 감행해 영상물로 출시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애호가들은 지갑을 열 준비를 해야 한다. 그만큼 음악의 완성도가 높다. 여기에 덤으로 오페라와 발레가 아니라 콘서트임에도 볼거리가 많다. 그만큼 영상미가 뛰어나다.
존경하는 어느 평론가는 카라얀의 베토벤은 ‘플라이급’, 클라이버는 ‘미들급’, 므라빈스키는 ‘헤비급’으로 비교한 적이 있다. 세 지휘자의 성향과 살아온 길을 떠올리면 그대로 들어맞는 명언이 아닐 수 없다. 그럼 1933년에 태어난 부르고스와 그의 막내아들뻘인 1974년생 조르당은 어디에 속할까. 전곡을 감상한 필자의 결과는 조르당은 클라이버와 동일한 ‘미들급’, 부르고스는 므라빈스키 바로 아래쯤에 해당하는 ‘라이트 헤비급’이다. 이건 분명 불혹을 눈앞에 둔 젊은이와 생의 마지막에 도달한 노 거장 사이의 간극이다.
조르당의 질주와 노장의 심연
슈만은 베토벤 교향곡 4번을 ‘두 북구의 거인(묵직한 3번과 5번) 사이에 낀 가녀린 그리스 아가씨’로 은유했다. “슈만이 그랬듯이 그리스 감성을 지닌 가장 고전적인 교향곡이면서 동시에 믿기 어려운 낭만주의의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르당은 그의 다큐멘터리 필름에서 캐낼수록 보석이 발견되는 교향곡 4번에 대해 애착을 아끼지 않았다. ‘선과 선의 교차가 아닌 면과 면의 중첩적인 대비’, 클라이버의 4번 1악장에서 발견되는 기막힌 뉘앙스다. 취리히 공대를 나온 클라이버, 역시 취리히에서 공부한 조르당과 서로 통해서였을까. 바이에른 국립 교향악단을 지휘한 클라이버의 4번에서 뿜어져 나오는 면과 면의 대비가 조르당의 지휘봉에서도 솟구친다. 그러면서도 프랑스어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이 악단 특유의 부드러움과 유창함을 잃지 않는다.
부르고스의 4번은 어떨까. 우선 부르고스는 연륜만큼이나 템포가 느리다. 1악장 러닝타임이 12분 20초로 조르당보다 1분이나 길다. 그리고 바다처럼 유장한 흐름은 므라빈스키와 닮았다. 조르당이 말한 대로 독일어 특유의 강한 자음과 중후함이 오히려 덴마크로 전이된 느낌이다. 그리고 화려하고 웅장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코펜하겐 콘서트홀 무대 중앙에 서서 단원을 대표하는 악장은 바이올리니스트 홍수진이다. DNSO의 6명의 악장 가운데 한 명이지만 사이클 전체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연주할 때 홍수진을 마주보고 있는 수석 첼리스트는 한 살 터울인 동생 홍수경이다. 우리 연주자 두 명이 덴마크 대표 악단의 얼굴로 등장하는 장면만으로도 가슴 벅차다.
베토벤의 초기 교향곡 가운데 2번은 작곡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곡이기도 하다. 모차르트의 교향곡 39번 에서 최초로 사용된 클라리넷이 주류 악기로 등장한다. 1악장 2주제를 노래하는 파리 국립오페라 오케스트라의 클라리넷은 섬세하게 물결친다. 반면 DNSO의 클라리넷은 도도하다. 같은 음악이 이토록 지휘자와 악단에 따라 달라짐을 극명하게 알 수 있다. 또한 인류 문화유산 가운데 으뜸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는 파리 가르니에 극장의 아름다움은 실로 눈부시다. 교향곡 2번과 7번을 가르니에 극장에서 연주한 조르당의 혜안은 기막힌 음향 구현이라는 보너스를 추가로 획득했다. 아무래도 현대적 건축물인 바스티유 오페라하우스와는 차이가 난다.
“오페라 지휘처럼 대본, 스토리, 무대디자인, 의상 등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베토벤 심포니는 음악만을 전달해야 합니다.”
조르당의 고백처럼 교향곡 8번의 1악장은 오직 음악 속으로 질주한다. 마치 8번의 최고 명반으로 꼽히는 헤르베르트 케겔의 라이프치히 방송교향악단의 연주처럼 치열하게 타오른다. 이에 비해 부르고스의 DNSO는 저 심연의 바닥에서부터 서서히 달궈진다. 교향곡 3번의 ‘장송행진곡’은 무려 1분 30초 이상 조르당보다 뒤처지며 비장미를 극대화한다. ‘영웅의 영광’보다는 ‘영웅의 고통’과 현세의 녹록지 않은 삶을 그리는 부르고스의 해석은 제2차 세계대전 전 세대의 거장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풍요와 물질이 우선하며 테크닉 연마에 절치부심하는 요즘 세대와는 대척점에 서 있다. 그만큼 감동적이다.
교향곡 9번 ‘합창’에서 두 지휘자의 에너지는 정점에 선다. 독창자들을 합창석 바로 앞에 배치한 부르고스의 아이디어는 기막힌 음향을 자랑하는 코펜하겐 콘서트홀에 최적화된다. 4악장 피날레를 광폭하게 밀어붙이는 조르당의 양손은 악보를 넘어선 음악의 본질을 꿰뚫는다. 전 곡이 끝나고 DNSO의 홍수진 악장과 브루고스는 희열로 가득 차 있다. 음악에 대한 확신은 연주자가 먼저 가지고 있어야 청중에게 전달된다는 기본 원리가 확인되는 순간이다.
DNSO는 베토벤 외에 로드리고, R. 슈트라우스, 베를리오즈의 작품을 추가로 수록했다. 2013년 3월, 80세의 부르고스와 고희의 기타리스트 페페 로메로가 무대에 손을 맞잡고 등장했다. 그저 숭고한 예술혼이 꿈틀댈 뿐이다. 두 거장이 빚어내는 로드리고 ‘아란후에스 협주곡’은 베토벤의 교향곡에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로메로의 현란한 핑거링은 여전하다.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을 지휘하는 부르고스의 머리카락은 거의 없다. 제3부 ‘하산(下山)’에서 바닥을 치고 울려오는 파이프 오르간의 페달저음은 부르고스의 느리디느린 지휘 동작과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숭고한 넋의 고양이다. ‘환상 교향곡’ 3악장 후반부, 잉글리시 호른의 부름에 오보에가 화답하지 않고 팀파니 주자 4명이 만들어내는 광기어린 두드림은 압권이다.
부르고스와 조르당의 한판 승부는 결국 무승부로 끝났다. 우리의 음반 구매목록에 추가해야 할 일만 남은 것이다.
조르당/파리 국립오페라 오케스트라의 베토벤 교향곡 전곡 DVD
리코르다 메르베트(소프라노)/다니엘라 진드람(메조소프라노)/
로버트 딘 스미스(테너)/귄터 그로이스뵈크(베이스)/필리프 조르당(지휘)/
파리 국립오페라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Arthaus Musik 109248 (4DVD, PCM stereo 5.1 DTS, 16:9,
403분+특별영상 52분)
부르고스/덴마크 국립교향악단의 베토벤 교향곡 전곡 DVD
알비나 샤기무라토바(소프라노)/샬롯테 헬레칸트(메조소프라노)/
스콧 맥앨리스터(테너)/요한 로이터(베이스)/페페 로메로(기타)/
라파엘 프뤼베크 데 부르고스(지휘)/덴마크 국립교향악단/덴마크 국립합창단
Dacapo 2.110417-22 (6DVD, NTSC, 2.0 PCM stereo,
5.0/5.1 DD, 16:9, 553분)
사진 아울로스미디어